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31화 (204/558)

제231화

유단은 벌어진 땅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저 밑, 시야가 닿지 않는 저 깊은 곳에 인지를 초월한 힘이 넘실대고 있다.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통제하지 못한 힘. 모든 것의 시작이자 모든 것의 끝.

연구동 천장이 무너지고, 건물이 가라앉았다. 사방이 폐허가 됐으나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다.

“사, 살려줘…….”

이름 모를 인간의 구슬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흡이 짧고 약하다. 곧 죽게 되리라.

유단은 소리가 나는 곳을 잠시 바라본 뒤 다시 균열 사이로 시선을 던졌다.

죽음.

기능 정지.

멈추면 기회를 잃게 된다. 기회의 소멸은 아쉬운 일이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다.

살갗이 찢어져 피가 흘러나오고, 다리가 골절돼 지속해서 통증이 일어나고 있지만, 이 역시 대수롭지 않다.

지금 집중해야 할 건 삶과 죽음이 아닌 저 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었다.

거대한 힘의 격류.

세상의 구조를 바꿀 수도 있는 웅대한 힘 안에서 어떤 의지가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나는 단순한 에너지원이다. 거기에 의지가 담기는 일 따윈 없어야 한다.

바람에 생각이 없고, 열에 감정이 없으며, 내리는 비에 이성이 담겨 있지 않듯 마나 역시 단순한 힘으로 존재해야 한다.

분명 그래야 할 텐데…….

날뛰던 마나가 안정을 되찾아갔다.

서쪽 하늘에 등장한 거대한 검.

그게 뿌리 안에 감돌던 어떤 의지를 제거해 버렸다.

섭리를 벗어난 두 힘의 격돌이었다. 방법론은 차치하고 당장 벌어진 것들만을 이해해 보기로 했다.

첫 번째.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뿌리에 의지를 담아 변화를 주도했다.

두 번째.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일련의 사건이 저지당했다.

“통제할 수 있는 건가? 저것을?”

유단은 깊은 어둠 속에서 보랏빛으로 희미하게 빛을 내는 뿌리를 바라보았다.

영혼세계에 있을 줄리어스를 찾아내고, 그녀의 기억을 현실로 이식시키려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할 것이다.

뿌리는 다스릴 수 없는 힘이라 기획 단계에서 배제해 놓았다. 하지만 생각이 달라졌다.

목도하고 말았다.

뿌리에 의지가 담겨 있는 걸.

빙긋 웃음이 지어진다.

가능성을 확인했다. 큰 수확이었다. 방법이야 찾아내면 될 일이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유단은 왼발을 바라봤다. 골절된 부위를 매만져 봤다. 저릿한 통증이 올라온다.

“불편한 몸이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건물 잔해 속에서 부목으로 쓸 만한 나무판자를 발견했다. 왼발에 대고 천으로 묶었다.

긴 막대기를 지팡이 삼아 일어섰다. 머리로 치고 오르는 통증을 의식에서 떼어냈다. 감각에 예민해질 필요가 없었다. 아픈 건 그저 신호일 뿐이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붉은 기류가 말끔하게 사라졌다.

시원하게 뻗은 푸른 하늘.

줄리어스가 좋아하는 색깔이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가벽처럼 덩그러니 남은 벽 뒤쪽으로 거대한 구멍이 보인다.

유단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리지널은 이제 없는 건가.”

건물 절반이, 거기에 포함된 연구 자료실이 끝을 알 수 없는 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본체 역시 사라지고 말았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정밀한 데이터와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연결망 역시 소실된 것이다.

물론 복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파편화돼 당장 떠올릴 수는 없지만, 로키의 기억 데이터는 이 몸뚱이 속에 잠들어 있으니까.

유단은 머리카락을 몇 가닥 뽑아냈다. 장례 풍습에 따라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려 보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조촐한 장례식을 끝낸 후 몸을 돌렸다.

사태의 규모를 봤을 때 둔뿐만 아니라 제국, 나아가 연합왕국까지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인간이 죽었을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시체만 해도 수십을 넘어가고 있었다. 인구 밀도가 낮은 연구동인데도 이 지경이다.

도시 중심지는 그야말로 공동묘지가 됐을 것이다.

유단은 눈앞에 엎어져 있는 사람에게 걸어갔다. 교수 전용 겉옷을 입고 있었다.

뒤집어 보니 퀜 교수였다.

눈동자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호흡도 정지. 생존을 위한 모든 기능이 멈춘 상태였다.

명백한 육체의 죽음.

유단은 손을 뻗어 퀜의 눈꺼풀을 쓸어 내렸다. 한 번에 덮이지 않아 몇 번이나 손을 움직여야 했다.

“교수님과 대화하는 건 꽤 즐거웠습니다. 제공해주신 아이디어도 흥미로웠고요.”

신체 기능이 정지했으니 들을 수 없다. 알면서도 중얼거리게 된다.

생명 활동이 정지해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안구를 눈꺼풀로 덮는 행위. 이 역시 불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논리적이지 않은 행동이나 유단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목울대 아래쪽에서 뜨뜻한 것이 맴돌았다. 발목에서 올라오는 통증은 무시할 수 있지만, 이 감정은 외면할 수 없었다.

슬픔인가 아쉬움인가.

“유단.”

지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탄드라 교수였다.

“퀜 교수님은…….”

탄드라의 질문에 유단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탄드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한동안 호흡을 고르던 탄드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일단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합류하죠. 생존자를 확인하고 있는 것 같으니.”

탄드라와 함께 움직일 때였다.

어린애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수님.”

“왜 그러죠?”

“이 소리 들리시나요? 애가 우는 듯한…….”

탄드라가 주변을 둘러본 다음 말했다.

“아니요.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몸에 이상이 생긴 걸까?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유단은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고 몸을 틀었다.

“유단?”

“교수님, 가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 몸으로요? 일단 치료부터 받아요.”

“괜찮습니다. 제 몸은 이 정도로 고장 나지 않을 겁니다.”

“고장이라니…….”

뒤에서 부르는 탄드라를 무시한 채 걸음을 뗐다.

무너진 건물들이 작은 동산을 이뤘다. 불안정한 지면을 밝으며 계속 움직였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어린애의 울음소리.

그건 고막이 잡아낸 소리가 아니라 감정이 만들어낸 소리였다.

“프레나!”

유단은 무너진 집터 앞에서 소리 질렀다. 덴스의 딸, 수줍은 많은 그 애의 이름을 계속해서 외쳤다.

돌무더기를 손으로 치워냈다.

손톱이 깨져 나가 피가 흘러나왔다. 손가락 사이가 찢어져 벌건 살점이 드러났다.

아픔이 신경을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프레나.

잔해를 들추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이 행동의 의미가 무엇일까? 나는 왜 이토록 절박하게 그 아이를 찾고 있는 걸까?

몸은 자산이다. 줄리어스와 만날 때까지, 이 자산을 소중히 다뤄야 했다.

그러니 도구도 없이 맨손으로 건물 잔해를 뒤적거리는 건 당장 그만둬야 한다.

하지만, 손은 이성과 별개로 계속 움직였다.

정신을 차리고 손을 멈춘 건 익숙한 테이블을 발견한 후였다.

거실에 놓여 있던 테이블이다.

프레나는 심심하면 저 밑으로 기어 들어가 숨바꼭질을 했다. 유단은 알면서도 모른 척 프레나를 찾아 몇 번이고 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쪽 다리가 망가진 테이블 밑,

시체가 한 구 있었다.

덴스의 아내, 사모님이라 불렀던 여자다.

기적을 일으킨다는 의술사, 아니, 신의 힘을 인도받았다는 성스러운 남매가 온다고 해도 이 여자를 살리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다 죽은 건가.

죽고 만 건가.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주저앉아 헤픈 웃음을 흘렸다. 왜 웃음이 나오는지, 웃고 있는데 왜 이리도 가슴이 저미는지 알 수 없었다.

멍하니 시체를 바라볼 때였다.

들썩였다. 잘못 본 게 아니라 시체가 조금 움직였다.

유단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시체의 어깨를 붙잡고 살며시 들어 올렸다.

프레나가 그곳에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딸을 품에 안고 테이블 밑으로 들어간 건가.

손가락 끝이 떨렸다. 숨이 탁 놓이는 안도감을 느끼며 손끝으로 프레나의 목덜미를 만졌다.

온기가 있다. 호흡도 있다.

충격 때문에 잠깐 정신을 잃은 것 같지만, 곧 깨어나리라.

다행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몇 번이고 다행이다, 이 말을 내뱉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무엇 하나 이뤄낸 것 없고, 그저 작은 인간의 생존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런데 뭐가 다행일까?

저 아이가 살아 있다고 해서 도움이 될 건 없다. 줄리어스를 만나는 데 하등 쓸모가 없다.

어째서 안도감이 들고 기쁘며, 감사하게 되는 걸까.

누굴 위한 감사이며, 누굴 위한 기쁨일까.

혼란스러웠다. 유단의 몸을 차지한 후 인간 감정에 익숙해졌다고 판단했다.

욕망과 욕정도 이해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밀려드는 이 감정은 그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순간, 미지에서 오는 두려움이 몸을 휘감았다. 이 작은 아이 때문에 이해 못 할 행동을 했다.

자기통제권을 잃는다는 건 치명적인 일이었다. 중요한 순간에 판단력이 흐려진다면 모든 걸 망칠 것이다.

숨결이 손바닥에 전해진다.

간지러운 숨이다.

동시에 불확실성을 높이는 숨이었다.

유단은 프레나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 아이가 지닌 의미는 무엇인가. 이성을 혼탁케 하는 이 아이의 존재 가치는 무엇인가.

변동성은 줄여야 마땅하다.

해석 불가한 감정이 다시 몸을 지배하기 전에 싹을 잘라내는 게 옳다.

작게 기침하는 프레나를 바라봤다.

한 줌에 들어올 가느다란 목.

꺾어 버린다면 변수 하나가 줄어드는 것이다. 명료한 이성을 마비시키는 적절치 못한 개체. 제거하는 게 여러모로 편할 것이다.

유단은 줄리어스를 생각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었다.

* * *

기적.

한 인간이 이뤄낸 위업.

밀레나는 중앙광장에 모여든 이들을 바라봤다. 엉망이 된 성도에서 어떻게 꽃을 찾았는지, 꽤 많은 이들이 꽃을 들고 있었다.

꽃을 찾지 못한 이들은 하얀 천을 곱게 접어 두 손에 쥐고 있었다.

모두 단 한 사람을 위해 이곳에 모였다.

끔찍했던 어제를 끝내고 새로운 오늘은 맞이할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

위대한 마법사.

마스터 아낙스.

예복을 걸친 성교회 대주교가 광장에 임시로 만든 단상 위로 올라갔다.

한 손에는 반으로 찢은 성서를, 다른 한 손에는 흰색 천을.

“나는 신의 뜻을 모릅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이제 신이 밉습니다. 신은 방관했습니다. 이 시련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왜 이겨내야만 하는지, 어째서 이 시기에 내렸는지, 그 무엇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분노를 담아 신을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이, 아니, 그가 능력이 있다면 우릴 굽어 살폈을 텐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를 절망으로 밀어 넣을 뿐 구원의 손길도, 계시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어제 우리는 세상의 끝을 봤습니다. 종말을 목격했습니다.”

대주교가 반으로 찢어진 성서를 다시 한번 반으로 찢어버렸다.

“모든 것이 끝나기 직전, 우리를 구한 건 한 인간이었습니다. 인간. 인간이 인간의 손으로 인간을 구원해 냈습니다.”

성서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마스터 아낙스. 그는 신의 대변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롯한 인간이었죠. 우리가 무의미하게 신을 부르짖을 때, 마스터 아낙스는 몸을 불살랐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발붙여 사는 모든 이들은 아낙스에게 빚을 진 셈입니다.”

아낙스, 아낙스!

영원히 불릴 그 이름이 중앙광장을 가득 채워 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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