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30화 (203/558)

제230화

타오르는 백색 불길을 휘감은 거대한 검.

가하란은 넋을 놓고 눈앞에 벌어지는 기현상을 바라봤다.

검의 궤적을 따라 붉은 하늘이 갈라진다.

세상을 물들여 버린 붉은빛이 새하얀 불꽃에 휘감겨 사라져 간다.

“끝났어! 모든 게 끝이야! 우린 다 죽을 거라고!”

어떤 남자가 하늘에 나타난 검을 바라보며 외쳤다.

백색 불꽃을 두른 검이 지상을 향해 내려온다.

잊고 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두려움.

가하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저 거대한 검이 떨어지면 이 땅은 어떻게 되는 걸까?

“신이시여, 제발.”

밀리언이 속삭였다.

가하란은 두 손을 붙잡은 채 속으로 아빠를 계속 찾았다.

비명을 지르던 사람들도 조용해졌다. 삭막한 침묵이 도시 전체를 지배한 것 같았다.

고개를 들면 바로 위에 검이 있을까? 어떻게 할 수 없는 걸까?

적막이 길어졌다.

가하란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아.”

새파란 하늘이 보인다. 한껏 비를 쏟아낸 하늘처럼 시리도록 맑다.

붉은 기운도, 하얀 불꽃에 휘감긴 검도 사라졌다.

“아저씨.”

가하란은 밀리언을 바라봤다. 밀리언 역시 멍한 눈으로 하늘을 훑고 있었다.

“아무래도 끝난 것 같다.”

밀리언이 말할 때였다.

콜록, 하고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가하란은 제니를 바라봤다. 제니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가하란의 손을 움켜쥐었다.

“제니, 제니.”

살며시 손에 힘을 주며 불러봤다. 감겨 있던 제니의 눈이 스르륵 열렸다.

“…가하란. 나 무서운 꿈을 꿨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꿈이 아니라고 해야 하나? 거짓말은 하면 안 되는 거지만, 지금은 거짓말이 필요했다.

“좀 더 자. 아직은 괜찮아.”

“응, 그럴래. 졸려.”

제니의 눈이 다시 감겼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았다! 살았어!”

“신께서 도우신 겁니다! 우린 이제 살았어요!”

정신을 잃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서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냥 잠깐 기절한 거였어. 정말 다행…….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가하란 눈에 노인을 붙들고 우는 남자가 보였다. 그 옆에 있는 사람도 상황은 비슷했다.

누군가는 자식으로 보이는 사람들, 누군가는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을 안고 숨죽여 울고 있었다.

살았다는 기쁨의 함성은 짧았고, 비탄 섞인 울음이 기쁨의 부재를 채워 나갔다.

“카리슨! 정신 차려, 카리슨!”

“여기 사람이 깔렸어요! 도와주세요! 이쪽이에요!”

“여기도 사람이 쓰러져 있어요!”

모두가 깨어난 게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차가운 바닥에 누워 미동조차 없는 사람이 더 많았다.

끝난 게 아닌 건가?

붉은빛도, 거대한 검도 사라졌다.

지진도 멈췄고 땅을 뚫고 나왔던 붉은 선과 보랏빛 대기도 자취를 감췄다.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든 원인이 제거됐는데…… 왜 사람들은 깨어나지 않는 거지?

가하란은 조끼를 벗어 제니의 머리 뒤에 댄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른발 대신 왼발에 힘을 주며 허리를 폈다.

눈이 시큰거렸다. 아까부터 선의 세계를 들여다본 것처럼 눈이 지끈거린다.

가지고 다니는 모노클을 주머니에서 꺼내 오른쪽 눈에 얹었다.

숨을 고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떴다.

“마나가…….”

폐허가 된 도시 위로 총천연색의 마나가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밀도 높은 마나가 대기를 꽉 채운 상태였다.

가하란은 갈라진 땅을 바라봤다.

희미하게 스며 나와야 할 마나가 마치 범람한 강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 모노클이 검게 물들었다. 마나 회로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숨이 가빠졌다.

가하란은 선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모든 정보가 선으로 대체됐다.

그리고 망막에 비친 건.

“……너무 많아.”

평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정보들이 대기를 떠돌아다녔다.

에너지가 과잉 공급되고 있었다.

쓰러진 사람들을 바라봤다.

바뀐 정보 환경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모습이었다. 선으로 변한 정보를, 마나를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 정보에 짓눌려 자신의 몸을 이루는 정보들이 분해되고 있었다.

반대로 멀쩡히 움직이는 사람들은 정보의 물살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이 너무 많은 걸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하란은 두 손으로 눈앞을 가렸다. 눈꺼풀을 내리고 이를 악물었다.

어둠이 내려왔지만 눈은 계속해서 정보를 읽어 내려갔다.

눈이 제멋대로 작동했다.

심상세계에 갇혔을 때가 떠올랐다. 눈이 제멋대로 폭주하며 뜨겁게 달궈지던 그 순간이.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정신을 붙들어야 한다. 편해지자고 놓아버리면 정말 큰일 날 것이다.

내 말을 들어, 내 말을 들어.

눈을 부여잡고 외쳤다.

정보의 창을 닫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라고.

눈에서 열감이 사라진다. 가하란은 눈에서 손을 뗐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밀리언의 얼굴이 보였다.

“다친 거냐?”

“아니에요. 잠깐 눈에 뭐가 들어가서.”

머리가 복잡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안 보이겠지만,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변해버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쓰러진 사람들은 이대로 못 깨어나는 걸까?

“셰프!”

네일라가 손을 흔들며 걸어왔다.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보였다.

“괜찮으신 거죠?”

밀리언이 왼손을 뒤로 감추며 말했다.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다행이네요. 건물 무너지고 나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네일라가 무릎을 굽혀 가하란과 눈높이를 밎췄다.

“너…….”

네일라의 눈매가 매섭게 변했다. 가하란은 입을 꾹 다물었다. 빤히 쳐다보던 네일라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게 안에서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땐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거야. 알겠어?”

“네,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어. 그냥, 그냥.”

네일라가 가하란을 가볍게 안았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네가 마지막까지 제니를 붙잡아준 덕분에…….”

중간에 말을 끊은 네일라가 잠든 제니를 내려다봤다.

“잠들었나 보네.”

“네. 무서운 꿈을 꿨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냥 더 자라고 했어요.”

“잘했어. 지금 깨어 있어봤자 좋은 꼴은 못 볼 테니.”

씁쓸하게 말하던 네일라가 다시 가하란을 노려봤다.

“너도 좀 애처럼 굴어! 이럴 땐 엉엉 울면서 어른한테 의지해도 돼. 셰프 바지에 코도 좀 닦고.”

“나중에 생각나면 그렇게 할게요.”

가하란은 헤실헤실 웃었다. 사실 속으로는 눈물이 말라버릴 정도로 울었다.

무서워서 울고, 살고 싶어서 울고.

단지, 정말 조금 참아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무엇보다 여기서 울어버리면 제니는 더 크게 울 테니 지금은 웃는 게 좋았다.

긴장이 풀려서 그랬을까.

왼발에 무게를 싣고 중심을 잡고 있었는데, 무의식적으로 오른발로 체중을 옮겼다.

발목 밑으로 허전한 감각이 전해지며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아차 싶었다.

넘어지려는 몸을 네일라가 잡아주었다. 네일라의 눈동자가 오른쪽 발목으로 향한다.

“너 이거…….”

“괘, 괜찮을 거예요.”

“괜찮기는!”

네일라가 손을 뻗었다. 가하란의 바짓단을 올리고 신발을 벗겼다.

가하란은 시선을 돌렸다. 얼핏 보였던 검게 변한 살. 그걸 제대로 마주하기 싫었다.

“셰, 셰프.”

네일라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가하란도 슬며시 자신의 발을 바라봤다.

종아리부터 시작해서 그 밑으로 살이 새카맣게 변했다. 여전히 통증은 없었다.

하지만 시각화된 정보가 머리를 사정없이 찔렀다.

이상했다. 아프지 않은데 아팠다. 통증이 꿈틀대며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네일라의 손이 검게 변한 발에 닿았다.

“가하란, 너…….”

당혹감에 젖은 눈동자가 이번엔 밀리언 쪽으로 향했다.

“셰프, 아까부터 왜 왼손을 감추고 있어요?”

“난 신경 쓸 거 없어.”

“그렇게 말하면 더 신경이 쓰이죠! 어디 봐요.”

네일라가 다그치자 밀리언이 왼팔을 슬쩍 내밀었다.

팔뚝 아래로 손이 검게 변했다.

“통증은 없어. 하지만 다른 감각도 없는 상태야.”

그렇게 말하며 밀리언이 자신의 왼팔을 세게 비틀었다. 보기만 해도 아픈데, 밀리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치, 치료할 수 있을 거예요.”

밀리언이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말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가하란은 밀리언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건 고칠 수 없을 거야.

“이쪽부터 돕죠! 하나 둘 셋 하면 들어 올리는 겁니다.”

“여긴 지반이 불안정해요!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으니까 다른 곳부터 시작하죠!”

“살아남은 치안대는 행정처로 속히 집결하십시오!”

조용했던 거리가 다시 복잡스러워졌다.

“네일라, 미안하지만 이 애들을 좀 부탁하마.”

“네. 여긴 제가 맡을 테니까 얼른 사모님한테 가보세요. 분명 셰프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밀리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누나랑 같이 있자. 이젠 지진도 멈춘 거 같으니까 괜찮을 거야.”

네일라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다음 제니를 무릎에 올렸다.

가하란도 그 옆에 앉아 거리를 바라봤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갈라진 땅, 커다란 구멍, 솟아오른 지반과 건물을 잡아먹으며 생긴 구덩이.

모든 게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살아남아 움직이고 있었다.

“다들 괜찮겠죠?”

가하란은 네일라를 보며 물었다.

“그럼. 괜찮을 거야. 건물이야 다시 지으면 돼. 도로도 재정비하면 되고.”

네일라가 팔을 뻗어 가하란의 어깨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맞닿은 몸을 통해 체온이 전해졌다.

그제서야, 가득 눌러 담고 있던 울음이 소리도 없이 흘러나왔다.

“아빠가 보고 싶어요. 아빠도 괜찮겠죠? 네?”

“당연하지. 너희 아빠도, 제니네 가족도 모두 무사할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하늘도 이렇게 맑아졌잖아. 다 잘될 거야. 그래, 다 잘될 거야.”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에 마음이 놓인다.

그래, 다 잘될 거야.

아무 일 없을 거야.

이 혼란이 잠잠해지면 곧 아빠가 돌아오겠지.

발이 이상해진 걸 보면 아빠가 화를 내고, 또 슬퍼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아.

만날 수 있으니까.

가하란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거대한 검이 나타났던 서쪽 하늘을 바라봤다.

새하얗게 불타오르던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붉은빛을 가르며 내려오던 검.

그건 신의 도움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악몽의 시작이었을까.

“유성우를 닮았어요.”

“유성우?”

“예전에 아빠랑 같이 봤어요. 하늘에서 빛나는 별들이 떨어지는 걸요. 그 검…… 마치…….”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눈을 뜨고 싶어도 뜰 수가 없었다. 나른하고, 또 나른해서 생각하는 걸 멈추게 됐다.

“누나. 저 졸려요.”

“푹 자. 이제는 다 끝났으니까 자도 돼.”

“조금만, 조금만 잘게요. 정말 조금만요.”

“그래.”

눈을 감았다. 네일라의 콧노래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꿈에서 할아버지를 만났다.

거대한 매를 타고 하늘을 질주하는 할아버지 곁에, 아빠가 있었다.

같이 매를 태워달라고 소리쳤으나 두 사람은 돌아보지 않았다.

멀리, 멀리.

목 놓아 불러봤지만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게 꿈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눈을 뜨면 아빠와 만나게 되리라.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아빠가 귀찮다고 해도 절대 놓아주지 않고 다 말할 것이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네일라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현실인지, 꿈인지 모호한 경계에서 가하란은 마음 편히 그 노래를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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