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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229화 (202/558)

제229화

“…아가씨.”

“락샤!”

밀레나는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락샤를 붙잡았다.

하늘이 붉게 물들면서 사람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몸을 가누지 못했다.

“락샤, 정신 차려. 락샤!”

흔들어도 반응이 없었다. 곁에 있던 피온 역시 스르륵 옆으로 쓰러지더니 의식을 잃었다.

“도와주세요! 여기 사람이!”

“이봐요! 이봐요!”

살아남은 자들이 고함을 질러댔다.

밀레나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주변을 살폈다. 대피 장소로 지정된 7구역조차 갑자기 생겨난 균열 때문에 엉망이 됐다.

무너진 시계탑이 땅 밑으로 사라졌다. 거대한 구멍이 주변 일대를 삼켜버렸다.

뿌리 때문에 지반에 변화가 생기는 거라면, 저 붉게 물든 하늘은 대체 무엇인가?

“밀레나!”

율이었다. 뒤쪽으로 미엔과 브리테, 이리엘데와 로운도 보였다.

“무사했구나.”

“난 괜찮지만…….”

밀레나는 락샤와 피온을 바라봤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생명의 기척이 이제 느껴지지 않는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일평생을 같이해 온 사람들이었다.

“락샤.”

밀레나는 흐리멍덩하게 뜬 락샤의 눈을 감겨주었다.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인데, 이렇게 떠나보낼 순 없는 사람인데.

“가자. 여기도 위험해.”

율이 다가와 말했다. 밀레나는 영원한 잠에 빠진 락샤와 피온의 이마에 입맞춤한 다음 일어섰다.

“다들…….”

동기들을 보며 괜찮냐고 물으려 할 때였다. 밀레나는 뒷말을 차마 꺼낼 수 없었다.

표정이 다들 안 좋다.

“멍청하게 있을 시간 없어. 살아남았으니 살아남은 자의 의무를 다해야지.”

미엔이 말하며 붉게 변한 눈꼬리를 손으로 쓱쓱 문지른다.

“일단 의회 대회의장으로 이동하자.”

미엔이 몸을 돌릴 때였다. 이제는 사라진 왕성 서쪽, 의회 대회의장이 있는 그곳에서 땅이 치솟았다.

밀레나는 입을 살짝 벌리며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바라만 봤다.

성도 안쪽에 비죽 솟은 작은 산이 생겨났다. 무너진 건물들이 산자락을 타고 떠내려간다.

“저, 저게 뭐야.”

이리엘데가 떠듬떠듬 말했다.

붉은 하늘, 사라진 땅, 솟아난 토지, 그리고…….

“조심해!”

땅에서 생긴 틈새에서 붉은 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보자마자 귀족 거주지 상공에 나타났던 괴생명체가 떠올랐다.

휩쓸리면 끝이다.

채찍처럼 다가오는 붉은 실을 피해 몸을 날렸다.

콰가강, 실이 훑고 간 자리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휩쓸린 인간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아슬아슬하게 피한 사람들도 곧 비틀거리더니 쓰러졌다.

자세히 보니 피부가 검게 변하고 있었다.

밀도 높은 마나가 넘실대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제대로 살아남을 인간이 몇이나 될까?

“다들 살아 있어?”

뿌옇게 일어난 먼지 저편을 바라보며 외쳤다. 다행히 동기들은 무사했다.

“대회의장은 이미 끝난 거 같은데, 폐하의 임시 거처 쪽으로 움직일까?”

“그렇게 하자.”

미엔이 퉤 하고 침을 뱉어낸 뒤 말했다.

“밀레나, 율, 로운. 너희 셋은 임시 거처 쪽으로 가. 나, 브리테, 이리엘데는 스콜라로 가볼 테니까.”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에 맞는 지시였다.

“상부의 지시를 받을 수 있으면 받고, 그게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각자 알아서 움직이자. 최중요 인사 구조 활동이 우선인 거 잊지 말고.”

눈빛을 교환한 뒤 양쪽으로 찢어졌다.

“가자.”

밀레나는 선두에 서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자마자 보인 건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건물 잔해와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현상을 목격하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밀레나는 쓰러져 있는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맥을 느껴보려 했지만, 손끝으로 전해지는 건 싸늘함뿐이었다.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뛰었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갈라진 틈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움직이자.”

율이 밀레나의 등을 치며 말했다.

포장된 도로가 붉은 실에 휩쓸려 엉망이 됐다. 멀쩡하게 서 있는 건물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개 한 마리가 날카롭게 짖으며 거리를 뛰어다녔다. 밀레나는 헐떡이는 개를 지켜보다가 다시 움직였다.

“끝나기는 하는 걸까?”

로운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길 빌어야지.”

무력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건물이 엿가락처럼 휘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성도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아니, 성도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리라.

이 사태가 진정되고 난 뒤 과연 몇이나 살아남을까?

“다들 임시 거처 쪽으로 몰려가고 있어.”

살아남은 시민들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황제의 곁이 가장 안전하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지면이 갈라지며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예측할 수 없는 균열이었다.

밀레나는 손을 움켜쥐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접근하지 마라!”

“물러서!”

임시 거처 주변은 아수라장이었다.

경비대가 무너진 길목을 사수하며 창끝을 세워 시민의 접근을 막았다.

“저기가 가장 안전하잖아! 너희들도 그래서 가는 거고!”

“저기! 저기 중앙은행장입니다. 다들 임시 거처 쪽으로 가고 있어요! 황제의 곁으로 가야 우리도 삽니다!”

“저리 비켜! 우리도 살아야 할 거 아니야!”

살아남은 시민들이 경비대와 대치할 때였다. 중무장을 한 기사가 경비대 뒤쪽에서 튀어나왔다.

황가의 문양이 어깨에 박혀 있었다.

수호기사대, 황제의 방패이자 검.

기사가 검을 뽑아 들었다.

주변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근방에 머무는 건 허락한다. 하지만 이 너머로 들어올 생각은 마라.”

사태가 진정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어디선가 돌이 날아왔다.

팅, 하고 갑주에 부딪힌 돌이 바닥에 떨어졌다.

“지랄하고 있네!”

그게 시작이었다.

시민들이 병장기를 손에 들었다. 굴러다니는 모든 것이 무기가 되는 상황이었다.

“안쪽으로 들어갑시다! 귀족 놈들이 저기에 모이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여기서 죽으나 들어가다 죽으나 똑같습니다! 여러분! 갑시다!”

임시 거처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앞을 틀어막고 있던 기사가 면갑을 내리며 외쳤다.

“기사대는 자리를 고수하라! 그리고 선을 넘는 놈들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마라.”

중무장한 기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경비대가 뒤로 물러서며 창을 내세웠다.

재앙이 모두의 등을 떠밀었다.

여기서 유혈 사태가 난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밀레나는 율과 로운을 바라봤다.

“나서서 막아볼까?”

“무슨 수로.”

“율, 기발한 전략 없어? 모의전 때는 항상 수를 만들어 냈잖아.”

“그건 싸움이고!”

기사와 시민들이 맞붙기 직전이었다.

“길목을 열어라.”

그 목소리에 수호기사대가 곧바로 반응했다. 내밀었던 검과 창을 거두고 양옆으로 갈라섰다.

밀레나는 기사들 사이에서 나온 남자를 바라봤다.

테인 오첸.

무적이라 불리는 황제의 기사가 나타난 것이다.

“질서를 지키면서 오십시오. 건물 안쪽에 모든 인원을 수용할 순 없으나, 주변에서 대기하는 건 괜찮습니다.”

뜨겁게 달궈졌던 대기가 한순간 식는 느낌이었다. 격분하던 시민들도 서로 눈치를 살피더니 병장기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가, 갑시다.”

몰려든 시민들이 황제의 임시 거처를 향해 움직였다.

밀레나도 대열에 합류해 이동했다.

하늘은 여전히 붉었고 땅은 제멋대로 춤을 췄다.

임시 거처 주변은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지만, 해결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곧 이곳도 지옥으로 편입되리라.

“부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곳곳에서 신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릎을 꿇고 경건한 자세로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붉게 물든 하늘이 점점 가까워졌다. 붉은 기운이 밀려들고 있었다.

새빨간 기류에 휩쓸린 사람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임시 거처로 사람들이 밀려왔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작동하는 게 없었다.

밀레나는 밀려드는 사람들을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무얼 해야 할까.

엄마, 대체 뭘 해야 할까요?

기적이 일어난 건 그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광휘가 터져 나왔다.

임시 거처 옥상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었다.

그곳에 누군가가 있었다.

강렬한 빛에 제대로 볼 수 없었으나, 곧 사람들이 어떤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마스터 아낙스!”

“아낙스 님께서 우릴 구해주고 계십니다!”

위대한 마법사가 뿌린 빛이 붉은 기류를 막아내고 있었다.

* * *

가하란은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길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건물들이 제멋대로 휘며 부서지더니, 하늘을 향해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닥을 뚫고 올라온 붉은 채찍들이 주변을 유린했다.

완벽한 계획에 따라 지어진 도시가 처참하게 뭉개지고 있었다.

“제니! 제니!”

가하란은 제니를 불렀다.

조금 전까지 말하던 애가 갑자기 사라졌다.

달뜬 숨을 내쉬며 무너진 요정의 안뜰 주변을 훑을 때였다.

제니가 보였다. 바닥에 쓰러진 채였다.

“제니!”

이름을 부르며 뛰어가려 하는데, 오른쪽 다리가 이상했다.

분명 발에 무게가 실렸고 땅에 닿았는데, 닿았다는 감각이 전해지지 않는다.

몸이 앞으로 기우뚱거렸다.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하고 앞으로 굴렀다.

건물 잔해에 치여 팔뚝이 쓰라렸다. 가하란은 팔을 쓰다듬다가 오른쪽 발을 바라봤다.

“…아.”

너덜너덜한 옷자락 사이로 발목이 보였다. 검게 변한 발이.

보는 순간 알았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통증은 없었다. 하지만 무서워서 다리가 와들와들 떨렸다.

이대로 주저앉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울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눈가를 닦고 일어섰다. 옆에 있는 부러진 나무 막대기를 지팡이 삼아 앞으로 걸어갔다.

오른발을 살짝 들고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질질 끌었다.

이윽고 제니 앞에 도착했다.

“제니, 제니.”

조심스럽게 볼을 두드렸다. 이럴 때 거칠게 흔들면 되레 위험하다고, 할아버지가 알려줬다.

귀를 제니 코에 가져다 댔다.

아주 약하지만 숨소리가 들려왔다.

죽은 건 아니었다.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가하란.”

뒤를 돌아봤다. 밀리언이 서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저 붉은 것에 닿으면 이렇게 되는 모양이다.”

아저씨의 왼쪽 팔꿈치 아래가 검게 변했다.

밀리언이 가하란의 오른발을 내려다봤다. 표정이 한순간 일그러진다.

가하란은 울음을 꾹 참고 말했다.

“저, 전 괜찮아요. 근데 제니가…….”

제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옆으로 다가온 밀리언이 가하란 머리에 손을 올렸다.

“괜찮을 거다.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 걱정하지 마라.”

“아저씨. 제니 괜찮은 거죠? 그런 거죠?”

고개를 끄덕이던 밀리언이 갑자기 턱을 들었다. 가하란도 덩달아 하늘을 보았다.

붉은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닿으면 큰일이다!

오른발을 검게 만든 붉은 실만큼이나 위험해 보였다.

하지만 피할 방법이 없었다.

하늘에서 안개처럼 내려오는 붉은 빛들을 어떻게 피한단 말인가?

“괜찮아, 괜찮아.”

아저씨가 오른팔을 벌렸다. 제니와 함께 아저씨 품에 안겼다.

번쩍 일어선 밀리언이 반대편 건물로 뛰었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 땅이 갈라졌다.

8m는 가뿐히 넘어 보이는 절벽이 생겨났다.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폭이었다.

부둥켜안은 아저씨의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꽉 붙잡아.”

“네.”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아저씨가 뛰던 걸음을 멈췄다.

가하란도 슬그머니 눈을 떴다.

서쪽 하늘.

아득히 먼 저 하늘에서 새하얀 불꽃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불꽃은 점점 형태를 바꾸더니…….

“검?”

이내 하늘을 가를 듯한 거대한 검이 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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