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8화
문득 어젯밤이 생각난다.
연구실에서 자료 정리를 마치고 기지개를 켤 때였다.
“왠지 계실 것 같더라고요.”
올란트였다.
덴스는 올란트가 건넨 찻잔을 받았다. 익숙한 차향이 진하게 올라온다.
올란트를 힐긋 바라봤다. 한 손만 뒷짐을 지고 있는데, 뭔가를 감추는 것 같았다.
“제법 쌀쌀해졌어.”
“그러니까요.”
올란트가 정리된 자료를 바라봤다.
“먼저 성도로 출발한 사람들은 지금쯤 도착했겠죠?”
“그럴 거야. 별일 없었다면 말이지.”
내일 이곳을 떠난다. 시설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인원만 남긴 채 전부 성도로 가는 것이다.
“다 끝났구나 싶었는데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네요.”
“알렝 국장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땐 눈앞이 캄캄했지.”
“폐하께서 진행하던 연구와 저희의 연구. 노선이 같다고는 하지만 공동 연구가 안착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겠죠?”
“그쪽은 경량화에 중점을 뒀으니까. 일단 가서 보고 생각해 봐야지.”
올란트가 창문을 바라봤다. 창문 밖, 격납고가 보인다.
“계파 싸움이 예상되긴 하지만, 한동안은 황제 쪽 비위를 맞춰 줘야겠죠?”
“역모죄로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그래야지. 뭐, 구석에 몰리면 그땐 네 힘을 빌릴 생각이야.”
“힘이요?”
“하하, 세나티아 의원께 부탁 좀 해야지. 살려달라고.”
“의원님께선 눈길 한번 쓱 주고 가라고 하실 겁니다. 할아버지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시겠죠. 워낙 냉철하신 분들이라.”
“농담해본 거야. 우리 힘으로 버텨내야지. 우리가 다듬어온 지식, 그게 우리를 지켜줄 거다. 세상에 그보다 튼튼한 성벽은 없을 테니까.”
“성벽…….”
올란트가 주억거렸다. 덴스는 차를 마신 후 슬쩍 말했다.
“뒤에 감춘 거 언제 내놓을 거야? 술이면 얼른 내놔 봐. 적당히 마시고 자게.”
“술은 아니에요.”
“그럼?”
“선배의 말을 빌리자면, 성벽 쌓기에 보탬이 될 만한 거?”
올란트가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
이전에도 종종 봤던 노트다. 올란트가 수시로 들고 다녔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선배한테 먼저 보여주고 싶었어요. 의견도 듣고 싶고.”
“또 뭔가를 발견해낸 모양이구나.”
거병의 에너지 효율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킨 회로 간소화. 그것만으로도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데 또 다른 걸 개발해낸 건가?
“이번에도 보자마자 이해할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저번에는 제 의도와 상관없이 번뜩였는데, 이번 건 꽤 오랫동안 고민해 왔어요.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선배가 봐줬으면 해요.”
“내가 볼 필요가 있을까?”
희미하게 남아 있는 질투심이란 녀석이 고개를 들었지만, 이내 코웃음으로 날려버렸다.
눈앞에 있는 후배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이해의 범주 바깥에 있는 인간.
비교하여 질시한다는 개념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선망하고 나아가 경외하면 될…… 선지자인 것이다.
기대감에 부풀어 노트를 펼쳤다.
안에는 간단한 개요와 함께 여러 아이디어가 적혀 있었다.
개중에는 터무니없는 것들도 있지만, 몇몇 개는 당장 구현 가능한 것들도 있었다.
ⓚ②②
덴스는 침묵한 채 페이지를 넘겼다.
경이롭다. 한 인간이 구상해 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오토마타뿐만 아니라 탈로스 쪽도 건드리고 있었다.
거병의 정신과 육체.
둘 다 아우르는 방대한 지식이다.
접근법 또한 새로운 것이 많아 학자들 사이에 던져주면 아주 볼만할 것이다.
덴스는 노트를 덮었다.
“어때요?”
“솔직히 말하면 반도 이해 못 했다. 네 의도는 보이지만 목표에 접근하기 위한 수단을 이해하기 어려워.”
“선배라면 금방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냥 날 죽여라. 여기 안에 있는 걸 전부 이해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들지, 상상도 안 돼.”
“그럼에도 같이 고민해주실 거죠?”
덴스는 짙게 웃으며 노트를 넘겼다.
“당연한 걸 묻지 마. 여기에 인생을 걸지 않은 공학도 따윈 없어.”
마법공학의 세계가 바뀔 것이다.
마법공학의 정수인 거병뿐만 아니라, 마법공학이 적용된 모든 시스템에 변혁이 예고됐다.
성도에 도착해 자리를 잡게 되면 사람을 모을 것이다. 올란트를 위한 백업 팀을.
“고맙다.”
“갑자기 왜 그래요.”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사니까 그냥 받아.”
진심으로 감사했다. 이런 사람과 동시대에 살 수 있어서.
아마 몇 년 후면 마법공학의 최고권위자로 올란트의 이름이 언급될 것이다.
이건 확정시된 사실이다.
이 노트 한 권이 많은 걸 바꾸어 놓으리라.
“선배!”
강렬한 외침에 덴스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 멀리,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하얀색 팔이 내려왔다. 거대한 팔들이 지면을 쿵쿵 찍을 때마다 진동이 격납고를 흔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저 기괴한 팔들은 어디서 나타난 것인가?
어젯밤만 해도, 올란트와 대화할 때만 해도 저런 건 하늘에 없었다.
그뿐인가?
푸르러야 할 하늘이 점차 붉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덴스는 모노클로 하얀색 팔들을 살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응축된 마나였다.
터지면 주변 일대를 소멸시켜 버릴 것이다.
지진이 심해졌다.
덴스가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을 때였다. 격납고 전면부가 열리며 거병이 걸어 나왔다.
“필렌 경!”
덴스가 외쳤다.
-상황 좀 보고 올게.
“여기 국경입니다! 식별표도 없는 거병이 돌아다니면 연합왕국 쪽과…….”
-이미 연합왕국에서도 거병을 기동시켰어. 그러니 국가 분쟁은 염려 마. 그보다, 저 흰색 팔. 저게 뭔지 가까이서 확인해 봐야겠어.
땅이 흔들린다. 심상치 않은 지진이었다. 올란트는 연구실 쪽을 바라봤다. 정리를 끝마친 연구 자료가 아직 안에 있었다.
덴스는 거병을 올려다봤다.
말린다고 해서 얌전히 말을 들을 위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조심하세요!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복귀하시고요! 모노클로 확인했습니다. 저 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에요!”
-그러니 더더욱 확인해봐야 해. 저게 제국 쪽으로 온다면…….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높이 300m는 될 법한 팔. 굵기는 어지간한 저택을 가볍게 뛰어넘는 거 같다.
숫자는 일곱, 아니, 점차 늘어나는 것 같았다.
저런 게 밀고 들어온다면 대체 누가 막을 수 있을까?
-그리고 덴스. 틀린 게 하나 있어.
“예?”
-저기, 사람이 있어. 저 팔을 만들어낸 건 분명 사람이야.
사람이라니?
저 창공에, 거대한 팔 끝부분에 사람이 있다는 건가?
-대피 준비하고 있어. 나도 확인 후 바로 돌아올 테니까.
거병이 기민한 동작으로 숲을 빠져나간다.
덴스는 서둘러 연구실로 향했다. 남은 연구원들이 자료를 밖으로 옮기고 있었다.
“중요 자료부터 우선적으로 옮기고 붕괴 조짐이 있으면…….”
연구원들에게 말을 걸 때였다.
상자를 들고 움직이던 연구원 하나가 비틀거리더니 픽 쓰러졌다.
발을 헛디딘 건 아니었다. 정신이 한순간 사라진 것처럼 맥없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놀란 덴스가 연구원에게 다가갔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반쯤 벌어진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펠린, 펠린!”
쓰러진 연구원의 뺨을 때리며 깨워보려 할 때였다.
지켜보던 연구원들이 차례차례 쓰러졌다.
무슨 일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덴스는 모노클을 꼈다. 자연 상태에선 희미하게 감지되어야 할 마나가 연구실 안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모노클 유리가 검게 물들었다. 기능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쓰러진 사람들을 빨리 바깥으로 옮겨!”
스무 명 정도가 연구실 안에 있었는데, 그중 절반이 정신을 잃었다.
아니, 외치는 순간에 한 명 더 쓰러졌다.
건물 안에서 연구원들을 끌어낼 때였다.
격납고 바로 옆 땅이 붕괴해 버렸다. 직경 10m는 될 법한 원 안으로 수목이 사라져 버렸다.
정말 한순간이었다.
식은땀이 쭉 났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아악, 비명이 들려왔다. 숙소 앞쪽이 갈라지며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
조금 전까지 그곳에 서 있던 지원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선배.”
멍하니 균열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올란트가 다가와 어깨를 잡았다.
잡아끄는 손길에 따라 몸을 돌렸다.
“…우리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토벽.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게 솟은 벽이 저 앞에 있었다.
언제 생긴 건지 가늠조차 되질 않았다. 땅은 무참히 꺼져 사라지고 존재치 않던 벽이 눈 한번 깜짝한 사이 생겨났다.
지진이 점점 심해진다. 융기와 침강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일어나 주변 지형을 바꿔 나갔다.
세상의 마지막을 목도한 기분이었다.
“올란트.”
“네.”
“넌 밖에서 사람들 통제해. 정신을 잃은 연구원을 한곳에 모으고.”
“선배는요?”
“난… 안쪽에 들어갔다가 올게.”
진동이 주변 일대를 강타했다.
격납고 전면부가 휘었다. 철로 된 출입구가 볼품없이 우그러졌다.
연구동 역시 상황이 좋지 못했다. 문틀이 내려앉아 문조차 닫히지 않고 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한 걸음 뗄 때였다.
“선배, 위험해요.”
“안이나 밖이나 위험한 건 똑같아. 내가 안에 들어가서 쓰러진 애들 더 있나 확인할게. 그리고, 밖으로 못 빼낸 것들도 마저 가져오고.”
조약돌에 관한 데이터 박스가 아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른 걸 포기하더라도 그건 챙겨야 했다.
“제가 갈게요.”
나서려는 올란트를 붙잡았다.
“책임자는 나야. 이런 일은 책임자가 해야 하는 거고.”
“그러면 저도 같이….”
“나 다음은 너야. 우리 둘 다 죽으면 통솔을 누가 해? 너도 잘 알잖아.”
올란트의 손을 떼어내고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쓰러진 연구원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대피는 끝난 건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안으로 들어갔다.
엉망이 된 자료실 안쪽에서 데이터 박스를 발견했다. 부피가 상당하다. 원래 이렇게 컸었나?
안간힘을 쓰며 박스를 들어 올릴 때였다. 불쑥 나타난 손이 박스 한쪽을 들어줬다.
“너….”
덴스는 올란트를 바라봤다.
“저도 꼭 챙겨야 할 게 있어서요.”
그렇게 말하며 어제 보여준 노트를 박스에 올려둔다.
그래, 저건 절대 놓고 갈 수 없지.
“최대한 빠르게 나가자.”
발맞춰 복도를 나설 때였다.
쿵, 소리가 귀를 때렸다. 불길한 예감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복도 바닥이 깨져 나갔다.
“올란트! 뛰어!”
앞으로 달려 나가려 했으나 박스의 균형이 한순간 무너져 그러지 못했다.
반대편에서 박스를 들어줘야 할 올란트의 모습이 안 보였다.
덴스는 뒤쪽을 돌아봤다.
균열 밑으로 몸이 빨려 들어간 올란트가 보였다. 다행히 두 손으로 땅을 붙들고 있었다.
구해야 한다.
박스를 내려놓고 올란트를 향해 뛸 때였다.
왜였을까.
왜 하필 그게 보였을까.
올란트와 조금 떨어진 곳, 갈색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세상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올란트의 목소리도, 균열로 인해 생긴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온 신경이 그 노트에 밀집됐다.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오랫동안 무시하고 웃어 넘겨왔던 그 목소리다. 질투와 탐욕, 그리고 명예.
저것만 있으면 너 역시 될 수 있어.
찰나였다.
잠깐 멈춰 서서 호흡 두어 번 내뱉을 정도다.
노트를 보며 끔찍한 상상과 희열에 잠겼지만, 금방 떨쳐내고 올란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올란트?”
턱이 사정없이 떨렸다.
목 안쪽이 시큼해지면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균열 끝자락에서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후배의 손이 진동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덴스는 비틀거리며 갈라진 틈으로 걸어갔다. 짙은 어둠만이 눈앞에 있다.
벌어진 입을 통해 토사물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내가 대체 무슨 짓을…….
“교수님!”
달려온 연구원이 몸을 붙잡았다.
“교수님, 뭐 하세요! 나가야 해요!”
“안 돼, 안 돼. 저 밑에 올란트가, 올란트가…….”
“늦었어요, 늦었다고! 치프는 죽었어요! 정신 차리세요, 제발!”
이끌려 뒤로 물러날 때였다. 덴스 눈에 다시금 노트가 들어왔다.
“벨, 이 박스 좀 들고 나가.”
“예?”
“어서!”
연구원을 먼저 내보낸 뒤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집었다. 그리고 품 안에 넣었다.
“미안해, 미안해.”
덴스는 갈라진 틈을 향해 작게 말하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