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7화
“네? 야근이요?”
농담치고는 대령의 얼굴이 너무나도 진지하다.
진동이 더 심해진다. 분주히 움직이던 캐비닛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브라인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캐비닛들이 쿵쿵거리며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마치 벽을 쌓는 것처럼.
“대령님?”
“관망. 그래, 난 지켜봐야 하는 처지야. 바라라의 딸은 그래야 하고.”
대령이 고개를 살며시 내렸다.
“하지만…… 이번 한 번은 의무를 잠시 잊을래. 내 딸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드드드드, 사방이 요란하게 떨렸다.
현실과 격리된 심상세계가 무참히 흔들릴 정도면, 바깥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두려웠다. 목구멍 안쪽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셀베이아는 침을 삼키는 것으로 짓누르는 긴장감을 살짝 덜어냈다.
“바깥사람들은요?”
“다 구할 순 없어. 그건 오만한 짓이니까.”
“하지만…….”
입을 벙긋거릴 때였다.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수면욕에 눈이 서서히 감겼다.
“자고 일어나면 끝나 있을 거야. 물론 많은 게 바뀌어 있겠지.”
“…대령님.”
“내가 이해 안 될 수도 있겠지. 어쩌면 원망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난, 내 딸이 살아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니까. 바뀐 세상에서라도 네가 살아갈 수 있다면…….”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셀베이아가 의식을 놓기 전, 브라인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아요, 어머니. 의무를 저버린 대가가 무엇인지. 그래도 괜찮아요. 한 번 정도는 일탈해도 좋잖아요? 그런 게 인생일 테고.”
이마를 덮는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셀베이아는 깊은 잠에 빠졌다.
* * *
“정말 들어가도 되는 거지?”
제니가 몇 번이고 되물었다.
가하란은 웃음 지으며 요정의 안뜰 문을 가리켰다.
“밀리언 아저씨한테 다 허락받았어. 그러니까 괜찮아.”
“진짜지?”
“안 믿기면 어쩔 수 없지. 나 혼자 들어갈게.”
먼저 한 걸음을 떼자마자.
“아니야! 나 믿어. 가하란이 하는 말 다 믿어.”
제니가 부랴부랴 따라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네일라가 반겨주었다.
“왔어?”
“네. 아저씨 안에 계신가요?”
“조금 전에 오셔서 너희들 기다리고 계셔. 이쪽 작은 아가씨는 날 기억하려나? 저번에 우리 가게 왔을 때 봤는데.”
“기억해요! 네일라 언니.”
제니가 활기차게 대답했다.
“언니라고 불러주는 거야? 너 마음에 쏙 든다.”
얼른 안에 들어가 보라며 등을 미는 네일라였다. 가하란은 제니와 함께 조리실로 향했다.
“아저씨.”
“왔구나.”
하얀 조리복은 언제 봐도 멋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제니가 부끄럼을 타며 말했다. 밀리언이 멀뚱히 바라보다가 주섬주섬 사탕 하나를 꺼냈다.
“저번에 준 거랑은 맛이 다를 거다.”
사탕 하나에 활짝 웃으며 다가서는 제니였다.
“가하란한테 얘기는 들었다. 아침에 먹을 빵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네! 테리 오빠가 맨날 절 무시하거든요. 넌 여관 주방에 절대 못 들어올 거라고. 자기만 잘난 줄 알아요.”
가하란은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그렇구나. 그러면 이번에 제대로 배워서 네 오빠한테 한 방 먹여줘라.”
“네!”
손을 씻고 조리복을 챙겨 입었다.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니가 말했다.
“부럽다. 이름도 박혀 있어.”
“멋지지?”
“응. 나도 입어보면 안 돼?”
“잠깐만. 한번 물어볼게.”
선물받은 조리복이지만 마음대로 빌려줘도 되는 건지, 일단 물어봐야 했다.
밀리언에게 허락을 구했다.
“상관없다. 조리복을 입는 건 청결을 위해서니까.”
가하란은 제니에게 조리복을 넘겨주었다. 조금 크지만, 소매를 접으니 얼추 맞았다.
“일단 손을 씻고.”
조리실 안에서 무얼 하면 안 되는지 설명하려 할 때였다.
쌓아놓은 접시가 잘게 떨렸다. 카랑카랑한 소리를 내는 식기들을 바라볼 때였다.
“둘 다 이쪽으로 와라.”
밀리언이 선반에서 멀어지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서려 할 때였다.
쿵, 소리와 함께 발밑이 흔들렸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심한 진동이었다.
“제니!”
가하란은 기우뚱거리는 제니를 붙잡았다. 바로 옆에 끓고 있는 커다란 냄비가 있었다.
제니를 붙든 것까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냄비였다. 화구 위에 매달려 있던 냄비가 기우뚱하더니 이쪽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위험하다.
가하란은 제니를 끌어당긴 다음 몸을 돌렸다.
치이익, 아찔한 소리가 귀를 찔렀다. 하지만 뜨겁지 않았다. 뒤돌아보니 밀리언이 젖은 행주로 냄비를 받치고 있었다.
“둘 다 괜찮냐?”
“전 괜찮아요. 제니 넌?”
품에 안긴 제니를 봤다. 울먹이고 있지만 꾹 참고 고개를 끄덕인다.
“다행…….”
밀리언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화구가 있던 자리가 푹 꺼진 것이다.
“아저씨!”
밀리언의 몸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땅 밑으로 반쯤 빨려 들어간 밀리언이 왼발로 무너져 내리는 지면을 찼다.
평소의 느긋한 움직임과는 전혀 다른, 놀라울 정도로 빠른 대처였다.
“둘 다 밖으로 나가!”
밀리언이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조리실 천장이 무너지고 바닥도 재차 내려앉았다.
“아저씨!”
돌 더미 건너편을 향해 소리 질렀다. 밀리언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난 괜찮으니까 너희들은 빨리 바깥으로 나가!”
“알겠어요! 아저씨도 조심하세요!”
가하란은 제니를 데리고 조리실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게 뭐야.”
잘 정돈된 테이블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갈라진 틈만 보였다. 바도 반으로 쪼개졌고, 술병들은 바닥에 떨어져 다 깨져 있었다.
“얘들아!”
엉망이 된 가게 저편에서 네일라가 소리치고 있었다. 가하란은 빠르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오른쪽 구석.
발 디딜 만한 공간이 있었다. 저쪽으로 가면 입구로 나갈 수 있다.
“가, 가하란.”
제니가 떨면서 말했다.
“괜찮아. 우리 그거 자주 했잖아. 땅에 생긴 실선만 밟고 가야 하는 놀이. 그거라고 생각해.”
폭 3m는 될 법한 균열이 눈앞에 있다. 지진이 심해지면 더 벌어질 것이다.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네일라가 균열 가까이 다가왔다.
“저희가 그쪽으로 갈게요!”
제니의 손을 잡고 벽을 따라 움직였다. 지진이 멈춘 지금이 기회였다.
벽에 바짝 붙어 균열을 잇는 유일한 길목에 올라섰다.
“밑에 보지 마. 알겠지?”
가하란은 균열 사이를 보며 말했다. 끝없는 어둠만 있었다. 아니, 희한한 보랏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저 땅 밑에 있는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제니와 함께 무사히 건물 밖으로 나가야 한다.
가하란이 먼저 움직였다.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바닥은 흔들림 없었다. 아직 괜찮아, 갈 수 있어.
“가하란.”
“괜찮아, 괜찮아. 다 왔어. 보이지?”
“으, 응. 다 왔네. 정말로.”
네일라가 코앞이었다. 이제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면…….
쿠쿠궁, 발밑이 심하게 떨렸다.
땅이 출렁거리고 균열이 더 벌어졌다.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던 가게 바닥도 파삭 무너져 내렸다.
가하란은 고개를 돌렸다.
입을 꾹 다물고 똑바로 쳐다보는 제니가 있었다. 울음이 많은 애지만, 이럴 때는 울지 않는다.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가하란은 제니의 손을 잡고 크게 뛰었다. 몸이 앞으로 나아간다.
으아악,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발끝에 힘을 줬다. 균열 끝자락에 발이 닿았다.
제니를 붙든 손에 힘을 줬다.
버텨야 한다. 몸이 뒤로 기우뚱거릴 때, 네일라가 몸을 잡아줬다.
“하아, 하아, 하아.”
뒤따라온 제니도 무사히 바닥에 발을 붙였다.
“잘했어, 잘했어!”
네일라가 끌어안으며 외쳤다.
“일단 나가자.”
제니의 손을 붙잡은 네일라가 몸을 돌릴 때였다.
어, 가하란은 발밑이 허전해지는 걸 느꼈다. 소리도 없이 땅이 사라졌다.
밑으로 어둠만 보인다.
비명이 입 안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내뱉지 않았다. 지금 외쳐버리면 네일라가, 제니가 달려올 것이다.
그러면 위험하다.
다 죽을지도 모른다.
두려움에 몸이 바짝 얼었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살려달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낭떠러지가 눈앞에 보인다.
몸이 덧없는 추락을 시작했다.
어떻게 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격한 반동과 함께 몸이 붙들렸다.
“아, 아저씨.”
밀리언이었다. 왼손을 벽에 박아 넣은 채 버티고 있었다. 피가 흐르는 게 보인다.
“가하란. 두려워 말고 올라가라. 밑에서 받쳐줄 테니.”
여기서 허우적거리면 둘 다 위험할 것이다. 재빨리 벽을 훑었다. 듬성듬성 잡을 수 있는 돌이 있었다.
붙잡고 위로 올라갔다. 밑에서 아저씨의 오른팔이 밀어주고 있어서 올라가는 건 쉬웠다.
올라가자마자 보인 건, 완전히 무너져버린 가게였다. 입구도 보이지 않았다.
뒤따라 밀리언이 올라왔다. 아저씨는 분명 특별한 군인이었을 것이다.
“막혔구나.”
주변을 둘러보며 밀리언이 말했다. 지진이 또 일어난다면 이젠 피할 길도 없었다.
가하란은 밀리언의 왼손을 바라봤다. 살갗이 죄다 벗겨져 피가 나고 있었다.
“별거 아니다.”
가하란은 상의를 벗어 밀리언의 손을 감싸주었다.
“아저씨. 여기서 어떻게 나가죠?”
“바깥에서 도와줄 거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두꺼운 오른손이 머리 위에 올랐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이질감이 느껴졌다. 뭔가 이상했다.
밀리언 또한 느꼈는지 희미하게 빛이 새어 들어오는 곳을 바라봤다.
“너무 조용한데.”
“맞아요. 너무 조용해요.”
이 정도로 큰 지진이 났다. 당연히 난리가 났을 것이다. 소란스러워야 정상인데, 놀라울 정도로 조용하다.
숨을 잠시 참고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였다.
“가하란! 가하란!”
제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무너진 천장을 향해 소리쳤다. 제니야, 여기야!
“거기 있어? 거기 있는 거야?”
“어. 아저씨랑 같이 있어. 우린 괜찮으니까 빨리 다른 어른들 좀 불러줄래?”
“그게, 그게…….”
제니의 숨소리가 가빠졌다. 울음을 잊을 정도로 당황한 것 같았다.
“무슨 일이야!”
“어른들이 다 쓰러졌어.”
“뭐?”
“하늘이 붉게 변했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가하란, 너무 무서워. 다들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아. 잠깐만!”
제니가 다급하게 외쳤다.
“땅에서 붉은 실 같은 게 올라오고 있어! 사람들을…… 사람들을…….”
“제니?”
제니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하늘이 붉게 변했다?
땅에서 붉은 실 같은 게 나왔다?
무엇 하나 이해되는 게 없었다.
그때였다. 밀리언이 고개를 트는 게 보였다. 그 순간, 균열 저 밑 어둠 속에서 붉은 것이 튀어나왔다.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속도였다.
땅을 뚫고 튀어나온 그것은 천장을 날려버렸다. 아니 녹여버렸다.
머리 위에 쌓여 있던 건물 자재가 사라졌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건.
“…이게 뭐야.”
새빨간 하늘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