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6화
셀베이아는 읽던 책을 덮고 브라인을 바라봤다.
한숨, 또 한숨.
오늘만 몇 번째 한숨인지 알 수 없었다.
“대령님.”
“응?”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눈에 훤히 보이는 거짓말이다. 셀베이아는 의자를 들고 대령 곁에 가서 앉았다.
“아침은 제대로 드셨고.”
“먹었지.”
“점심도 맛있게 드셨잖아요.”
“맛있었지.”
“근데 왜 그러세요?”
브라인이 눈을 얇게 뜨며 바라본다.
“네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이제 좀 알겠다. 먹고 자기만 하는 한심한 존재, 맞지?”
“그렇게까진 말 안 했어요.”
“어느 정도 맞나 보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랬어.”
투덜대며 눈을 감는 브라인이었다. 셀베이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의자에 두고 대령 뒤로 걸어갔다.
“정말 무슨 일이에요?”
축 늘어진 대령의 귀를 살짝 들어 올려 주물럭거렸다.
“아무 일 없어.”
“아닌 것 같은데요.”
빳빳한 털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두피를 꾹꾹 누르며 대령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코가 씰룩거리고 있다. 반짝이는 긴 수염도 잘게 떨리고 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
“제가 알면 안 되는 일인가요?”
“글쎄. 알아봤자 달라질 게 없으니 알아도 큰 문제는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말할 수는 없는… 그런 시시한 일이야.”
시시한 일.
그 말이 왜 이렇게 가슴을 파고드는 걸까.
“제가 도움이 될 순 없나요?”
“도움이라.”
대령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천 년 된 딸기가 먹고 싶어.”
“…천 년이면 썩어서 형태도 안 남았을 거예요.”
“그러면 어쩔 수 없네.”
“계속 심술부리실 거예요?”
털을 살짝 잡아서 위로 잡아당겼다. 브라인이 아야, 하며 째려본다.
“대령님 이러는 거 처음 봐요.”
“이러는 걸 처음 본다라. 그렇겠네, 네 관점에서는 처음일지도 몰라.”
브라인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갈까?”
“안 돼요. 1시간 뒤에 예약 손님 있어요. 수석부관도 찾아올 거고요.”
“필요 없어.”
“네?”
“필요 없다고. 내가 업무 협약을 맺고 인간족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건 어디까지나 자료 수집을 위해서야. 앉아 있어도 자료가 굴러 들어오니 편하지. 하지만 그 협약이 날 옭아맬 수는 없어. 파기하면 그만이니까.”
“일방적인 통보는 대령님답지 않아요.”
대령이 가까이 다가왔다. 한없이 부드럽기만 하던 붉은 눈동자가, 오늘은 맹수의 그것처럼 예리하다.
“바라라의 딸인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네가 보고 이해한 나는 전체의 몇 퍼센트일까?”
온기가 없다. 삭막하며 잔인하다.
감정을 모른다는 듯이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여 셀베이아의 전신을 훑는다.
솔직히 무서웠다.
사자 주둥이에 머리를 집어넣어도 이보다는 덜 꺼림칙하리라.
하지만.
셀베이아는 눈에 힘을 주고 대령을 바라봤다. 늘어트린 손을 앞으로 내밀어 경직된 대령의 얼굴을 살며시 만졌다.
“대령님.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죠?”
번뜩이던 붉은 눈동자가 눈꺼풀 뒤로 숨었다. 다시 드러난 눈동자는 전처럼 따스했다.
“두려운 건 아니야. 그저 아쉬울 뿐이지. 그래, 지독하게 아쉬울 뿐이야.”
그때였다.
굳게 닫힌 기록보관서 문이 비틀리며 열렸다.
물이 밀려든다.
드넓은 기록보관서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거센 물결이다.
캐비닛들이 파도에 휩쓸려 밀려난다.
셀베이아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금방이라도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갈 줄 알았는데, 사방이 조용해졌다.
슬그머니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건 자그마한 거북이었다.
“산페르 님, 언제나 거침없으시네요. 문을 열어달라 하면 열어드렸을 텐데.”
브라인이 말했다.
산페르.
이전에 브라인이 언급했던 이름이다. 이 작은 거북이 ‘징조’란 말인가?
“나가 있을게요.”
일개 접수원이 알아선 안 될 거대 담론이 오고 갈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한발 빠르게 기록보관서를 나서려 했다.
“아니, 괜찮아. 여기 있어도 돼.”
브라인이 말했다.
“네?”
어리둥절했다. 남아 있어도 된다니.
대령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하늘을 나는 거북이 천천히 움직여 책상에 내려앉았다.
-너라면 어느 정도 파악했겠지?
“아니요. 이번만큼은 무엇 하나 알아낸 게 없어요. 성도에 있는 먼 친척을 통해서 길리우드란 놈이 제국은 물론 연합왕국까지 휘저어 놨다는 걸 들었지만.”
-개요는 알아놨네.
대령이 직접 차를 타 거북 앞에 내려놓았다. 찻잔에 담긴 물이 둥실 떠오르더니 가느다란 줄기로 변해 거북의 입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
“오크족 주술사가 말하길, 미래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안 보인다고 했죠. 이 모든 게 연관이 있는 거겠죠?”
-그렇겠지. 주술사 꼬마도 바삐 움직이고 있어. 나를 비롯한 모든 종을 다 찾아다니며 도움을 구하고 있고.
“그래서 손을 빌려주실 건가요?”
-층의 문제는 층에 속한 자들이 해결해야지.
“뿌리가 대지를 휘저으면 안원에도 문제가 생길 텐데요.”
뿌리.
셀베이아는 인지를 초월한 두 존재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새겨들었다.
-그렇게 되길 바라는 놈들이 훨씬 많아. 너도 알잖아? 안원에서 썩고 있는 놈들이 무얼 기대 중인지.
“자극을 원하겠죠. 새로운 사건만큼 즐거운 것도 없으니. 산테 님은 어떠신가요?”
-틈새를 신경 쓰느라 여전히 바쁘지. 여전히 재수 없고.
“그만 사이좋게 지내시죠.”
거북 앞에 놓인 찻잔이 붕 떠올라 대령에게 날아갔다. 대령이 손가락을 까딱거려 찻잔을 선반 위로 보내버렸다.
“조합은 조합대로 할 일이 많으니 그렇다 치고, 산페르 님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일단은 지켜볼 생각이야. 공멸이 예정된 수순이라면 저항할 필요는 없지. 추수가 끝난 밭을 불태우는 건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니까.
“불을 놓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나요? 그리고 애먼 땅에 불을 지르는 거라면…….”
-그렇게 말하는 넌 뭘 준비 중인데? 바라라의 딸이 개입할 생각이야?
“아픈 곳을 찌르시네요.”
셀베이아는 대령의 시선을 받았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눈빛이었다.
“근데 어딜 다녀오신 건가요? 가하란 곁을 꽤 오랫동안 떠나신 거 같은데.”
-내가 본 희한한 인간족을 알아보기 위해 계속 움직였어.
“허스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하시더니.”
-눈에 밟혀서 말이야. 그런 게 존재한다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너도 그 인간족을 잘 안다고 했지?
복귀한 총수의 이름이 산페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너무나도 의외였다.
초월자들이 공멸을 논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평범한 인간이 튀어나오다니.
물론 총수가 위대한 영웅이라는 건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 시선에서 바라봤을 때였다.
셀베이아는 의문을 품은 채 둘의 얘기를 마저 들었다.
“알고 있죠. 인간족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마나를 잘 다루는 아이였으니까요. 하지만 능력이 좀 뛰어날 뿐, 특별하지는 않아요. 산페르 님께서 관심을 보일 정도는…….”
-이거였어.
“네?”
-내가 본 그 인간족 아이는 섭리에서 벗어난 힘을 지니고 있었어. 아니, 그건 힘이라기 보단 의지에 가까웠지.
“그럴 리가요. 제가 본 허스는 그렇지 않았어요. 도시 하나 정도는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겠죠. 수뇌부를 처리한다면 나라 하나도 멸망으로 이끌 수 있고요. 하지만 산페르 님이 놀랄 정도는 아니에요.”
도시 하나를 지워버리는 게 놀랍지 않다니. 셀베이아는 이해하길 포기한 채 말을 들었다.
-바로 그거야. 그 아이한테 생긴 변화가 심상치 않아. 그 아이를 중심으로, 아니, 그 아이와 관련된 무언가를 중심으로 사건이 변하고 있어.
브라인이 팔짱을 꼈다.
“섭리에서 벗어났다는 건 어느 정도의 힘이죠? 가늠이 잘 안 되는데.”
-내 근본에 각인된 이름을 지워낼 수 있을 정도.
“…농담이시죠?”
-어떨 거 같아?
“믿을 수 없어요. 가장 오래된 형태인 당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힘이라니. 그건……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상태잖아요.”
-싸운다는 개념을 잊은 지 오래지만, 만약 싸우게 된다면 서로 깔끔하게 소멸하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나쁘지 않네. 타의에 의해 사라진다는 선택지가 생긴 거니까.
“끔찍한 소리 마시죠.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말하기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터는 대령이었다.
-아무튼 재미난 일이 벌어지고 있어. 안원에서 썩어가고 있는 놈들도 다들 관심을 보이고 있고. 어쩌면 피안에서도 눈독을 들일지 몰라.
“아주 그냥 전쟁을 하라고 하죠. 그게 속 편하겠네요.”
-그렇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적은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올 수도 있어.
“외부요?”
-‘층’이 아닌 ‘계’. 나도 완벽하게 이해한 건 아니야. 우리가 감각하지 못한 실체가 있다, 이 정도면 알아냈으니까.
“계?”
-한번 알아봐. 인간사 쪽을 캐내는 건 나보다 잘할 테니. 하여간 재미난 종족이야. 인간의 비대한 의지가 세상을 바꾸려 하고 있어. 시도에서 끝날지, 아니면 오크족 꼬마가 본 대로 미지의 무엇이 전개될지.
기다려봐. 그게 우리 일이잖아?
그 말을 끝으로 거북이 사라졌다.
셀베이아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옆에서 말을 들었을 뿐인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심상세계에서 위대한 존재와 계속 마주하는 건 힘든 일이지. 그래도 잘 버텼어.”
대령이 다가왔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말고 편히 쉬라며, 다리를 내어주었다.
푹신한 대령의 다리를 베개 삼아 누웠다.
“다 이해한 건 아니지만, 확실해진 게 하나 있어요.”
“뭔데?”
“대령님. 요정의 안뜰에서 매년 1월에 신년 케이크 만들잖아요?”
“절대 놓칠 수 없는 케이크지.”
“내년에도 그 케이크를 맛볼 수 있는 건가요?”
“…어렵지 않을까?”
“역시나.”
절대자들은 가볍게 얘기했으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인간 사회가 붕괴할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큰 재앙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관망하실 건가요?”
“그게 내 일이야.”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셀베이아는 옅게 웃으면서 대령의 눈을 보았다.
“만약 제가 죽게 되면 뼛가루를 바다에 뿌려 주시겠어요? 아직 한 번도 못 봤거든요, 바다를.”
“귀찮은데.”
“그러면 어쩔 수 없죠.”
곧 죽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섭긴 하다. 하지만 두려움에 짓눌려 아무것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대령이 거두어준 목숨이었다. 대령이 아니었으면 길바닥에서 끝날 명줄이었다.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면, 하루 전날 말씀해 주세요.”
“왜?”
“맛있는 저녁을 준비해 드릴게요.”
“네 요리는 맛이 없는데.”
“그래도 그냥 드세요. 마지막이니까.”
그때였다.
바닥이 잘게 흔들렸다.
이곳은 대령님의 심상세계. 멋대로 흔들리는 게 용납되지 않는 세상이다.
또다시 산페르가 찾아온 걸까?
고개를 살짝 들어 브라인의 얼굴을 보았다.
“셀베이아.”
무서울 정도로 침착한 대령의 얼굴이 보인다.
“오늘은 야근하는 게 좋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