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25화 (198/558)

제225화

뿌리가 지상으로 올라온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마나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자라면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밀레나는 부정부터 했다.

“그럴 리 없어. 뿌리는 움직이지 않아야 하잖아.”

하늘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릴 리 없다. 태양과 달이 어느 날 갑자기 지상으로 추락할 리 없다.

물에서 살던 물고기가 수면 위로 올라와 달릴 리 없고, 창공의 주인인 새가 바닷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헤엄칠 리 없다.

고정불변한 것들.

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뿌리는 저 깊숙한 곳에서 움트고 있어야지, 지상으로 올라와서는 안 된다.

“정보의 출처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낙스 님까지 공증을 섰어.”

미엔이 말했다.

아낙스라는 이름에 얼마 전 봤던 풍경이 떠오른다. 황제의 임시 거처로 모여들던 마법사들.

그날 황제의 임시 거처에서 논의한 게 이거였나?

“마나를 깨우치거나 어느 정도 배운 사람들은 뿌리가 올라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아. 하지만 일반 시민들은 그게 뭘 뜻하는지 모를 테지. 그래서 상세한 내용을 알리기보다 일단 대피령부터 띄운 거고.”

밀레나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삶의 질을 전반적으로 향상시켜 준 고마운 힘이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돌변할 것이다.

“7구역을 대피 구역으로 지정한 건?”

“마나 밀도가 그나마 낮다고 해. 성도 바깥으로 나가는 게 권고 사항이지만, 그 또한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니 윗분들도 머리가 아플 거야.”

눈을 살짝 찌푸리며 되물었다.

“성도 바깥으로 대피? 설마 전 대륙에 피해가 갈 거라고 예상하는 건…….”

“거기까진 나도 모르겠어. 한정된 지역에 뿌리가 튀어나오는 건지, 아니면 대륙 밑에 있는 뿌리 전체가 돌출되는 건지.”

후자면 어딜 가든 지옥이겠지, 미엔이 씁쓸한 어투로 말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지진도 전조였던 거야?”

“그렇게 보는 것 같더라.”

“대체 왜 이런 일이…….”

“천재지변을 누가 예측하겠어. 눈앞에 닥쳤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거지. 아, 끝장났구나.”

항상 능글맞게 웃으며 긍정적인 말만 하던 미엔조차 오늘은 비관 덩어리가 됐다.

“다른 애들은?”

“스콜라에 있는 동기들 근황은 모르겠고, 로운하고 율, 이리엘데는 가문 쪽 어른들과 따로 얘기 중일 거야. 브리테는… 시의회 관련자들 틈바구니에 섞여 있지 않을까?”

투레질하는 말을 힐긋 본 다음 물었다.

“넌 어디 가는 길인데?”

“의회 최고 어른들께서 자리를 만들었어. 나도 가서 얼굴을 비쳐야 해. 말석에 앉아 입 꾹 다물고 있어야 하지만, 그거라도 해야지. 이제 우리도 애는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밀레나를 위아래로 훑는 미엔이었다.

“왜?”

“아니다. 오늘은 농담할 기분도 안 나네. 밀레나, 넌 어쩔 셈이야?”

“대피령이 내려왔으니 일단 움직여야지. 식솔을 챙겨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가주 대행 노릇 하는 것도 힘들 거다. 정말 큰일이 닥치면 책임감에 짓눌릴지도 모르고.”

“정말 힘들어지면 조언 구하러 갈게. 이런 일은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테니까.”

“……그래. 언제든 찾아와. 엔첸세라면 기껍게 반길 테니까.”

미엔이 말에 올라탔다. 고삐를 잡고 출발하기 직전, 미엔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밀레나.”

“왜?”

“우린 이제 정말로 어른이 되어야 할지도 몰라.”

왠지 모르게 서글픈 얼굴이었다.

떠나는 미엔을 바라보다가 저택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정을 알았으니 대피를 준비해야 했다.

“본가로 돌아갈 사람은 지금 출발해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허락할게요. 이번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이곳은 비워둘 거예요.”

저택 관리인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고용인들의 대표 격인 락샤가 앞으로 나섰다.

“방금 저희끼리 얘기를 나눴어요. 아가씨 곁은 저와 피온이 지키기로 하고, 다른 사람들은 본가로 돌아가기로.”

“고향으로 가도 상관없어요. 휴가라고 생각하고…….”

“저흰 필렌 님께서 모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니 블루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본가로 돌아가 준비하고 있을 게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성도에 대피령이 내려질 정도면 큰주인님께서도 돌아오실 테니.”

밀레나는 고용인들의 얼굴을 살폈다. 다들 불안감을 내비치고 있으나 여전히 엔첸세를 의지하고 있었다.

“좋아요. 게릴이 본가로 가는 사람들을 통솔해줘요. 이동 제한은 없을 테니 서둘러 움직여요.”

“저기, 아가씨.”

가장 어린 폴스가 손을 들었다.

“말해.”

“왜 도망가야 하는 거죠? 이유를 알면 안 되는 건가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고심할 때였다.

“인석아, 뭘 그런 걸 여쭙고 있어. 아가씨께서 판단한 대로 움직이면 돼.”

게릴의 호통에 폴스가 목을 움츠렸다. 밀레나는 게릴을 향해 옅게 웃어 보인 후 말했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시간이 걸려서 그럴 순 없고, 알기 쉽게 말하면…… 막을 수 없는 천재지변이 다가오고 있어. 그래서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대피령이 내려진 거고.”

천재지변이란 말에 고용인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락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성도에만 국한된 문제인가요? 여길 떠나면 안전해지는 건가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전 국토가 위험할 거 같아요.”

“…세상에.”

“본가로 돌아가서 상황을 살피다가 위험이 닥쳐온다 싶으면, 블루아이가 있는 격납고 안으로 들어가요. 보안 장치는 게릴이 풀 수 있죠?”

“예, 아가씨. 큰주인님께서 제게 알려 주셨습니다.”

“좋아요. 격납고 안이라면 그나마 안전할 테니.”

뿌리가 올라와 그 방대한 마나를 방출하면 사실 어디에 있든 안전하지 않다.

그래도 차폐벽이 설치된 격납고 안이 일반 가옥보단 버티기 수월하리라.

“서둘러요. 성도 밖으로 나가려는 시민이 꽤 많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밀레나는 흩어지는 식솔들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아침 해가 귀족 거주지를 훑고 있었다. 어제와 다름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뿌리…….”

마법사들의 착각으로 끝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황제가 대피령까지 내린 걸 보면 확실한 소스가 있는 듯했다.

그날이 오면 이 땅은 어떻게 되는 걸까.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밀레나!”

저 멀리서 율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귀족 거주지 내에서는 절대 뛰는 법이 없었는데.

앞까지 달려온 율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들었어?”

“어. 미엔한테 들었어.”

“그랬구나. 그러면 대강 사정은 알겠네.”

율이 저택 쪽을 바라봤다.

“대피 준비하는 거야?”

“어. 엄마가 안 계시니까 내가 결정해야지.”

“필렌 님은 아직 소식 없으시지?”

“응. 이 소식이 전해지면 본가로 돌아오시겠지만.”

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거리를 바라봤다.

“성도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고,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쩌지?”

“최대한 빨리 소식을 전해야지. 연락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거야.”

“국경지대까지 서둘러도 두 달 가까이 걸리는데, 도중에 이런저런 일까지 겹치면…….”

율이 말끝을 흐렸다.

“뿌리가 언제쯤 올라오는 걸까?”

“글쎄.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정보를 얻어보려 했지만, 풀린 정보가 하나도 없어. 황제 폐하, 의회 최고 어른, 그리고 마법사 클랜의 클랜장들 정도만 정확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아.”

마당발인 율조차 모른다라.

이 사건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제국 내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것이다.

“브릴 말이야…….”

“브릴? 걔가 왜?”

스콜라 동기 중 한 명.

거병 기동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성도로 먼저 떠나간 친구였다.

“소식 못 들었구나. 얼마 전에 브릴의 어머니가 조사를 받았어.”

“조사? 무슨 일인데?”

“내용은 밝혀지지 않은 채 꽤 오랫동안 구금됐는데, 어제 사망 확인서가 발급됐어.”

“뭐?”

갑자기 사망 확인서라니.

“사고사야?”

율이 주변을 훑은 다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한 걸음 다가갔다.

낮은 목소리가 귀를 파고든다.

“이것도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처형당한 거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처형이라니.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은 들은 적 없어. 모두 공개가 원칙이잖아.”

“살아는 계셔. 아니, 이걸 살아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니까.”

“갑자기 왜 그런 거야? 웨스트 가문 정도면 어지간한 문제는 면책이었을 텐데.”

“길리우드.”

의외의 이름이 툭 튀어나왔다.

“길리우드? 그 테러범?”

“나도 어제 알게 됐어. 성도의 주요 인사들이 일시에 조사를 받았고, 그중 길리우드와 연관된 자들한테 전부 사망 확인서가 발급됐어. 휴가를 떠난 거로 알려진 관료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고. 폐하께서 정말 은밀하게 처리하신 거 같아.”

“만들어낸 테러범 아니었어? 정말 존재한다는 거야?”

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가족 회의가 있었어. 곧 공표될 사실이라 미리 알려준다고 하셨는데, 그게 내가 방금 말한 내용이야. 길리우드와 연관된 자들이 많았어. 그것도 권력층에.”

권력층이란 말에 불현듯 떠오르는 이름 하나가 있었다.

가트델.

세나티아 의원과 함께 성도 의회를 양분하던 정치계의 거물.

최고 어른인 그가 얼마 전 원인 모를 병으로 정치계를 떠났다.

손발도 못 움직일 정도의 중환이라 도저히 업무를 볼 수 없다고.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가트델 공이 연관된 건…….”

“거기까진 모르겠어. 하지만 소문은 돌고 있어.”

“소문?”

“‘스토아’ 쪽에서 움직였다는 것과 그 일을 지시한 게 총수님이라는 것.”

“총수께서 직접? 황제 폐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소문. 다른 인사들은 그렇다 쳐도, 가트델 공은 워낙 거물이니까. 진상이 드러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거야. 진실을 말해야 할 당사자께서 그렇게 되셨으니 더더욱 오래 걸리겠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구나.”

“윗선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어.”

“설마 이번 뿌리 사태도…….”

율이 도중에 말을 끊었다.

“뿌리는 아닐 거야. 그건 인간이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니까. 너도 잘 알잖아.”

“알지. 아는데, 성도에서 벌어진 일들이 너무 기괴하잖아.”

“그래도 뿌리만큼은 아니야. 정말로 뿌리가 인위적으로 날뛰는 거라면…….”

율이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대피령이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다 죽게 될 텐데.”

섬뜩한 말이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미엔도 그렇고 율도 그렇고, 며칠 사이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여유는 사라지고 눈빛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정말로 어른이 되어야 할지도 몰라.

미엔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브리테랑 이리엘데하고도 만났으니까, 다 같이 모여서 얘기해보자.”

“알겠어.”

율이 곁으로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밀레나.”

“어.”

“우리 꼭 살아남자.”

“너무 거창해.”

“그냥, 한번 해보고 싶었어. 연극에서 위기 상황을 앞두고 꼭 이러더라고.”

평소처럼 픽 웃는 율이었다. 하지만 눈가는 예전과 달리 찬기가 서려 있었다.

“이따가 다시 봐.”

“그래.”

떠나는 율을 지켜보다가 몸을 돌려 저택으로 들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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