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24화 (197/558)

제224화

“어? 퀼을 아세요?”

엘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그럴 것 같더라고요. 표리영역 안에서도 멀쩡하시고. 역시나 그렇구나.”

뭔가 착각한 거 같지만, 술술 말하고 있으니 일단 내버려 두었다.

“퀼비언도 청소꾼인가요?”

“어떻게 보면 그렇죠. 가장 바삐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근데 퀼하고 친하면 미리 말씀해 주시지. 괜히 긴장했잖아요.”

일인군단, 마도사 퀼비언.

추모길을 걷는 그 위험한 인간을 모르는 자가 있을까?

엘리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고 이해한 것 같지만.

“퀼비언도 이 안에 있나요?”

“그건 모르겠어요. 근방에 있다고는 들었지만 지금 표리영역 자체에 문제가 생겨서 공간이 들쭉날쭉하거든요.”

안 보이는 벽을 더듬던 엘리가 살짝 웃었다.

“틈새 밖으로 나가는 건 안 되지만, 영역 안을 돌아다닐 순 있어요.”

엘리가 앞으로 나아갔다.

민은 손을 내밀어 보았다. 조금 전까지 모든 걸 튕겨내던 벽이 사라졌다.

“일단 이쪽으로 갈까요?”

엘리가 양팔을 휘적휘적 저으며 걸었다. 민은 주변을 경계하며 그 뒤를 따라갔다.

거무죽죽한 하늘과 뒤틀린 나무들. 사방이 지독하게 조용했다.

밤 사냥에 나선 맹금류의 울음도, 벌레들의 구애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벽만 사라졌지 이 표리영역이란 곳에선 벗어나질 못하네요.”

“틈새 밖, ‘현지’로 나가려면 온전한 문을 열어야 해요. 아니면 표리영역을 찢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힘을 주거나.”

엘리가 폴짝 뛰었다. 아래를 보니 나무뿌리가 뱀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민은 눈을 찌푸리며 다가오는 뿌리를 걷어차 버렸다.

“나무가 살아서 움직이는데, 원래 이런 건가요?”

“네. 여긴 원래 이래요. 제멋대로인 곳이죠. 현지와 피안, 그 사이의 틈. 이곳은 현상이 제멋대로 얽혀서 어지러워요.”

민은 엘리 옆에 서며 물었다.

“아까 그랬죠? 도깨비를 피안에서 온 손님이라 부른다고.”

“네.”

“사후 세계를 말하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니에요. 우리가 편의상 피안이라고 부르는 거니까요. 진정한 사후 세계는 저도 몰라요.”

당차게 걸어가던 엘리가 으악,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민은 곧바로 도끼를 들어 올려 반격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 사, 사마귀!”

엘리가 가리킨 곳에 아주 작은 사마귀가 보였다. 기괴하게 변한 나무와 달리 사마귀는 크기만 작아졌다.

민은 도끼를 내리며 말했다.

“그 끔찍한 도깨비보다 저게 더 무섭나요?”

“곤충들은 갑자기 뛰어오른다고요. 정말 싫어요.”

휘휘, 엘리가 손짓하자 사마귀가 나무뿌리 아래로 자취를 감췄다.

“현지와 피안. 그 사이에 있는 곳이 틈새라는 거군요.”

“그렇게 생각하면 편해요.”

민은 축 늘어진 나뭇가지를 툭 쳐내며 말했다.

“공간끼리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나요? 예를 들어 내 앞에 있는 이 나무를 뽑아내면, 현지에 있는 나무에도 피해가 가는 건가요?”

“그렇진 않아요. 완전히 격리된 층이니까요.”

“층.”

정령세계와 영혼세계. 두 곳 말고도 인지를 벗어난 곳이 존재하다니.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나요?”

“어떤 일이요?”

“나처럼 아무 이유 없이 표리영역으로 들어오는 거요.”

엘리가 아니요, 라고 딱 잘라 말했다.

“피안에서 온 강대한 적들이 종종 표리영역을 넘어 현지에도 영향을 끼치긴 하지만, 아주 특수한 경우예요. 평범한 사람은 죽는 그 순간까지 틈새에 대해 알지 못해요. 민도 몰랐던 것처럼.”

이토록 기이한 세계가 밀접해 있는데, 아무도 모른다니.

“인력 부족이라고 했죠?”

“네. 요즘 너무 바빠요.”

“상부에서 인력 충원을 안 해주나요?”

“‘조합’은 항상 인력난에 시달렸어요. 매번 사람을 뽑는다고 하는데, 신입이 늘지 않아요.”

엘리가 걸음을 멈췄다.

“근데 사람 뽑는 게 어려울 만해요. 질서를 지키는 중요한 일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건 아니니까요. 우린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그 누구도 우릴 격려해주지 않죠.”

약간 우울한 표정으로 말하던 엘 리가 금세 웃음을 짓는다.

“근데 괜찮아요. 원래 조용한 영웅이란 게 그런 거니까.”

“조용한 영웅?”

“네! 영웅은 참담한 현실 속에서 태어나잖아요? 유명한 영웅이 나온다는 건, 삶이 그만큼 팍팍하다는 증거죠. 근데 우리는 그러지 않아요. 아주 은밀하게 모든 걸 처리하죠. 사람들이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멋지지 않나요, 라고 말을 덧붙이는 엘리였다.

엘리의 말이 진실이라면 조합에 속한 청소꾼들은 다들 성인군자란 건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다. 인간은 욕심의 동물이다. 희생만 강요당하는 상황 속에서 정말 질서와 안녕만을 위해 버텨낼 수 있을까?

“보수는요.”

“보수요?”

“일에는 대가가 따라야 하죠. 정말 정의감만으로 이 일을 계속하는 건가요?”

“음, 돈을 받기는 해요. 원하는 지식을 얻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건 부차적인 거예요. 정의의 사도, 이 멋진 명예를 위해 오늘도 힘쓰는 거죠!”

진지하게 이런 생각이 든다.

세뇌 같은 걸 당한 게 아닐까?

아니면 순수성을 이해 못 할 정도로 내가 찌들어버린 걸까.

“고귀한 삶이네요.”

잠시 대화가 끊겼다.

묻고 싶은 건 많았으나 엘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걸음을 뗄 때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작게 한숨을 내쉰다.

설마…….

“목적지가 있는 거죠?”

“네? 아, 아마도요.”

아마도?

이 어수룩한 젊은 친구를 따라가는 게 좋은 선택일지, 깊게 고민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퀼비언이 근처에 있을 거라고 했죠?”

“추모길이 근처니까 있을 거예요. 아마도.”

“확실한 건가요?”

“…아마도?”

눈을 찌푸리자 엘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알기로 마도사의 추모길은 이곳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데요.”

“그건 현지의 추모길이고요. 피안과 인접한 길은 달라요. 퀼이 얘기해주지 않았나요?”

의아해하며 되묻는 엘리였다.

민은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엘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퀼하고 아는 사이…… 맞죠?”

이번엔 민이 침묵을 행사했다.

“저기요? 민?”

다급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더는 유야무야 넘어갈 수 없으니 사실대로 말했다.

“마도사 퀼비언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유명하니까.”

“그렇다는 건…….”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들어서 안다는 거지.”

엘리가 입을 크게 벌렸다. 넋 나간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얼굴을 와락 찌푸린다.

“거짓말쟁이!”

“거짓말한 적 없어요. 그저 약간의 오해를 바로 안 잡았을 뿐.”

“그게 거짓말이에요. 어른이면서!”

“원래 나이 먹으면 거짓말이 늘어요.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여기서 나가는 거잖아요? 그렇죠?”

씩씩거리던 엘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하던 말 계속 해보죠. 퀼비언을 찾아갈 수 있는 거예요? 확실하게 말해줘요.”

“…표리영역 안에서 확실한 건 없어요. 퀼의 나침반이 있다면야 방향을 확실하게 알 수 있지만, 지금은 없어요.”

“준비도 없이 틈새로 들어온 건가요?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

엘리가 코를 찡긋거렸다.

“보셨다시피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부적이 제대로 작동했어요. 그러니까 틈새로 들어왔죠. 하지만 갑자기 안쪽 환경이 바뀌었어요. 이런 건 저도 처음이에요.”

부적.

엘리가 잔뜩 들고 다니는 종이 뭉치를 말하는 것 같다.

민은 뒤틀린 숲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언제나 최악을 상정하고 움직여요. 만약 우리가 퀼비언을 못 찾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이 틈새에 갇혀 있어야 해요.”

“언제까지요?”

“그, 글쎄요.”

참담한 말이었다.

민은 신체술을 끌어 올려 바로 옆 나무를 박차고 올라갔다. 힘껏 뛰어올라 숲의 전경을 바라봤다.

모든 게 뒤틀려 있었다.

저 멀리 보여야 할 마을은 흔적조차 없었고, 길게 이어져야 할 산맥은 중간이 끊어져 있었다.

음침한 달빛이 닿는 곳 그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바닥으로 내려온 민은 엘리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았다.

“최대한 빨리 방법을 생각해 내봐요. 전문가잖아요.”

“노력해 볼게요.”

엘리가 부적을 손에 들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언제쯤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제 복귀가 늦어지면 퀼이 찾으러 와줄 거예요.”

“그러길 빌죠.”

민은 성도가 있을 방향을 바라본 뒤 걸음을 뗐다.

부디, 이곳에서 빨리 나갈 수 있길.

* * *

아침 공기가 제법 차다.

밀레나는 수련용으로 제작한 철검을 들고 저택 밖으로 나왔다.

가볍게 몸을 풀고 수없이 반복해온 검술을 시작했다.

상상 속의 적을 상대로 검을 찔러 넣었다. 희미하던 상대의 모습이 점차 괴물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체급 차이가 나는 적을 상대로 좀 더 효과적인 공격 수단이 없을까?

여러 가지 투로를 고민하며 검을 그을 때였다.

“아가씨!”

락샤가 다급한 목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시장에 갔다가, 시장에 갔다가….”

숨을 껄떡대는 락샤였다.

밀레나는 락샤의 등을 쓸어내렸다.

“천천히 말해도 돼요. 숨쉬기 힘든 건 아니죠?”

“네, 아가씨. 그런 건 아니에요.”

숨을 고른 락샤가 양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대피령이 내려졌어요.”

“네?”

“황가와 의회의 공동성명으로 성도 전체에 대피령이 내려졌어요.”

“갑자기 대피령이요? 무슨 이유로요?”

“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치안대가 시장 곳곳에 안내문을 붙여놨는데, 몇몇 구역을 제외하고는 전부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그걸 보자마자 놀라서 뛰어온 거고요.”

“알았어요. 일단 진정해요.”

락샤를 안에 들여다 놓은 다음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저택 밖으로 나와 거리로 들어서니, 락샤 말대로 치안대가 공문서를 이곳저곳에 붙이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 없이 특정 구역으로 이동하라는 대피령.

정보가 필요했다.

관리국으로 가는 길목에 들어섰을 때였다. 저 멀리 말을 타고 움직이는 미엔이 보였다.

밀레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질주하던 말이 밀레나 앞에서 멈춰 섰다.

“미엔, 대피령 봤지.”

“이제야 그걸 본 거야? 위쪽에서 진즉에 알렸을 텐데.”

“알잖아. 우리 집은 위쪽과 접점이 없다는 걸.”

“없는 게 아니라 신경을 안 쓰는 거겠지.”

미엔이 말에서 내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뜬금없이 대피령이라니.”

“나도 전부 파악한 건 아니야. 정확한 내용은 곧 폐하께서 공표하시겠지. 지금 발표문을 다듬고 있을 테고.”

“대강이라도 알려줘. 왜 갑자기 대피령이 떨어진 거야? 전쟁 난 것도 아닌데. 아니, 전쟁이 나더라도 성도에 대피령이 날 이유는 없잖아?”

미엔이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법사 클랜 쪽에서 발표가 있었어.”

“무슨 발표?”

“뿌리가 돌출될 거래.”

뭐?

잘못 들은 것 같아 되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다고?”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뿌리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 마나의 뿌리가 지상으로 튀어나올 거래.”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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