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3화
적군인가 아군인가.
민은 곁눈질로 괴물과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여자가 난처하다는 듯이 연한 웃음을 보였다.
“이해해요.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고요. 근데 쟤들보다는 제가 더 믿음직하게 생기지 않았나요?”
여자가 손가락으로 괴물을 가리켰다.
“저놈들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어요?”
“잘 알죠. 저런 애들을 청소하는 게 제 일이니까요.”
“청소?”
“일단 그 도끼 좀 치워 주시겠어요? 솔직히 쟤들보다 그게 더 무섭거든요.”
신용할 순 없으나 그렇다고 적대시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도끼를 내리며 말했다.
“여긴 어디죠? 저것들은 또 뭐고요. 그리고 그쪽은 여길 어떻게 들어왔죠? 막혀 있는데.”
보이지 않는 벽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50cm 정도 전진한 도끼가 부드럽게 튕겨 나왔다.
“이야, ‘틈새’를 그런 식으로 밀어내는 걸 보면 보통 분이 아니시네요. 하긴, ‘백형’을 둘이나 상대하고도 멀쩡할 정도니.”
틈새와 백형.
틈새는 이 기괴한 장소를 말하는 것일 테고, 백형은 저 괴물을 가리키는 단어인가?
민은 괴물을 바라봤다. 실실거리며 쫓아오던 놈들이 제자리에 멈춰 서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여자를 경계하는 건가?
“저기, 지금부터 청소를 시작할 건데 그 도끼로 절 공격하실 생각은…….”
민은 눈을 찌푸렸다. 여자가 어설프게 웃었다.
“당연히 없으시겠죠.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요. 저 정말 나쁜 사람 아니니까 공격하지 말아주세요.”
동작 하나하나가 허술해 보이는데, 저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까?
“일단 저것들부터 치운 다음에 얘기하죠.”
“얘기 좋죠.”
“난 뭘 하면 되나요?”
“도와주시게요?”
“놀고만 있을 순 없으니까요.”
“친절하신 분이네요. 근데 도움은 필요 없어요. 아,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제 작업 방식이 남들과 합을 맞추기 어려워서.”
작업 방식?
여자가 그럼, 이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나섰다.
“죽지 않는 괴물이에요. 상대할 수 있겠어요?”
“도깨비들은 처리하기 까다롭지만, 불사신은 아니에요.”
“도깨비?”
“네. 윌 오브 더 위스프, 잭 오 랜턴, 피안에서 온 손님. 혹은 그냥 귀신이나 도깨비 등등.”
여자가 손에 든 종이 뭉치를 들어 올렸다. 귀퉁이가 끈으로 묶여 있었는데, 여자는 중간에서 종이 한 장을 뜯어냈다.
“아무튼 얽혀서 좋을 거 없는 놈들이라는 거죠.”
손을 떠난 종이가 나풀거리며 날아올랐다.
바람 한 점 없는데, 종이는 바닥으로 향하지 않고 괴물 쪽으로 날아갔다.
기이한 현상에 눈이 붙들렸다.
왼쪽에 서 있는 괴물이 다가오는 종이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손으로 툭 쳤다.
그리고.
눈을 시리게 만드는 벼락이 떨어졌다. 섬광과 발을 맞춰 찾아온 둔중한 소리가 귀를 때렸다.
민은 반사적으로 버클러를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낙뢰.
설마 그 종이가?
검게 타들어 간 괴물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바로 옆에 서 있는 괴물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왜 반격하지 않는 걸까?
여자가 나타나고 나서 백형이라 불리는 저것들은 이상할 정도로 얌전해졌다.
“나머지 하나도 처리할게요.”
마찬가지로 종이 한 장을 뜯어내 가볍게 던졌다. 느리게 날아간 종이가 다시 낙뢰를 불러왔다.
콰릉, 귀가 얼얼해질 정도의 굉음이었다.
시커멓게 타버린 시체가 두 구.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도끼로 두 동강을 내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되살아난 괴물이었다.
“조심해요. 또 일어날 테니까.”
“괜찮아요. 이걸로 치워버리면 되니까요.”
여자가 괴물의 시체 쪽으로 걸어갔다. 민도 도끼를 내린 채 곁으로 다가갔다.
“여기다 이걸 뿌리면.”
여자가 허리춤에 달고 있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붉은 가루가 손에 들려 나왔는데, 그걸 괴물들 위에 뿌렸다.
조금씩 꿈틀대던 놈들이 가루에 닿자마자 맥없이 퍼져버렸다. 불볕더위에 던져진 작은 얼음처럼.
“청소가 무사히 끝났네요.”
싱긋 웃으며 바라보는 여자였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괴물의 시체.
민은 여자를 보며 물었다.
“이 상황, 설명 좀 해주겠어요?”
“설명, 설명 중요하죠. 근데 제 권한이 한정적이라서요. 명칭 몇 개야 알려줄 수 있다지만 나머지는 좀…….”
머쓱하게 웃는 여자였다.
“말해줄 수 없다는 거군요.”
“음, 네. 그런 거죠.”
“제국 내에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데, 내가 몰랐다는 게 놀랍네요.”
“비밀이란 게 원래 그렇잖아요.”
민은 웃으며 여자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이 마음은 진심이에요.”
“아, 네. 근데 저기…… 너무 가까운데요.”
여자가 뒤로 물러섰다.
“구해준 사람에게 보따리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거, 분명 잘못된 일이죠.”
“예!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하지만 지금은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협박해야겠어요.”
“네?”
신체술을 끌어올려 거리를 좁혔다. 여자는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손목을 내주었다.
역시나.
반사 신경이 처참한 수준이다.
“자, 잠깐만요! 이러시면 곤란해요.”
“맞아요. 곤란하겠죠. 하지만 난 그쪽이 알고 있는 것들을 들어야겠어요. 지금 제국은 너무나도 불안한 상태예요. 문제가 도처에 깔렸죠.”
“나라 돌아가는 건 관료가 알아서 할 일이죠. 저는 아무 상관 없어요!”
낑낑거리며 몸을 뒤로 빼는 여자였다. 놀라울 정도로 힘이 없다. 툭 치면 병원으로 실려 가지 않을까, 그런 생각마저 든다.
“성도에 괴생명체가 나타났어요. 방금 그것들과 비슷한 놈들이었죠.”
“예? 아닐걸요.”
“물론 다르긴 해요. 그것들은 체액을 흘렸으니까.”
“거봐요! 도깨비들이 표리영역 밖으로 뛰쳐나갔다면 난리가 났을 거예요. 저도 알았을 거고요.”
“표리영역?”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이요. 틈새, 표리영역. 자, 설명이 됐죠?”
“아니요. 오히려 궁금증만 늘어나네요.”
“…진짜 이러실 거예요? 전 일개 청소꾼이에요.”
“청소꾼?”
“네. 도깨비 치우는 선량한 청소꾼이요. 저한테 이러시면 진짜 안 돼요. 안 그래도 인력 부족으로 다들 고생하고 있는데, 저한테 문제가 생기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 말고도 더 있다는 거군요?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단체인가요?”
“……더는 대답 못 해요. 진짜 안 할 거예요.”
여자가 울상을 지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러시면 진짜 안 돼요. 나중에 큰일 치를지도 몰라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자체가 이미 큰일이에요. 대체 그쪽은 뭐죠? 도깨비는 또 뭐고요? 청소꾼이란 자들은 제국 소속인가요? 아니면 연합왕국?”
여자가 도리질을 쳤다.
“우린 질서의 편이지 황제나 시장의 사람이 아니에요. 이건 자부심을 갖고 말할 수 있어요.”
눈을 또렷이 뜨며 말하는 여자였다. 그 올곧은 눈빛에서 거짓이나 꿍꿍이 같은 걸 찾아볼 수 없었다.
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도 테러와 아무 연관이 없는 건가요?”
“그런 짓 할 시간도 없어요. 안 그래도 요즘 엄청 바쁘다고요. 표리영역이 제멋대로 날뛰어서 정말 미칠 지경이에요.”
손아귀에 힘을 살짝 풀며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길리우드란 자를 아나요?”
“그게 누구죠?”
맹하기 그지없는 눈동자였다. 헛웃음이 작게 나왔다. 손목을 놓아주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미안해요.”
“…한 번은 이해할게요. 밖이 소란스럽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어이없을 정도로 순해 빠졌다.
주저앉은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우리가 모르는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이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죠?”
“네! 정확해요.”
“알겠어요. 더는 그쪽이 어디 소속인지 묻지 않을게요.”
민은 여자가 들고 있는 종이 뭉치를 바라봤다.
“근데 그것도 비밀인가요?”
“이거요? 아니요. 이건 비밀이랄 것도 없어요.”
“벼락을 부르는 종이라니. 들어본 적도 없는데, 대체 뭐죠?”
“형태가 약간 다른 마법이라면 이해하기 쉬울까요? 아니면 주술?”
“주술?”
“바깥 사람들이 마나를 이용해 마법과 마법공학을 발전시켰다면, 우린 이런 쪽으로 능력을 개화시켰죠. 뭐, 퀼의 도움이 크긴 했지.”
퀼.
대화의 흐름으로 따져봤을 때 중요한 인물 같았다.
이 여자,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알아서 다 말하는 게 아닐까?
잠자코 바라보고 있자 여자가 뜨끔한 표정을 짓는다.
“퀴, 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네.”
“정말이에요.”
“네, 그렇겠죠.”
“…저기. 청소꾼 하실 생각 없나요?”
맥락 없는 권유였다. 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청소꾼이란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거예요?”
“아니요. 능력을 갖춰야죠. 하지만 그…….”
우물쭈물하던 여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그쪽이라고 하려니까 괜히 꺼림칙해서.”
“민. 쉬운 이름이죠?”
“좋네요, 민. 제 이름은 엘들리아예요. 친한 사람들은 엘리라고 불러요.”
엘리가 눈을 깜빡거리며 바라봤다.
왜 그런가 싶어 가만히 쳐다보자, 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불러 봐요?”
“아, 불러봐야 하나요?”
희한한 애였다. 엘리, 라고 부르자 눈에 띄게 좋아한다.
“아까 하던 말 마저 하면, 민…… 씨 정도의 능력이라면 청소꾼이 될 수 있을 거예요.”
“편하게 이름만 불러도 돼요.”
“그럴까요?”
빙긋 웃던 엘리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아. 슬슬 나가 봐야겠네요. 오래 있어서 좋을 게 없으니까요.”
“청소꾼이 되면 이곳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건가요?”
“집처럼 찾아올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저처럼 도구의 힘을 빌려야 하는 사람도 있어요.”
엘리가 일단 밖으로 나가자며 보이지 않는 벽 앞에 섰다.
종이를 손에 쥐고 잠깐 집중하던 엘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됐어요. 여기서 나가죠.”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 떼는데, 엘리의 몸이 벽에 부딪혔다.
“어?”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다시 종이를 손에 쥐고 조금 전보다 신중한 표정으로 벽을 바라본다.
“이제 됐을 거예요.”
퉁, 말과 달리 몸이 튕겨 나왔다.
동그란 눈을 몇 차례 깜빡거리던 엘리가 여러 장의 종이를 손에 쥐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다.
“민.”
“왜 그러죠?”
“아무래도 갇힌 거 같아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엘 리가 말했다.
민은 벽에 손을 대며 입을 열었다.
“성도에 전해야 할 소식이 있어요.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멧시언이 후발주자로 출발하겠지만, 성도 도착까지 두 달은 소모될 것이다. 훈련받지 않은 연구자들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또 다른 테러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 벼락으로 벽을 부술 수 없어요?”
“그 주술은 도깨비한테만 효력이 있어요. 그리고 표리영역은 그 정도의 힘으로 열 수 없고요. 특히나 안쪽에서 바깥으로 나가려면…….”
발을 동동 구르던 엘리가 민을 바라봤다.
“긴급 사태니까 어쩔 수 없네요. 퀼을 찾아야겠어요. 추모길도 근처니까 운이 좋으면 금방 발견할 거예요.”
“추모길?”
퀼, 그리고 추모길.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던 단어들이 순간 조합됐다.
아니겠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일단 물었다.
“그 퀼이라는 분이 내가 아는 퀼비언은 아니겠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