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텐트 안에서 뒤척이던 민은 불안감에 몸을 일으켰다.
예민해진 감각이 지표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진동을 잡아냈다.
아주 미약한 지진.
일반인들은 느끼지 못할, 새들조차 감지하지 못할 그런 진동이었다.
하아, 한숨이 길게 뿜어져 나온다.
자연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계책인지, 알 수 없기에 초조함만 더해간다.
텐트 밖으로 나왔다. 별이 유달리 밝아 보이는 밤이다.
이제는 제법 서늘해진 새벽바람이 낮게 깔리며 낙엽을 휩쓸었다. 민은 나뒹구는 잎들을 바라보다가 수통을 붙잡았다.
성도까지 얼마나 걸릴까.
다리를 접고 자는 말을 바라봤다. 볼로스에서 휴식 시간도 주지 않고 바로 출발해 버렸다.
명마라고 한들 체력에는 한계가 있다. 여기까지 투정 부리지 않고 달려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말 곁으로 다가가 갈기를 쓸어내렸다. 푸르르하며 잠깐 눈을 떴지만 금세 잠드는 말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역참이 있는 도시에 도착한다. 거기서 말을 바꿔 타고 다시 달리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으리라.
“그냥 기우이길.”
격납고 주변에서 발견한 기이한 손목도, 지진도 모두 어쩌다 벌어진 우연이길.
그래서 서둘러 성도로 가는 이 발걸음이 헛수고로 끝나길.
모든 게 해프닝으로 귀결된다면 이정도 고생쯤이야 웃으면서 몇 번이고 할 수 있었다.
낙관론을 꾸역꾸역 상기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벌어지지 않은 재앙을 걱정하며 정신력을 소모하면 손해였다.
가야 할 길이 멀다.
체력도, 정신력도 온전히 유지해야 한다.
말에 기대 한동안 숨을 골랐다. 난잡했던 머릿속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텐트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음침한 어둠 저편에서 불꽃이 번쩍였다. 잘못 본 건 아니었다.
주변에 여행객은 없다. 애초에 이 늦은 시간에 이쪽 길목을 이용할 사람도 없고.
노릴 손님이 없으니 노상강도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방금 그 불꽃은 무엇인가?
민은 텐트로 걸어가 도끼를 쥐었다. 신체술을 끌어올려 조금 전 불꽃이 일렁였던 곳을 바라봤다.
푸른 잎을 둘러싼 나무와 잡초가 우거진 곳. 민은 도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보이진 않지만, 무엇인가가 있다.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버클러도 챙겼다. 왼손에 든 작은 방패를 앞세우고 도끼는 언제든 그어버릴 수 있게 치켜세웠다.
조용하다.
인기척 따윈 없다.
그럼에도 전방에 뭔가가 있다고 몸이 경고를 보내왔다.
사방을 주시하며 혹시 모를 공격을 대비할 때였다.
시린 감촉이 얼굴에 닿았다. 그와 동시에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서 있어야 할 나무가 삐딱하게 누웠다. 회오리치듯 휘감긴 나무 옆에는 공중에 반쯤 뜬 나무도 있었다.
꿈은 아니었다.
날 선 감각들이 눈앞의 현상이 현실임을 알려주었다.
마법인가?
헛것을 보게 만드는 마법이라면 모든 게 설명된다. 하지만 마법을 쓸 때 발생하는 마나파장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가시거리 안에 마법사 따윈 없었다.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마법인가?
마법의 가짓수는 무한에 가까우니 그런 마법이 존재할 수도 있지만, 그런 대단한 마법사가 왜 이런 곳에서 적대적 행동을 보이는 거지?
설명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섬뜩하게 몸을 훑고 지나간 기이한 기류.
한순간에 달라진 풍경.
민은 뒤를 돌아보았다. 텐트가 사라졌다. 뒤로 조금씩 이동해 텐트가 있던 자리에 섰다.
환각 마법은 헛것을 보여줄 뿐, 실존하는 물건을 제거하지 못한다.
이게 환각이라면 발에 텐트가 걸려야 한다.
몸이 텐트가 있던 자리를 통과했다. 민은 마른침을 삼켰다. 환각 따위가 아니다. 정말로 주변 환경이 변화한 것이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볼 일이 있는 거면 나와 주시죠.”
심리적, 지리적 이점을 잡은 적이 모습을 드러낼 리 없다. 알면서도 말을 걸어봤다.
모든 게 불리한 상황.
뭐라도 해봐야 했다.
그때였다. 불빛이 보였던 곳에서 소리가 났다. 자세를 가다듬었다. 전투로 단련된 뇌가 속삭이고 있었다.
곧, 위험이 닥쳐올 거라고.
캉!
버클러를 쥔 손목이 시큰해졌다.
민은 코앞에 있는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바라봤다.
검은자위가 없이 흰자위만 가득한 눈 밑으로 커다란 입이 보였다. 코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안 보인다.
쥐고 있던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맨손으로 방패를 내리쳤던 괴물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민은 손목을 돌려 버클러의 상태를 확인했다. 움푹 파여 있었다. 워 해머에 직격당한 기분이다.
신체술 없이 맨몸으로 받아냈다면 골절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팔이 뜯어져 나갔으리라.
마수인가?
마수는 정형화된 외형이 없었다. 그저 기괴하게 생겼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
저 앞에 있는 놈이 마수라고 친다면, 주변 환경이 변한 이유는 무엇인가?
“먹이.”
귀를 파고든 소리에 민은 눈을 크게 떴다.
말을 했다. 그것도 인간의 말을. 어눌하지만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말하는 마수 따위는 보고받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지능이 있는 마수야 수차례 발견됐지만,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마수는…….
“미안하지만, 난 먹이가 아니야.”
디딤발에 강하게 힘을 주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놀라운 육체를 가졌으나 상대 못 할 적은 아니었다.
올해 들어 기괴한 것들을 많이 봐와서 그런지, 희뿌연 눈과 커다란 입도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
실더 같은 놈을 생각하면 앞에 있는 괴물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카앙!
적이 휘두르는 손톱을 막고 도끼를 세로로 찍었다. 살점에 도끼날이 박히기 직전, 괴물이 해죽 웃는 게 보였다.
웃음의 의미.
민은 이를 악물며 몸을 틀었다.
뒤쪽에서 하얀 손이 튀어나왔다.
거리를 벌린 뒤 격한 숨을 내뱉었다.
기척을 죽인 하얀 괴물이 한 마리 더 있었다.
등 뒤에 설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적의 공세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심장이 꿰뚫렸을 것이다.
“멍청이.”
“네가 멍청이.”
“바보.”
“너야말로 바보.”
하얀 괴물 둘이 서로를 마주 보며 티격태격했다.
태연한 모습에 열이 받지만, 지금은 한숨 돌릴 수 있어 고마울 따름이었다.
서로를 툭툭 치던 괴물들이 동시에 민을 바라봤다.
몸이 강철 같은 놈이 전면에 나서자, 존재감 낮은 녀석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짝을 이뤄서 먹잇감을 사냥하는 놈들이다. 기척을 감춘 놈을 찾아내야 한다. 저런 걸 등 뒤에 놓고 싸웠다간 얼마 못 가 시체로 변하리라.
“공기 맛도 이상하네. 너희가 여길 이렇게 만든 거야?”
껄끄러운 숨을 고르며 말을 걸었다.
“먹이.”
“너 다른 말도 할 줄 알잖아? 자기소개 정도는 해주지?”
“먹이!”
녀석이 달려든다.
민은 숨을 입 안에 가득 넣고, 신체술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렸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가 확 좁아진다. 안구가 버텨주는 동안 놈들을 처리해야 했다.
비명을 지르는 몸을 이끌고 앞으로 내달렸다. 두어 걸음 떼니 괴물이 눈앞이었다.
고민할 것 없이 도끼를 휘둘렀다.
히죽 웃는 괴물의 얼굴이 보인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같은 패턴으로 오네?”
민은 버클러로 눈앞의 괴물을 밀쳐낸 후, 몸을 반 바퀴 회전시켰다.
입을 쩍 벌리며 나타난 또 다른 괴물이 시야에 걸려들었다.
민도 활짝 웃어주었다.
“반갑다, 이 개새끼야.”
콰직!
정수리를 파고든 도끼날이 살점을 가르며 내려갔다. 양손을 앞으로 뻗고 있던 괴물은, 두 동강이 나 쓰러지는 동안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민은 도끼날을 바라봤다.
생명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체액이 묻어 나오질 않았다.
대체 이놈들은 뭐지?
“멍청이.”
뒤에 있는 놈이 말했다. 기괴한 웃음은 여전했다. 동료가 죽었는데 아무렇지 않은 듯하다.
아니, 애초에 동료애란 게 없는 건가?
발로 시체를 툭 찼다. 다행히 되살아나지는 않았다. 사체의 질감이 꼭 큼직하게 썰어놓은 돼지고기 같다.
앞으로 2분 정도인가.
살짝 풀어놓았던 신체술을 다시 다잡았다. 마나를 계속 붙들어 놓을 수 없는 일이니, 얼른 저놈을 제거해야 했다.
죽은 동료를 보며 폴짝 뛰던 하얀 놈이 빠르게 다가왔다. 공격을 대비했는데, 놈은 민 옆을 지나쳐 시체로 뛰어갔다.
반으로 갈린 시체를 들어 올리더니 강하게 끌어안았다.
욕지거리가 나오는 광경이었다.
뭐 하는 거지?
가만히 지켜보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빈틈이 생겼다.
시체를 끌어안은 놈에게 달려가 허리를 도끼로 그어버렸다.
저항조차 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쉽게 반으로 갈라버렸다.
한 놈은 세로로, 다른 한 놈은 가로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전투였다. 이놈들은 뭘 하려고 했던 걸까?
신체술을 풀고 한숨 돌릴 때였다.
자빠져 있던 시체들이 뭉글뭉글 부풀며 형태를 바꿨다. 잘 치댄 반죽처럼 하나로 뭉치더니 이내 처음 만났던 그 모습으로 돌아왔다.
인간을 닮은 몸에 눈은 하얀색, 그리고 커다란 입.
되살아난 두 놈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킥킥 웃었다. 멍청이, 바보. 티격태격하다가 다시 민을 바라본다.
“먹이.”
“먹이라 하지 말고 민 교수라 불러주면 좋겠는데. 어?”
“민? 먹이!”
도끼를 앞세우며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죽지 않는 놈들과 계속 싸울 순 없었다.
이탈해서 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신체술을 더 썼다간 놈들한테 죽기 전에 몸 자체가 망가질 것이다.
몸을 틀어 쭉 뻗은 숲길을 따라 뛸 때였다.
퉁, 몸이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 박혔다. 부드러운 촉감의 벽이지만, 도끼로 내려찍어도 뚫리지 않았다.
죽지 않는 괴물에 보이지 않는 벽.
“빌어먹을.”
민은 씨근덕거리며 몸을 돌렸다. 괴물 두 놈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이곳은 녀석들의 사냥터였다.
벗어날 수도, 그렇다고 제거할 수도 없다.
전선에서 한창 나뒹굴 때는 내일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은퇴하고 나서 이렇게 되리라고는.”
도끼를 들어 올렸다. 물러설 수 없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다.
몸이 망가지기 직전까지 적을 도륙한다.
거리가 점점 좁혀진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가느다란 숨을 내쉬고 신체술로 몸을 무장할 때였다.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벽을 가르며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건 또 뭐야?
허공을 휘젓는 손을 멀거니 바라볼 때였다. 팔꿈치, 어깨, 그리고 얼굴.
차례대로 벽을 뚫고 들어온 여자가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어휴, 잠깐만요. 제가 태어날 때부터 호흡기 질환이 있어서.”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를 주절주절 떠들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나이는 스물 초반쯤 됐을까?
이런 괴이한 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박해 보이는 사람이다.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민은 시선을 위에서 아래로 움직였다.
단출한 복장. 몸을 지킬 만한 장비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손에는 수첩으로 보이는 종이 뭉치를 들고 있는데, 저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이런 경우는 자주 없는데 휘말리셨네요. 그보다, 괜찮으세요?”
여자가 목덜미에 난 땀을 찍어내며 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