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21화 (194/558)

제221화

잠깐의 정적.

엔엔과 카트시가 서로를 바라봤다.

“제가 설명할까요?”

-아니요. 이런 건 제가 하는 게 낫죠. 칼랑족의 설명은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카트시의 안구가 다가왔다.

-가하란이 지닌 그 놀라운 눈과 이해력 때문에 종종 잊곤 해요. 마법공학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들였다는 걸.

가하란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나 모르는 거 많아.”

-그래요. 모자람을 알고 그 모자람을 고백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긴 하지만,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가하란은 의자를 끌어당긴 후 카트시의 눈을 바라봤다. 설명이 곧 시작되리라.

-기초부터 하죠. 마나가 뭐죠?

“모든 것의 시작, 모든 것의 끝. 상상보다 더 큰 힘. 근데 마나가 정확히 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어.”

-맞아요. 아무도 모르죠. 근데 복잡하게 생각하진 말아요. 거대한 에너지. 우리가 마나를 대하는 보편적인 자세죠.

카트시의 안구가 천장을 향했다.

-무지개를 본 적 있나요?

“봤어.”

-하나의 색이던가요?

“아니. 여러 색이 모여 있었어.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과 보라색이 뒤에 붙을 수도 있지만, 색 구분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마나도 무지개와 비슷해요. 다양한 색을 지니고 있죠.

가하란은 이전에 들은 내용을 기억해냈다.

“가시화된 마나는 위험하단 얘길 들었어. 눈에 보라색 빛 마나가 보이면 얼른 도망치라고.”

-바로 그거예요. 마나는 파장마다 색이 변해요. 청색 계열의 마나가 위험군으로 분류되죠. 물론 이 또한 완벽하지는 않아요. 어디까지나 편의상 구분해놓은 거니까.

카트시는 말했다. 특정 영역대가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마나는 파장에 따라 층이 나뉘는 거야? 무지개가 색이 나뉘는 것처럼? 그리고 카트시가 잠든 이유는 그 특정한 마나 파장 때문이고?”

-길게 설명할 필요 없겠네요. 바로 그거예요. 우리가 사용하는 연결망은 뿌리가 내보내는 다양한 영역대의 마나 중 특정한 영역을 사용해요. 지진 이후 다른 마법 공학품은 괜찮은데, 저만 고장 난 것도 그 때문이고요.

전부 다 이해한 건 아니지만, 카트시가 왜 멈췄는지는 어렴풋하게나마 파악했다.

그렇다면 다음 궁금증.

“뿌리의 특정 영역대만 반응했다고 했지? 그리고 엔엔 님은 그게 불가능하다고 했고. 이건 무슨 뜻이야?”

-마나는 거대한 힘이에요. 바다에 비유할 수 있죠. 가하란, 바다를 본 적이 있나요?

“아니. 한 번도 없어. 아저씨들 말로는 물이 엄청 많이 있다고 하는데, 내가 뭘 상상하든 그것보다 더 클 거래.”

-맞아요. 맑게 갠 하늘이 바다라고 생각하면 돼요. 끝없이 넓죠?

“어. 근데 그렇게나 많은 물이 정말로 계속 있는 거야? 어디로 안 사라지고?”

-그 궁금증을 풀려면 또 시간이 걸릴 테니, 나중으로 미루죠. 어쨌든 마나는 바다와 같아요. 거센 강물로도 바다에 합류하면 구분할 수 없게 되죠.

끝없는 물.

바다.

브라인은 산페르를 가리켜 ‘바다를 품은 혼’이라고 했다.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었다.

심상세계에서 본 산페르는 하늘을 가릴 정도로 컸으니까.

-바다는 모든 걸 포용하죠. 바다에 물 한 줌 더한다고 해서 변하지 않고, 물 한 줌 빼낸다고 해서 바뀌지 않아요. 바다는 언제나 항상 바다인 상태로 있어요. 뿌리 역시 마찬가지예요. 뿌리는 너무나도 거대한 힘이라 인위적으로 건드릴 수 없어요. 건드린다고 해도 티도 안 나고요.

가하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카트시. 저번에 마나포집을 설명할 때 이렇게 말했잖아. 마나가 고갈될 가능성이 있어 마나포집을 모두가 쓰지 못했다고.”

-그때도 말했다시피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얘기한 거예요. 마나가 한정적인지, 무한한지 여전히 모르니까요. 하지만 우린 지금 일반적인 얘기를 하고 있으니, 뿌리의 마나가 무한하다고 상정하는 거죠.

마나를 사용해 편리해졌지만, 누구도 마나에 관해 자세히 모른다.

그 점이 왠지 무섭게 다가왔다.

가하란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한 마나, 그리고 뿌리. 방대한 힘의 줄기를 인간이 건드리는 건 불가능해요. 자극을 주는 것조차 힘든데, 특정 영역대를 골라 입맛대로 조종하는 건 더욱 힘들죠.

거센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던 나뭇잎을 떠올렸다. 나뭇잎에 손발이 달려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강물을 어찌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만약 바다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뿌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도 가능해?”

-생각에 한계는 없으니까요. 가하란이 말한 대로 뿌리를 통제할 힘이 존재한다면, 뿌리 역시 조종할 수 있겠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에 불과해요. 관념적인 접근법마저도 뿌리 앞에서는 초라해져요. 그만큼 뿌리는 절대적이니까요.

상상을 뛰어넘는 힘의 원천.

가하란은 자신의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렵긴 하겠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해요. 거대한 힘 앞에서는 인간의 의지도, 위대한 기술도, 초월적인 마법도 무용지물이니까요.

불가능.

눈앞에 벽을 드리우는 그 단어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핀들론 할아버지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섣불리 한계를 짓지 마라. 그게 널 가두게 될 거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엄청난 천재가 뿌리를 조종할 방법을 알게 되고, 그걸 실행에 옮긴다면 어떻게 돼?”

-뿌리를 인간의 뜻대로 다룬다?

카트시가 이번엔 엔엔을 바라봤다.

-욕망. 인간의 욕망이 뿌리를 건든다. 엔엔, 어디까지나 만약을 가정하고 이야기해 보죠. 어떻게 될 것 같나요?

“대답하기 곤란한 것만 저한테 넘기는군요.”

-엔엔이 말했듯 전 감정을 모르는 기계니까요. 욕망 같은 건 잘 몰라요.

후후, 하고 간지럽게 웃는 카트시였다. 엔엔이 아주 잠깐 카트시를 노려보다가 가하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른다고 한다면, 가하란은 납득할 수 있나요?”

“엔엔 님께서 모른다고 하면요. 하지만 엔엔 님, 알고 있는 거죠?”

“안다고는 할 수 없어요. 뿌리가 지상의 지성체 손에 넘어간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요.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그저 예상할 뿐이죠.”

“어떻게 되나요? 궁금해요.”

엔엔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뿌리는 땅 밑 깊숙한 곳에 있어요. 물리적인 실체가 있는 건지, 아니면 형태가 없이 에너지로만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어요. 그 누구도 뿌리의 본체를 본 적이 없으니까요.”

엔엔이 메모지를 손에 쥐었다. 가로로 눕힌 상태에서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하지만 형태가 중요한 건 아니죠. 중요한 건 그 막대한 힘이니까요. 만약 뿌리를 누군가가 조종하게 된다면…….”

주변을 살피던 엔엔이 만년필을 거꾸로 쥐었다. 그러고는 아래서 위로, 펜으로 사정없이 메모지를 뚫어버렸다.

가하란은 움찔하며 꿰뚫린 메모지를 바라보았다.

“학자들이 예견하는 형태는 이래요. 뿌리가 지표면을 뚫고 나오는 거죠. 뿌리를 조종하는 자가 뭘 원하는지에 따라 형태는 바뀌겠지만, 뿌리가 지상으로 나오게 된다면 아마 이럴 거예요.”

“땅에 구멍이 뚫리는 건가요?”

“아, 설명이 부족했어요.”

엔엔이 무심한 얼굴로 만년필을 움직였다. 꿰뚫린 메모지가 좌우로 길게 찢어졌다.

그러다 결국 너덜너덜해진 메모지 반쪽이 땅으로 떨어졌다.

“뿌리는 한 점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에요. 뿌리는 어디에나 존재하죠. 뿌리가 지상으로 드러난다는 건,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이 이렇게 변한다는 걸 의미해요.”

가하란은 바닥에 떨어진 메모지를 바라봤다. 발끝부터 섬뜩한 감각이 치고 올라왔다.

“무서워요.”

“맞아요. 무섭고 끔찍한 일이죠. 하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카트시가 말했듯, 바다를 뜻대로 움직일 방법은 없어요. 고요한 바다에 돌멩이를 던져봤자 작은 파문만 일 뿐, 바다는 평화로울 테니까요.”

가하란은 몸을 숙여 떨어진 메모지를 주웠다.

땅이 이런 식으로 갈라진다면, 그 위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불쾌한 상상이었다. 고개를 살짝 털어 머릿속에 들어찬 망상을 날려 보냈다.

벌어지지 않을 일.

메모지를 작업대에 올려두며 말했다.

“카트시가 고장 난 건 우연이었고 아무 문제 없는 거죠?”

엔엔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럴 거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요.”

* * *

둔에서 가장 높은 시계탑 위.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며 브라인은 수첩을 꺼냈다.

여름이 끝나감을 알리는 건조한 바람이 서쪽에서 불어온다. 팔랑거리는 종이를 펜으로 꾹 누르며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변함없는 도시의 전경.

인간족은 바삐 움직이고 있다.

이름 모를 꼬마가 창문을 닦고 있고,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인간이 꼬마를 닦달 중이었다.

도로를 보수 중인 인부 옆으로 마차가 쌩하니 지나간다. 놀란 인부가 삿대질하자 다른 인부가 그를 말린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행정처 앞은 오늘도 시끄럽다. 시의회 의원 선정 방식이 불공평하다며 재투표를 원하고 있었다.

그들을 둘러싼 군인은 무료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긴 하품을 한다.

그 옆에 있는 둔 중앙은행.

트릿족, 머니페니들이 줄지어 서서 자루를 옮기고 있다.

먼발치서 자루를 바라보며 탐욕에 젖어 있던 인간들이 한숨을 내쉬며 일터로 돌아간다.

시계태엽처럼 적당히 맞물려 돌아가는 둔의 일상.

브라인은 기록을 마치고 수첩을 덮었다.

힘겹게 얻어낸 지루한 평화가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다. 고리타분한 전경이지만, 이 모습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부침이 있었던가.

“나름 길었지.”

계획도시 둔.

이 반듯한 도시의 생명이 이렇게 길게 이어질 줄은 몰랐다. 물론, 인간의 관점에서 길다는 거지만.

브라인은 새로운 수첩을 꺼내 들었다.

제목을 적지 않은 깨끗한 겉면.

이 재미없는 도시에 나름 정이 들었던 걸까. 새로운 수첩을 들고 있으니 아쉬운 마음이 든다.

물론 아직은 새 수첩을 쓸 필요가 없다. 둔의 생명은 이어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얼마 전 도시를 강타한 지진은 기존의 지진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어떤 의지.

아직은 구분할 수 없지만, 그 거대한 힘에 불순물이 섞여 있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문제인지.

아니면 인지를 벗어난 지성체의 도전인지.

브라인은 펜 뒤쪽으로 머리를 긁었다.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징조인 산페르가 나타났고, 오크족 주술사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연이 겹쳐버렸다.

필연이란 구태의연한 말이 필요한 수준까지 온 것이다.

전조는 일어났고 저 밑바닥부터 무언가가 바뀌고 있었다.

그게 거대한 파도가 돼 세상을 덮칠지, 아니면 애들 장난 수준에서 그칠지.

불확실성이 그 몸집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모든 게 명료해지고 현상을 목도하게 되는 날, 과연 이 도시의 모습은 어떻게 바뀔까?

브라인은 시선을 옮겨 요정의 안뜰을 바라보았다.

“저긴 무사했으면 좋겠는데.”

기록자의 의무를 무시한 채 저 가게는 살려낼까?

잠깐 고민했지만 브라인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바라라의 딸은 개입하지 않는다.

오로지 관찰하고 기록할 뿐.

설령 관찰 끝에 죽음이 기다린다고 해도, 보고 적는 걸 멈출 순 없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환경이 급변하면 종의 대다수는 사라진다. 하지만 전멸하는 건 아니다.

반드시 살아남는 개체가 생긴다.

적응한 것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체제가 결성될 테고.

브라인은 작게 하품한 뒤 시계탑에서 뛰어내렸다.

생각은 여기까지.

이제부터는 즐거운 식사 시간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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