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20화 (193/558)

제220화

마스터 아낙스.

이름이야 수없이 들어봤다.

밀레나는 율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모자가 없는 갈색 로브.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차림새다.

로브를 걸친 노인은 다소 긴장한 얼굴로 옆에 있는 남자와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저 사람은…….”

밀레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둔에서 본 기억이 있다. 칼리고와 카페에서 대화를 나눌 때 느닷없이 찾아왔던 남자.

감찰단 소속 ‘데옹’.

아낙스와 데옹, 그 옆에 청년이 한 명 더 붙어 있는데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서두르는 거 같지?”

멀어져 가는 아낙스와 데옹을 보며 말했다. 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표정도 안 좋아 보이고.”

“아낙스 님 옆에 있는 남자, 특수감찰단 소속이야.”

“확실해?”

“어.”

율이 눈을 찌푸렸다.

“낌새가 안 좋네. 특수감찰단에 클랜 마스터라.”

일어서는 율을 붙잡았다.

“뭐 하게?”

“그냥 어디 가나 따라가 보게.”

“그만둬. 그러다 문제 생겨.”

“살짝만 보는 거야. 어디로 가는지 알아보는 것 정도는 죄가 아니잖아? 게다가 여긴 자유로운 성도고. 거리를 걷는 자유는 누구에게나 허락돼 있어.”

“말은 잘하지.”

핀잔을 주면서도 결국 율과 함께 움직였다. 저 멀리 대로변을 걷는 세 사람을 쫓았다.

“거리 유지해. 감찰단원이라면 미행 정도는 금방 알아차리니까.”

“주변에 사람이 이렇게 깔렸어. 인기척으로 구분하는 건 불가능해.”

율이 말하기 무섭게 데옹이 걸음을 멈췄다. 밀레나는 반사적으로 율을 붙잡아 옆길로 이끌었다.

“봐봐, 걸린다니까.”

슬쩍 길가를 내다봤다. 아낙스와 데옹이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알아차렸는데도 이쪽으로 오지 않았어.”

밀레나가 말했다. 율이 작게 숨을 토해내며 옆에 붙었다.

“그만큼 일이 급하다는 거겠지?”

거리를 유지한 채 계속 따라갔다.

세 사람의 목적지가 금방 눈에 들어왔다.

“저긴…….”

“폐하의 임시 거처야.”

무너진 왕성 터 옆에 자리한 건물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저기, 솔 마법 클랜의 문양이야.”

세 사람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다른 방향에서 로브를 걸친 자들이 임시 거처로 들어갔다.

한동안 먼발치서 황제의 임시 거처를 지켜봤다.

마법사로 보이는 자들이 하나둘씩 그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성도에 이름 있는 마법사 클랜은 전부 소집한 거 같은데?”

율이 말했다.

“클랜을 소집한다고? 황가한테 그런 권한은 없을 텐데.”

길드와 클랜.

길드는 국가의 지원하에 운영되지만, 클랜은 독립적 재정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마법사 클랜은 지독히도 개별적이라 국가의 명으로도 한자리에 불러 모으기가 힘들다고 들었다.

자유를 추구하는 마법사들이 억압의 상징인 황제의 임시 거처로 모여들었다.

이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지진?”

밀레나는 일주일 전에 일어난 지진을 떠올렸다.

“이제 와서? 지진이 문제였다면 한참 전에 모였겠지.”

“그사이에 뭔가 발견했을 가능성은?”

“아예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진 때문에 마법사들을 불러 모으는 건 이상한데? 지진은 마법사들이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땅이 제멋대로 춤추는 걸 인간이 어떻게 해.”

율이 지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진의 원인이 마법이라면?”

“말도 안 돼. 마법으로 지진 같은 천재지변을 일으킬 수 있다면 전쟁을 왜 했어? 연합왕국 집결수도에 폭우를 부어버리면 전쟁 승리인데.”

말도 안 된다며 부정하는 율이었다. 밀레나는 재건 중인 왕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루아침에 왕성이 사라지는 건 말이 돼?”

“그건…….”

“인간을 닮은 괴물은? 귀족 거주지 상공에 나타났던 마법 생명체는? 그리고 하늘을 덮었던 날개는?”

눈을 살짝 치켜뜨며 물었다. 율이 입술을 씰룩거리다가 고개를 살짝 내렸다.

“네 말대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네.”

“그리고 얼마 전에 오크족 주술사가 성도를 찾았잖아. 그것도 뭔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주술사는 정기적으로 성도를 찾아. 물론 주기는 알 수 없지만.”

“큰 사건 이전에 작은 사건들이 반드시 일어난다. 이 말 기억하지?”

“기억하지. 근데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들이 작은 사건이면, 대체 큰 사건의 규모는 어느 정도야?”

상상력을 펼치려다가 그만두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해졌으니까.

“비밀리에 모이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는 거면, 오히려 별일 아닐 수도 있어.”

“그랬으면 좋겠네.”

성도를 찾은 오크족 주술사, 한자리에 모인 마법사들, 그리고 지진.

동떨어진 단서들이 하나의 문제로 엮이지만 않는다면 좋을 텐데.

걱정을 담아 임시 거처를 바라볼 때였다. 율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는 건 정신력 낭비야. 그리고, 성도에는 총수님이 계시잖아. 6월 축제 때 봤지? 그 마나 폭발 말이야.”

“봤지, 코앞에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어.”

지난 6월.

왕성을 날려버린 그 폭발이 수만의 시민, 그리고 황제를 비롯한 제국의 주요 인사들의 코앞에서 일어났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에너지.

온몸을 전율케 한 마나 폭발 앞에서 밀레나는 단 하나만 떠올릴 수 있었다.

명백한 죽음.

작렬하는 마나의 불꽃이 시민을 덮치기 직전이었다.

총수의 검이 응축된 마나를 날려버렸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과정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밀레나가 두 눈으로 확인한 건 그을린 망토를 두르고 현장 중심에 서 있던 총수였으니까.

“제국의 수호자가 계시는데 뭐가 걱정이야. 안 그래?”

대책 없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정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네 말대로 총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근데 말이야, 총수님도 결국 사람이잖아. 그분이 안 계신 곳에서 일이 터진다면, 결국 우리 손으로 막아야 해.”

영웅은 위대하다.

그 위업에 기대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영웅은 신이 아니다.

모든 장소에 존재할 수 없다. 부재는 발생하고, 부재중에 생겨난 문제는 결국 다른 인간이 해결해야 한다.

“하긴, 영웅한테 모든 걸 맡겨 버린다면 국가의 존재 의미가 없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던 율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근데 말이야, 총수님… 지금 성도에 계시겠지?”

“글쎄.”

찝찝한 대화를 마무리하며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임시 거처를 바라봤다.

부디 큰 문제가 아니길.

* * *

일주일.

가하란은 달력에서 눈길을 떼고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카트시의 정신이 담겨 있는 그릇.

그 옆에 축 늘어져 있는 안구가 보인다.

“카트시.”

소리 내 불러봐도 대답이 없었다.

“내가 뭘 해야 할까. 뭘 해야 네가 일어날 수 있을까.”

집 전체가 심하게 흔들리던 그날, 카트시가 사라져 버렸다.

불러도 대답이 없고 유사 정령 이곳저곳을 만져도 반응이 없었다.

모노클을 끼고 봐도, 선의 세계를 들여다봐도 카트시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입체적으로 변해야 할 마력선은 평면에서 멈췄고, 마나를 끌어당겨야 할 마나포집 회로 역시 정지해 버렸다.

다른 마법 공학품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카트시만 잠에 빠져버렸다.

왜일까?

뭐가 문제였던 걸까?

“가하란.”

엔엔이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걸어왔다. 뒤돌아보니 큼지막한 컵이 보인다.

“물이에요. 좀 마셔요.”

“괜찮아요.”

“제가 안 괜찮아요. 얼른 마셔요. 여름이 끝나간다고 해도 아직 더우니 수분 섭취를 게을리하면 안 돼요. 특히나 어린 인간족은 신경을 더 써야 하고요.”

얼른요, 엔엔이 컵을 내밀었다.

가하란은 두 손으로 받아 물을 천천히 마셨다.

“엔엔 님. 왜 카트시가 다시 잠에 든 걸까요?”

“모르겠어요. 계속 알아보는 중이지만 일단 외적인 변화는 없어요. 마력 회로도 처음 발견했을 때와 다를 바 없고.”

엔엔이 유사 정령 위에 손을 올렸다.

“우리가 이해 못 한 마법 공학적 이유가 있는 거겠죠.”

“언제쯤 깨어날까요?”

“그것도 알 수 없어요. 미안해요, 모른다는 말만 해서.”

가하란은 도리질을 쳤다. 엔엔의 잘못이 아니었다.

“다른 곳에 보관된 유사 정령들을 확인해 봤어요. 하지만 카트시처럼 기능이 정지한 유사 정령은 없었죠. 아무래도 줄리어스가 개발한 마력선 짜맞춤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마력선 짜맞춤.

줄리어스가 만들어낸 입체적 마력선. 눈으로 보는 건 가능하지만, 구조를 이해한 건 아니었다.

짜맞춤의 모든 걸 깨닫게 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걸까?

“카트시.”

나직하게 이름을 부를 때였다.

-왜 그러시죠?

카트시가 말했다.

잘못 들은 건 아니었다. 유사 정령에 연결된 안구가 서서히 움직이더니 가하란 앞으로 왔다.

“카트시!”

환호성을 지르며 안구를 붙잡았다.

-가하란. 왜 갑자기 그래요?

“너 일주일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어.”

-네? 제가요?

“어. 아무리 불러도 일어나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다고.”

-잠깐만요. 자각연결성 좀 확인해 볼게요.

한동안 침묵하던 카트시가 다시 말을 꺼냈다.

-확인했어요. 단절이 발생했었네요. 일주일이라.

“갑자기 왜 그런 거야?”

-자가 진단 정보를 살핀 결과, 마나의 특정 파장이 제 회로를 건드렸어요. 치명적인 문제는 아니에요. 이렇게 복구가 가능한 정도니까.

“특정 파장이라니?”

엔엔이 옆에서 물었다.

-연결망 사용에 필요한 고유 파장에 과부하가 걸렸어요. 엄청난 수치가 제 몸을 관통한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마나 응축로가 폭발이라도 했나요?

“그런 일은 없었고, 대신 큰 지진이 있었어.”

-지진이요?

카트시의 안구가 가하란을 바라봤다.

-지진이라.

“왜?”

-지진 때문에 제 기능이 정지할 정도면 지표면 저 밑에 있는 뿌리가 문제라는 건데…….

카트시의 눈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주변 생태계에 변화는 없나요?

“생태계?”

가하란은 대답 대신 엔엔을 바라봤다.

“도시에 문제는 없어요. 지진 전후로 별다른 이상 징후도 없고요.”

-그렇다면 큰 문제는 아니네요. 아주 가끔 잔뿌리 형태가 아닌 뿌리 자체가 지면 위로 돌출되는 경우가 있는데,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평화로울 리 없겠죠.

“뿌리가 돌출된다니. 실제로 일어나면 재앙이란 말로도 부족한 사태에요.”

-그러니까요. 아무 일 없다고 했으니 큰 문제가 아니에요. 지진 때문에 뿌리 쪽 마나가 한순간 과다 방출됐고, 거기에 제가 휘말린 거겠죠.

“마나 농도가 짙어졌다는 보고는 없었는데요.”

-하지만 제 진단 정보에 의하면 마나 회로에 과부하가 걸린 건 사실…….

카트시가 도중에 말을 끊었다.

안구가 좌우로 움직였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을 때 카트시가 보이는 행동이었다.

-고유 파장에만 문제가 생긴 걸 보니 마나의 절대적인 양이 증가한 건 아니겠네요. 그렇다면 뿌리에 특정 영역대가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건데.

“특정 영역대가 반응했다?”

카트시와 엔엔, 둘 다 말을 멈췄다.

가하란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눈만 깜빡거리며 기다렸다.

“불가능해요.”

-네, 불가능하겠죠.

“마나의 원류인 뿌리에 간섭하다니. 바다는 건들 수 없어요. 이게 자명한 진실이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만, 혹시 모를 가능성을 생각해본 거죠.

눈치를 살피던 가하란이 조용히 질문했다.

“저기, 무슨 말이에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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