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9화
저 멀리서 새들이 날아올랐다. 이름 모를 금수들이 시끄럽게 울었다.
고요 속의 소란.
민은 주변을 경계하며 자세를 잡았다.
육중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던 땅이 점차 얌전해졌다.
“…끝난 건가?”
필렌이 허리를 펴며 말했다.
“일단은.”
무리 지어 날아올라 요란하게 울던 새들이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다. 숲은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이 침묵을 휘감았다.
“마나 파장도 사라졌어.”
민은 땅을 내려다보았다. 군데군데 균열이 간 대지. 갈라진 틈새 사이로 끝없는 어둠이 보인다.
“잔뿌리의 영향이었을까?”
“자연 발생이라면 다행이지만…….”
민은 타들어 간 옷자락을 내밀었다.
“방금 전까지 이곳에 사람이 있었어. 그건 확실해.”
“어디로 간 거지?”
신체술을 끌어올려도 기척이 잡히지 않는다. 지진이 일어난 직후 자리를 뜬 걸까?
“민.”
필렌이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침착한 음성이다.
불길하다. 민은 필렌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게 뭐로 보여?”
필렌 앞에 놓인 건…….
“누가 봐도 손이네. 사람 손.”
옷자락과 마찬가지로 검게 타들어 간 팔이었다. 필렌이 주인 없는 손목을 잡았다.
“그 옷의 주인인 거 같지?”
“그렇겠지. 상흔은 어때?”
“불에 탄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아니야. 단면이 깔끔해. 불에 그을리면 살점이 오그라들기 마련인데.”
필렌이 손목 단면을 보여줬다.
확실히 불에 탄 자국은 아니었다.
“불에 탄 게 아니면 이 검은 건…….”
필렌과 눈이 맞았다.
현상 하나가 떠올랐다. 필렌 역시 같은 걸 생각 중인 것 같았다.
“마나 폭발.”
민이 먼저 말을 꺼냈다.
“거병 응축로가 역류할 때 휩쓸리면 이렇게 변했지. 전선에서 몇 번 보기도 했고.”
“응축로 역류에 맞먹는 마나 폭발이 이곳에서 일어났고, 거기에 사람이 휩쓸렸다? 이 외진 곳에? 이 시간에?”
민은 조소를 머금었다.
“그럴 리 없지. 여기서 뭔가 이루어졌어.”
“지진하고도 연관이 있을까?”
“우연은 아니겠지. 정신 나간 마법사가 잔뿌리에 자기 몸을 던졌다면…….”
“고작 사람 하나의 목숨으로 이 정도 반응이 올까? 마나에 녹아 그냥 사라질 텐데.”
필렌이 손목을 이리저리 살필 때였다. 맹렬한 마나 파장이 일어났다.
진원지는 손목이었다.
“필렌!”
외치기도 전에 필렌은 손목을 던지고 있었다. 하늘 높이 뜬 손목이 옅은 보랏빛을 내며 녹아내렸다.
다행히 폭발은 없었다.
“뭐, 뭐야.”
산전수전 다 겪은 필렌도 시체에서 마나 반응이 일어나는 건 처음 봤는지, 상당히 놀란 표정이다.
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괜찮아?”
“어. 이상은 없어. 신체술도 제대로 사용 중이고.”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쉰 뒤 땅에 떨어진 점액으로 걸어갔다. 피부, 근육, 혈액, 뼈. 그 모든 게 녹아내려 땅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놈하고 똑같아.”
“그놈?”
민은 성도에 도착하자마자 만났던 살인귀, 실더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놈도 저렇게 녹아내렸어?”
“저 정도로 녹은 건 아니지만, 인간의 형태를 완전히 잃었지.”
“성도 테러 때 나타난 놈들도 비슷했고?”
“어.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놈들.”
민은 눈을 찌푸렸다.
성도 테러범들이 국경지대, 그것도 주요 시설조차 하나 없는 숲속에서 목숨을 내던졌다.
“길리우드라고 했지? 테러 주범 말이야.”
“황가에서 공식으로 발표한 이름이긴 한데, 신빙성은 없어. 상부층만 아는 이름이 툭 튀어나왔으니까.”
“만약 그놈이 실존하고 여기서 뭔가를 준비 중이라면?”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서?”
늦여름의 끈적한 바람이 불어왔다. 시체는 있으나 전말은 알 수 없다.
그림자조차 잡아내지 못한 사건.
전조일지, 아니면 단순한 사고일지.
민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쥐고 있던 옷자락이 모래처럼 잘게 부서져 바람에 흩어졌다.
작은 조각이라도 건져보려고 손을 휘저었으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부스러진 조각들이 이내 대기 속으로 사라졌다.
“며칠 더 머물다가 돌아가려 했는데, 아무래도 바로 짐을 싸야 할 것 같아.”
“윗선에 알리게?”
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프닝일 수도 있어. 정말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일어난 사고일 수도 있고. 하지만 아닐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대대적인 조사를 해봐야 해. 성도를 덮쳤던 그놈들, 성도가 아닌 일반 민가에서 튀어나왔다면 사상자는…….”
뒷말은 굳이 내뱉지 않았다.
멧시언의 말대로 입은 재앙을 불러오는 문이니까.
“날 밝는 대로 내가 주변을 수색해볼게.”
필렌이 말했다. 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개인 행동 하지 마. 실더 정도의 괴물이 튀어나온다면, 너 혼자서 감당 못 해.”
“그 정도야?”
“나도 타린족의 도움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거야.”
필렌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거병을 타고 들쑤실 수도 없고. 일단 덴스와 얘기해볼게. 이곳 총책임자이기도 하니까.”
“되도록 몸 사려. 격납고가 적에게 노출되는 건 위험해.”
주변을 다시 살핀 후 격납고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전부 밖에 나와 있었다.
지진 때문인 것 같았다.
“두 분이 사라져서 무슨 일인가 했습니다.”
덴스가 다가와 말했다. 민은 필렌에게 얘기를 들으라고 말한 뒤 멧시언에게 걸어갔다.
“소장님.”
“무슨 일입니까?”
“일이 생겼습니다.”
“급한 용무인 것 같군요. 방금 일어난 지진과 연관이 있는 겁니까?”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기에 보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멧시언이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 다음 펜과 메모지를 준비했다.
“위급한 상황인 만큼 폐하께서도 용인해주실 테죠.”
글씨를 휘갈긴 다음 메모지를 반으로 접었다. 민은 건네받은 메모지를 품에 넣었다.
“폐하의 바람대로 통합연구진이 구성될 거라고 전하면 됩니다. 나는 내일 이곳에서 사람을 추려 후발대로 갈 테니, 민 교수는 최대한 빨리 성도로 가보세요.”
“감사합니다, 소장님.”
필렌이 다가왔다.
“여기는 걱정 마. 내가 최대한 알아볼 테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독단적인 행동 하지 마. 덴스 교수의 말 따르고.”
“알겠어.”
필렌이 다가와 살며시 안아주었다.
“조심해서 가.”
“너도 다치지 마.”
“아, 그리고 성도에 있을 내 딸을 만나면 이 말도 전해줘.”
필렌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건강이 최고라고.”
민은 옅게 웃은 후 말에 올라탔다. 격납고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고삐를 튕겼다.
말이 밤공기를 가르며 나아간다.
녹아내린 시체와 마나 파장, 그리고 지진.
불길한 단서들이 그저 우연의 산물이길, 민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한 숲길을 달리며 기도했다.
* * *
유단은 엉망이 된 연구 자료실을 훑었다.
지난밤, 강도 높은 지진이 둔을 때렸다. 도시 전체가 놀랐다. 늦은 시간에 사람들이 전부 길가로 쏟아져 나올 정도였다.
덴스의 딸, 프레나는 무섭다며 새벽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유단 역시 프레나를 달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어리고 연약한 인간.
훌쩍이다가 잠든 프레나를 지켜보고 있을 때 덴스의 아내가 옆에 와서 조용히 말했다.
“프레나가 널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아.”
어젯밤 들은 그 말이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맴돌았다.
연구 자료실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그 말이 계속 떠올랐다.
의지한다.
“손대기 꺼려질 정도로 불안한 존재.”
유단은 떨어진 책을 주워 책장에 꽂아 넣었다.
인간만큼 나약하게 태어나는 생명체가 또 있을까.
모체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다른 동물들 역시 탄생의 순간만큼은 연약하지만, 약간의 시간만 주어지면 대부분의 운동 기능을 확보하며 성체와 다를 바 없는 움직임을 보인다.
하지만 인간은 어떠한가?
눈을 제대로 뜨는 것도, 두 발로 서는 것도, 의사소통을 하는 것도 기이할 정도로 느리다.
느리기에 의지할 대상이 필요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한다면, 그토록 느리기에 서로를 보호할 수단을 강구했고, 이른바 사회가 탄생한 것이리라.
느린 걸 강점 삼아 영리하게 집단을 구축했다.
인간.
이제는 기계 몸에서 벗어난 나 역시 그 무리에 속해버렸다.
줄리어스를 만나기까지, 인간의 법칙과 인간의 습성을 온전히 익혀야 한다.
여태까지 실수 없이 잘해왔다.
육체의 기억을 토대로 잘 적응해왔고, 사회에 쉽게 녹아들 수 있도록 약간의 진실성도 내보였다.
구조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고, 모든 게 수월했다.
그런데 왜.
의지한다는 그 말이, 곁에서 잠든 프레나의 얼굴이 머리를, 아니, 온몸을 뒤흔드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다.
인상적인 사건도 아니었다.
책장 정리를 끝내고 맞은편 선반으로 걸어갈 때였다. 유리창에 비친 얼굴이 보였다.
손을 들어 올려 볼을 매만졌다.
미소.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난 그 말이 좋았던 건가?”
덴스의 아내와 딸.
몸의 주인이었던 유단은 그들을 그저 부산물로 보았다. 빼앗아야 할 재산 목록쯤으로 생각했다.
나는 어떤가?
지금 나에게 그들은 어떠한 의미인가?
관계.
유단이 아닌 ‘로키’에게 있어 그들은 무엇인가. 줄리어스를 향한 벅찬 마음 한 귀퉁이에 그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변화는 좋은 징조인가, 해로운 싹인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유단.”
탄드라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단은 비틀어진 액자 끝을 잡아 똑바르게 정리한 후 외쳤다.
“교수님, 저 여기 있습니다.”
* * *
지진이 발생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여진이 밀려올 수 있다는 예측과는 다르게 지난 일주일간 성도는 평안했다.
며칠간 텅 비었던 아고라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시장도 활성화됐고.
“또 뭔 일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별일 없이 끝났네.”
율이 꼬치를 입에 물며 말했다. 우물우물 씹으면서 말하는데 발음이 안 뭉개진다.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밀레나는 고기를 씹어 삼킨 후에 입을 열었다.
“이상한 괴물과 마주하는 것보단 땅이 흔들리는 게 낫긴 해.”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각자 거대한 팻말을 들고 다녔는데, 거기엔 시의회 첫 안건에 관한 의견이 적혀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시의회가 빠르게 구성되고 있었다.
황가와 의회, 양쪽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덕이다.
“빈센달, 진짜 황제 쪽 사람인가?”
“그건 알 수 없지. 하지만 확실한 건 황가와 의회가 빈센달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시의회 결성을 서두르는 거고. 시의회가 시작되면 시민들의 울분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으니까.”
율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율.”
“응?”
“민 교수님, 여전히 어디 계신지 모르지?”
“어. 아는 분들을 통해서 정보 좀 얻어보려 했는데, 아는 사람이 없어.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서 직접 뭔가를 지시하신 거 같아.”
“우린 언제까지 이렇게 어중간하게 있어야 할까? 이럴 거면 차라리 스콜라로 돌아가 훈련을 받는 게 낫겠어.”
“긴 휴가라고 생각해. 좋잖아? 느긋하게 생활하는 거.”
“하나도 안 좋아.”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대고 멀거니 하늘을 올려다볼 때였다. 율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밀레나! 저기, 저기! 아낙스 님이야.”
“누구?”
“마스터 아낙스.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라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