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8화
필렌이 눈동자를 슬그머니 굴려 바닥을 본다.
“인정할게. 방금 건 실언이었어. 미안.”
“그래도 나이를 먹긴 먹었네. 미안하단 말도 하고.”
“안 하면 민이 날 죽일 테니까.”
“눈치도 좋아졌고.”
민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다음 입을 열었다.
“네 딸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걔, 정말 널 닮았더라.”
밀레나 얘기가 나오자마자 필렌이 달라붙었다.
“밀레나를 만났어?”
“스콜라에서 둔으로 연수 보내잖아, 거병 관련해서. 기사를 목표로 찾아왔더라.”
“그래? 그렇단 말이지.”
필렌이 무릎을 끌어당겨 두 팔로 안았다. 거병의 발끝에 아슬아슬 걸터앉아 있는데,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그 모습이 필렌과 잘 어울린다.
앞뒤로 기우뚱거리던 필렌이 고개를 돌렸다.
“어땠어? 내 딸은.”
“너 닮았다니까.”
“날 닮았다는 건 두 가지 의미야. 지금의 나야? 아니면 과거의 나?”
“어느 쪽을 원해?”
“음, 양쪽을 적당히 섞어 닮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 아예 닮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
민은 뚝심 있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밀레나를 떠올렸다.
“솔직히 말하면 너보다 더 고집 있어 보여.”
“그래? 그건 반가운 소리네.”
“좋아할 일 아니야. 뭐든 적당한 게 세상 살기 편한 법이잖아.”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이야. 자기 멋대로 안 살면 대체 무슨 낙이 있겠어?”
“그래, 그 교육관을 아주 잘 이어받은 거 같더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거병 기사가 되겠다고, 네 등을 쫓는 게 1차 목표라고 했어.”
“날 쫓아?”
필렌이 풋 웃더니 코를 살짝 찡긋거렸다.
“어림없지. 아른고개의 푸른 기사는 절대로 따라잡히지 않아. 날 붙잡을 수 있는 건, 그래, 그이뿐이야.”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다.”
민은 필렌의 남편을 떠올렸다.
동글동글하게 생긴 남자.
가문도, 개인의 능력도 무엇 하나 필렌을 능가하는 게 없는 평이했던 남자, 벤.
필렌은 벤과 만난 이후로 바뀌었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말을 어릴 땐 믿었는데, 필렌을 만나고 나서 생각을 바꿨다.
사람은 바뀔 수 있다.
사람을 통해서.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남자, 지금도 많지 않아?”
민은 뒤로 누우며 말했다. 차가운 쇠가 옷 너머로 느껴진다.
“내가 아니라 엔첸세겠지.”
“엔첸세가 너니까 그게 그거야. 어때? 재혼 생각 없어?”
“벤이 떠나고 나서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어. 내가 못 채워주는 무언가가 있고, 그걸 위해서 다른 누군가를 데려와야 하나.”
“표현하고는.”
필렌이 앓는 소리를 내며 옆에 누웠다. 당연하다는 듯이 오른팔을 가져가 베개로 삼는다. 질색하며 빼려 했지만, 악력이 장난 아니다. 결국 한숨과 함께 포기했다.
“근데 필요 없겠더라고. 그 애는 혼자서도 척척 알아서 했으니까. 생각해보면 날 하나도 안 닮았네? 내 딸은 우리 남편을 닮았어.”
“솔직히 말하면 너희 남편, 난 좋게 보지 않았어.”
“다들 그러더라.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배경도 없는 남자와 결혼하냐고.”
엔첸세의 위상을 드높이고 제국 제일가는 거병 기사로 칭송받던 필렌이, 벤과 결혼을 발표했을 때 사교계는 난리도 아니었다.
벤은 풋내 나는 사랑의 과정이며, 결국 귀족 가문과 이어질 거라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둘은 결혼해 버렸다.
“네 저택에 찾아갔던 날, 그날 봤던 벤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나.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지둥, 자기가 만든 요리라며 멀겋게 웃다가 다시 침묵. 패기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
“야. 우리 남편한테 사과해. 남편의 영혼이 지금 다 듣고 있어. 그 사람 쉽게 상처받는다고.”
장난스럽게 말하던 필렌이 숨을 작게 토해냈다.
“벤이 부끄럼을 많이 탔던 건 사실이야. 모르는 사람 앞에서 말수가 적어지고, 낯선 곳에 가면 얼어붙고.”
“대체 어디가 좋았던 건데?”
“그렇게 겁이 많은 사람이, 내가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으니까 이렇게 말하더라.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같이 맞아줄 수는 있어’, 라고.”
민은 헛웃음을 지었다.
“같이 맞아주는 건 또 뭐야?”
“그 사람다운 표현이야. 다른 멋진 말을 하고 싶었겠지. 근데 그렇게 튀어나온 걸 어떻게 하겠어.”
“그래서, 그 말이 좋았어?”
“어! 지금의 필렌 엔첸세의 절반은 그 말로 이루어져 있어. 아니, 절반 이상이지.”
필렌이 생기 가득한 눈으로 민을 바라봤다.
“내 얘긴 여기까지 하고, 넌 어때?”
“뭐가?”
“단장 말이야.”
눈에 힘을 주고 필렌을 노려봤지만 별 소용 없었다. 민은 시선을 천장으로 돌리며 말했다.
“얘기할 게 뭐 있나. 그냥 그렇게 된 거지.”
“안 좋게 헤어진 건 아니잖아. 예전에 둘이 같이 있는 거 봤을 때 나는 느꼈어. 이 둘, 제법 괜찮은 짝이라고.”
“괜찮아? 그 인간하고 내가?”
반박하려고 입을 살짝 열었지만 단어 몇 개가 안쪽에서 맴돌 뿐,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괜찮은 짝.
그래, 부정할 필요는 없겠지.
“네 말대로 나쁘진 않았어.”
“좋아 보였는데.”
“그래. 꽤 좋았어. 됐지?”
대화 주제를 옮기고 싶었지만, 필렌이 놓아주지 않았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물어보겠어. 대체 왜 헤어진 거야? 난 둘이 결혼할 거라 생각했는데.”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야. 10년도 더 지나서 이젠 이유도 기억 안 나.”
“거짓말.”
필렌이 상체를 세웠다.
“민 크알데가 자기한테 일어난 일을 잊는다고? 난 그 말 절대 안 믿어. 아니, 못 믿어. 그러니까 빨리 말해봐. 왜 이별한 거야?”
“마흔 넘으면 기억력이 안 좋아져. 너도 내 나이 되면 알 수 있어.”
“아닐걸? 민은 머리에 눈이 내리고 눈이 침침해져도 기억력 하나만큼은 변하지 않을 거야.”
“집요해.”
“알면 그만 무시하고 말해주지? 내 남편 욕을 한 대가라고 생각하고.”
생글생글 웃는 모습을 보니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한번 마음먹은 필렌은 뜻한 바를 이루기 전까지 물러서지 않는다. 얼렁뚱땅 넘기면 내일 또 찾아와 집요하게 캐물을 것이다.
벗어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다 털어놓는 것이다.
“부부라면 공통된 목표가 있어야 하잖아?”
“목표라.”
“권력 증대, 재산 증식 혹은 대를 잇는 거. 뭐, 거창한 게 아니라 사소한 거라도 있어야 하잖아?”
“있으면 좋지.”
“나와 그 인간 사이에는 그런 게 없었어.”
필렌이 뚱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만나서 행복해지는 거, 이거면 되는 거 아니야?”
“만나서 행복해진다.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네. 너한테 어울리는 말이야. 근데 나한테는 아니야.”
민은 과거를 되짚으며 말했다.
“같이 있으면 즐겁긴 했지. 안 좋은 기억도 있지만, 행복했던 순간도 많아. 근데 말이야, 그 인간하고 결혼이란 제도 아래 하나로 묶인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이상한 거야.”
“뭐가?”
“말했잖아. 공통된 목표가 없다고. 그 인간하고 결혼해야 할 이유가 마땅히 없었어.”
“듣기만 해도 팍팍해. 단장도 같은 생각이었어?”
민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아마 그럴걸?”
“그럴걸? 제대로 얘기해본 적도 없어?”
“나는 나대로, 그 인간은 그 인간대로 자기 할 일이 바빴으니까. 만나서 얘기하는 건 즐거웠지만, 자고 일어나면 사라져 있었지.”
“그건 너무한데.”
“근데 남 말할 처지는 못 돼. 나도 그랬으니까.”
필렌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볕 드는 침대에 같이 앉아 별거 아닌 얘기를 나눠본 적 있어?”
“글쎄.”
“잠자리 갖기 전에는? 아니, 그 직후에는?”
“그 인간 말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나도 말수가 적은 편은 아니고. 그래서 침대 위에선 서로 닥치고 몸에만 집중하기로 약속했지.”
“건조하다, 건조해.”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 할 얘기는 낮에 다 했으니까.”
필렌이 하, 메마른 웃음소리를 냈다.
“낮에 나눴다는 그 얘기 중에 서로에 관한 얘기가 있었어? 뭐가 마음에 든다, 뭐가 좋다, 뭐가 싫다.”
“없었을걸?”
“그럼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눈 거야?”
“밖으로 새어 나가면 조금 위험해지는 것들?”
“설마 감찰단 일을…….”
“노코멘트.”
“설마 거병 개발 쪽 얘기를…….”
“그것도 노코멘트.”
민은 목덜미를 매만지며 필렌의 시선을 피했다.
“언니. 그냥 단장하고 다시 만나서 결혼하지 말고 붙어 살아. 그게 가장 좋을 거 같아.”
“그 입에서 언니란 단어가 튀어나오니까 왜 이렇게 징그럽냐.”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가죽 주머니에 든 술도 다 마셨겠다, 슬슬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다.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 한 번도 한 적 없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근데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데 어쩌겠어.”
“그럴 수 없다니?”
“그 인간, 사람보다 사건을 사랑해. 아니, 사건이 그 인간을 징그럽게 좋아해. 안착, 정착. 그런 말과 어울리지 않는 남자야. 분명 지금도 기괴한 일에 휘말려 이상한 곳을 헤매고 있겠지.”
“그래서 싫은 거구나.”
필렌이 말했다.
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필렌을 바라봤다.
“아닌데.”
“아니야?”
“오도카니 있는 인간은 매력 없어. 불나방처럼 자기 몸 던지는 그 모습, 난 멋있다고 생각해.”
“아니! 그러면 다시 만나라니까.”
“안 그래도 이번에 얼굴 봤어. 여전하더라.”
“뭐야? 진짜 다시 만나는 거야?”
“얼굴만 봤다니까. 그걸로 끝.”
가죽 주머니를 흔들며 격납고 밖으로 나왔다. 뒤따라온 필렌이 팔을 붙들며 말했다.
“아직 마음 있는 거잖아.”
“없지는 않지.”
“단장은?”
“그쪽도 마찬가지일 테고.”
“근데 왜?”
“필렌.”
민은 이해할 수 없다는 필렌을 보며 말했다.
“너와 벤 같은 사이가 있다면, 나와 그 인간 같은 사이도 있는 거야. 너처럼 다 불태워야 만족하는 관계가 있으면, 나처럼 뜨뜻미지근해도 좋은 관계가 있는 거고.”
“뜨뜻미지근한 사랑은 어떻게 생겨먹은 거야?”
“이렇게.”
민은 손가락으로 얼굴을 가리키며 살며시 웃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대꾸할 게 없네. 그리고 나름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말이야, 나중에 단장이 다른 사람하고 결혼한다고 하면 슬프지 않겠어?”
다른 사람과 결혼이라.
“하게 되면 축하 선물 정돈 보내 줘야겠네.”
“됐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필렌이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그 뒤를 따라갈 때였다.
드드드, 발밑에서 진동이 올라왔다.
그리고 희미하게 마나 파장이 느껴졌다.
격납고에서 일어난 게 아니었다.
네일 강 상류 쪽.
“필렌, 너도 느꼈지?”
“어.”
대화를 주고받을 때 다시금 마나 파장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강도가 조금 더 세다.
기이한 일이었다.
자연 상태의 마나가 이유 모를 원인으로 힘을 방출하는 경우가 있지만, 대개 단발성으로 끝난다.
파장이 일정 간격을 두고 연달아 일어날 확률은…….
그때, 세 번째 파장이 몸을 스쳐 갔다.
필렌이 먼저 움직였다. 민도 뒤따라가며 말했다.
“잔뿌리일까?”
“모르겠어. 하지만 그냥 넘길 일은 아닌 거 같아.”
파장의 간격이 점점 짧아진다.
몸에 가해지는 부담도 조금씩 늘어났다. 마나에 친숙한 자가 아니면 심한 어지럼증을 느낄 정도.
“저긴 거 같은데?”
파장의 진원지에 도착했다.
어둠에 잠긴 숲.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생명의 기척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필렌, 여기.”
민은 몸을 숙여 땅바닥을 보았다.
옷자락이었다. 불에 그을린 것처럼 끝이 검게 변해 있었다.
온기가 남아 있다.
조금 전까지 이곳에 옷의 주인이 있었다.
“어디로 간 거지?”
“모르겠어.”
민이 옷자락을 손에 쥘 때였다.
발밑이 심하게 흔들렸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지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