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7화
국경지대 볼로스.
산림을 끼고 흐르는 거대한 네일 강과 맞닿아 있는 도시.
도시라 칭하며 하나의 구역으로 묶어놨지만, 실상 수십 개의 마을이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지역.
연합왕국과 강 하나를 끼고 마주 보는 곳이라 몇 년 전만 해도 난리통이었지만, 지금은 양국의 상인들이 밀집해 있어 다른 의미로 번잡스러워진 장소였다.
민은 버려진 전초기지와 그 옆에 줄지어 서 있는 짐마차를 보며 말했다.
“돈 냄새가 무섭긴 하네요. 이리도 많은 사람이 몰려 있을 줄은.”
“다들 살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거죠. 우리도 마찬가지고.”
옆에서 나란히 말을 타고 있던 멧시언이 한마디 툭 던졌다.
민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을까?
황제의 부름을 받고 올해 초 성도로 갔을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은 예측하지도 못했다.
성도에 도착하자마자 만난 괴이한 살인마, 3월 테러에 이은 4월 테러, 거기에 6월 시민 궐기와 총수의 복귀.
그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다른 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다.
“거병 소형화. 결국 황제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걸까요?”
“황제도 어느 정도 예측은 했을 겁니다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죠.”
“역시 모든 문제는 소통에서 발생하네요.”
“입은 재앙을 불러오는 문이라고 하나, 때로는 침묵이 파국을 끌어내기도 하죠. 알렝 경도, 황제도, 그리고 우리도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눴어야 했어요.”
민은 멧시언을 바라봤다.
행정2국 알렝 바르베 국장.
대체 그는 어떤 인간이었던 걸까?
시민 측에 서서 시민의 권리를 주창하던 행정가?
아니면 성도의 심장을 날려버린 희대의 테러범?
그것도 아니면 국가의 관리 감독을 받아야 하는 거병 제작을 몰래 주도해온 기괴한 이상가?
“소장님. 알렝 국장은 왜 그렇게 가버린 걸까요?”
“…그의 부고를 접하고 며칠 동안 생각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국장의 죽음 자체가 의문이었거든요.”
“유언이 나오긴 했지만, 그 급진적인 행동은 아직도 이해가 되질 않아요.”
“나도 그렇습니다. 왜 그렇게 가버린 걸까. 국장은 해야 할 일이 많았어요. 너무나도 많았어요. 그렇게 가선 안 될 사람이었어요.”
멧시언이 아랫입술을 끌어 올렸다. 세월을 고스란히 담아낸 주름들이 한층 더 깊어진다.
“책임감을 모르는 인간이었다면 이해했을 겁니다. 야욕이 깊은 인간이었다면 그나마 납득이라도 가죠. 국장은 쉬이 죽을 인간이 아니었어요. 자신이 벌여놓은 일들을 수습하지도 않고 모든 걸 포기할 정도로 저능하지도 않았죠.”
“그런 분이 왜 갑자기…….”
멧시언이 민을 바라봤다. 처연한 눈웃음이 맺혀 있었다.
“그걸 알아내는 건 우리의 일이 아닐 겁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건 산재한 문제를 수습해 정리하는 거죠. 망자의 사연은 한가로울 때 생각해보죠.”
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국장이 변심한 이유를 알아내는 것도 분명 중요했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 닥친 사건보다 급한 건 아니었다.
살아 있는 자는 살아 있는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멧시언을 따라 숲길로 들어섰다.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 격납고가 있는 건가요?”
“위치 선정할 때 꽤 고민했죠. 물자를 받아야 하니 너무 외진 곳은 안 되고, 그렇다고 발각되면 곤란하니 인적이 드물어야 하고.”
미개척지로 분류된 곳과 밀접한 장소.
인근에 식생 중인 나무도 사용 가치가 없고, 초식 동물의 이동 경로에서도 벗어나 사람이 찾을 리 없는 곳이었다.
“절묘하네요. 마수만 안 나타나면 말이죠.”
“격납고가 위치한 곳까지 마수가 내려온 경우는 없었어요. 조우한다고 해도 황가나 의회에 발각되는 것보다 덜 위험하고.”
인간보다 마수가 덜 위험하다.
웃지 못할 농담이었다.
10여 분 정도 이동했을 때였다.
잠복 중인 남자를 발견했다. 나무 위에 있었는데 훈련을 잘 받은 자였다.
신경 쓰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
“보안 팀입니다. 격납고 쪽에 소식이 전해지겠군요.”
멧시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인원이 몇이나 되죠?”
“개발 및 제조 인력은 40명 정도 됩니다. 나머지 보안과 지원을 담당하는 팀이 60명 정도 되고요.”
“100명이라. 규모가 크네요.”
“격납고 주변에 상시 주둔하는 인원은 60명 남짓입니다. 아, 지금은 달라졌겠군요. 상황이 변했으니.”
다시 5분 정도 이동했을 때였다.
울창한 숲 사이로 우뚝 솟아 있는 격납고가 보였다. 양옆에 층이 낮은 건물이 붙어 있는데 연구실이나 숙소로 보인다.
알렝 국장이 주도한 프로젝트.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소.
말에서 내려 격납고를 향해 걸어갈 때였다.
“민!”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은 안경을 고쳐 쓰고 앞에서 달려오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반갑지 않은 친구가 있네요.”
“아, 저분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못했군요.”
못 한 걸까, 안 한 걸까.
얄궂게 웃는 소장의 얼굴을 보니 일부러 말 안 한 것 같다.
힘차게 달려온 필렌이 양팔을 벌렸다. 그대로 껴안을 생각인 것 같았다.
민은 등에 차고 있던 도끼를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코앞에서 멈춰 선 필렌이 빙긋 웃더니 그대로 뛰어올랐다.
공중에서 반 바퀴 돌아 뒤쪽에 떨어진 필렌이 방긋 웃으며 민을 안았다.
“여긴 어쩐 일이야?”
“너 보려고 온 건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
“알아. 그래도 좋네. 오랜만에 얼굴 봐서.”
민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필렌이 어깨에 턱을 올렸다.
“오늘 하루 동안?”
“도끼로 머리 찍어버리기 전에 얼른 팔 풀어.”
“내가 좀 더 빠를걸?”
두통이 몰려온다. 마음 같아서는 도낏자루로 흠씬 때려주고 싶다.
필렌이 조금만 느렸더라도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됐을 것이다.
얄미운 다람쥐 같은 애.
손을 들어 어깨에 얹힌 필렌의 뺨을 툭툭 쳤다.
“애 엄마가 됐으면 채신머리를 챙겨야지. 아니, 그 전에 엔첸세라면 격식을 갖춰야 하고.”
“그렇게 살 거였으면 예전에 바꿨겠지. 알잖아?”
그래, 필렌 엔첸세는 이런 애였지.
다시 한번 긴 한숨.
멧시언이 눈웃음을 그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해후의 기쁨은 나중에 풀고, 일단은 상황을 정리합시다.”
매달려 있는 필렌과 함께 멧시언의 뒤를 따랐다. 덴스와 올란트, 그 외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민 교수님께서 왜 이곳에…….”
올란트가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내 처지를 걱정하는 건 당연히 아니겠고, 민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일이 좀 복잡하게 됐어요. 부탁받은 대로 가하란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지만… 아니죠. 이건 변명에 불과하네요. 미안해요. 약속을 어기게 됐네요.”
“사정이란 게 있겠죠. 가하란은 괜찮은 건가요?”
“오는 길에 둔에 들러 가하란의 상태를 확인해 봤어요. 아시다시피 주변에 괜찮은 이웃이 많아 잘 지내고 있어요. 최근에는 엔엔 님과 밀리언 씨, 두 분과 자주 붙어 다니고 있고요.”
“엔엔 님은 이해가 되는데 밀리언 씨라면…….”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올란트였다.
“자세한 사정은 저도 모르겠네요. 특무대령님을 통해 가까워진 것 같기도 하고.”
“그렇군요.”
“사실 붙임성이 워낙 좋아 누구와 친해진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죠.”
그 말에 올란트가 작게 웃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정리해야 할 게 아주 많은 것 같으니.”
덴스가 격납고 옆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 * *
“조약돌.”
부엉이 우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늦은 밤.
민은 격납고 안에서 소형 거병과 마주했다.
실물로 보니 더 작아 보인다.
11미터의 전략 병기에게 작다는 표현이 어울리는지 잠깐 고민했으나, 기존의 거병과 비교하면 어쨌든 작으니까.
“뛰어난 애야.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줘. 블루아이도 얘만큼 민첩하진 못해.”
뒤따라온 필렌이 옆에 서며 말했다.
“블루아이보다 뛰어난 점이 있는 거병이라.”
“한번 타볼래?”
“됐어.”
민은 거병 발에 걸터앉았다. 활짝 열린 격납고 셔터 바깥으로 얇은 초승달이 보인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황제도 소형화를 준비 중이었다니. 아니지, 그쪽도 시험기가 나왔으니 개발 단계라고 해야 하나.”
필렌이 말했다.
낮에 있었던 회의를 통해 정리된 사실이 몇 개 있었다.
첫 번째. 소형 거병은 알렝뿐만 아니라 아르드헨도 개발 중이었다.
두 번째. 양측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황제의 명을 받아 성도로 불려간 것도 거병 소형화 및 경량화에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다.
“거병관리국을 통해서는 소형화 계획이 전혀 없다고 했는데, 안쪽에서는 착실하게 준비 중이었네.”
필렌이 헛웃음을 지었다.
“성도 관리국 개발 팀에 인사이동이 있었잖아. 신흥 귀족과 황가 쪽 인물로.”
“그때부터 황제가 손을 댄 거야?”
“개발 자체는 오래전에 시작했어. 내가 성도에 도착했을 때 거의 완성된 시험기가 있었으니까. 물론 조약돌과는 방향성이 조금 달랐지. 그쪽은 경량화를 우선하고 소형화를 다음 단계로 잡았으니까.”
“그 시험기를 타고 허스가 군중 사이로 나타났다, 이거지? 그림이 그려지네. 그 녀석, 또 신성시되겠어. 이러다가 정말 황제가 되는 거 아니야?”
“……네가 허스 경과 친분이 있다는 사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뭐가 안타까워.”
“허스 경이. 이런 골칫덩이랑 친우라는 것부터가 문제지.”
필렌이 어깨를 으쓱거리다가 멀리 뜬 달을 바라봤다.
“어쨌든 한시름 덜었네.”
“황제가 이쪽 인력을 흡수하는 형태로 마무리 짓는다니까, 일단은 잘 해결된 거지. 적어도 죽는 사람은 없잖아?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처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거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황가에 반기를 든 알렝 국장의 유산이, 결국 황가 손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다니. 나야 본래의 개발 목적대로 거병을 써준다면 반대할 마음은 없지만.”
시선이 따끔거린다. 말을 끝낸 필렌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민이 되물었다.
“황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그 속을 누가 알겠어. 시민을 위한 학교를 추진하더니, 이젠 시의회까지 발족했어. 누구보다 권력을 탐내는 인간일 텐데, 대체 뭘 원하는 건지.”
“시의회 초대 대표로 오른 빈센달. 황가와 의회가 길러낸 개라던데, 어때?”
“말이 많긴 해. 하지만 말 잘 듣는 개로 길러졌다고 한들, 시의회가 제대로 기능하기 시작하면 목줄을 풀고 이를 드러내겠지. 제대로 기능한다면 말이야.”
“역시, 예나 지금이나 정치권 얘긴 듣기만 해도 신물이 나.”
눈앞에 가죽 주머니가 드리워졌다. 필렌이 받으라며 주머니를 흔들었다.
받아서 주둥이에 코를 가져다 댔다. 달콤한 주향이 올라온다.
“회의 안 끝났을 텐데.”
“너나 나나 그다지 중요한 사람은 아니잖아.”
“그렇긴 하네.”
술을 한 모금 마셨다.
“필렌.”
“응?”
“이러니저러니 해도 성도 분위기는 심상치 않아. 계급 철폐 얘기도 계속 올라오고 있고. 아고라라고 해서 시민들의 집결 장소도 생겼어. 이번 일은 분명 제국을 바꿔놓을 거야.”
“그렇겠지.”
“괜찮겠어? 너도 1급, 1등 귀족이잖아. 여기저기 치일 텐데.”
“지켜보다가 귀족 타이틀 때문에 문제 될 것 같으면 내려놓으려고.”
“엔첸세의 이름을?”
“편하려고 받은 이름이야. 내 딸의 자유를 위해 필요했던 이름이기도 하고. 근데 그게 억압의 단초가 된다면, 난 필요 없어.”
“…다들 너 같으면 세상이 이리 꼬일 일도 없었을 텐데.”
“칭찬이야?”
민은 싱긋 웃는 필렌의 얼굴을 보며 인상을 썼다.
“욕이야.”
“까칠하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네. 그러니까 칼리고 단장하고…….”
민은 등 뒤로 손을 가져갔다.
아쉽게도 도끼가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