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6화
체임버가 열리고 그물 사다리가 내려왔다. 고개를 밖으로 내민 필렌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8미터 상공에서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사뿐하게 지면에 안착한 필렌이 옷 주름을 툭툭 치며 다가왔다.
“사다리 제거할까요?”
덴스는 웃으면서 말했다.
“써전들 올라갈 때 써야 하잖아. 그보다 오늘 컨디션 너무 좋은데? 조약돌이 이 정도 퍼포먼스를 낸 적이 있었나?”
필렌이 거병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수치 안정화가 이뤄졌어요. 미세 조정도 거의 다 끝나가니 곧 완성될 겁니다.”
“미완성에 이 정도라. 블루아이에 이 시스템을 적용할 수 있을까?”
덴스는 잠깐 고민했다.
조약돌은 경량화와 소형화를 마친 거병이었다. 전고 11미터. 기반 시스템이야 기존 거병의 것과 다를 바 없지만, 그 위에 쌓아 올린 레이어들은 기존의 것들과 성질이 달랐다.
“봐야 알겠지만 당장은 어렵겠죠. 블루아이의 오토마타 역시 뜯어고쳐야 하고, 액상근육 파이프 역시 전부 갈아 끼워야 하니까요.”
“날 잡고 오버홀 해도 어렵다는 거네.”
“블루아이는 특별하니까요. 조약돌처럼 블루아이 하나를 위해 적용된 기술들이 많아요. 거기에 필렌 님께 맞춰진 것들도 있고.”
너무나도 잘 만들어서 손대기 어려운 작품. 그게 블루아이다.
“11미터. 기존 라인과 비교하면 작아지긴 했지만, 이보다 더 작게 만드는 게 목표겠지?”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이 프로젝트가 무사히 진행된다면 크기가 계속 줄어들겠죠. 소형화될수록 범용성이 확보되니.”
“미개척지 개간이 끝나면 거병의 대량 생산도 가능해지려나?”
“언젠가는 되겠죠. 올란트가 발견해낸 회로를 개선해 효율을 더 높이고, 탈로스의 재료를 구하기 쉬운 금속으로 대체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니까요. 강도나 경도는 중량을 줄이면 어느 정도 해결될 거고.”
“전투라는 특수한 상황을 배제한다면 내구성 걱정도 덜 테니까.”
필렌이 거병의 발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법 공학의 보호를 받는다고 해도 막대한 하중을 지탱하는 하체 모듈은 다른 모듈에 비해 고장 빈도가 높았다.
마나회로 문제라면 까다롭지만 그래도 수리가 가능한 반면, 피로 누적으로 인한 기계 파손이면 교체 외에 방법이 없다.
“조약돌 정도의 크기면 해더 트럭의 출력을 낮춰도 될 테고.”
“예. 거병의 크기가 줄어들면 지원 팀의 부담도 확실히 줄어들죠. 트레일러도 같이 소형화될 테니 이동 부담도 덜어낼 수 있고요.”
“전쟁. 단 하나의 가능성만 사라진다면 소형화가 압도적으로 좋네.”
“그렇죠.”
필렌이 손으로 태양 빛을 가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제보다 더 더운 거 같지?”
“여름이니까요.”
“여름은 왜 더워야 하는 걸까?”
“글쎄요. 신께 여쭤보시죠?”
“신이라고 알까?”
덴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점검판 앞에 서서 다른 연구원들과 얘기하던 올란트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필렌 님. 오후에 있을 테스트에서는 감각확장 단계를 4단계로 고정해서 진행하겠습니다.”
“4단계? 지금이 적당한데. 4단계는 신경 반응에 차이가 느껴질 정도로 답답해.”
“일반적인 수치가 4단계니까요. 필렌님에 관한 데이터는 어느 정도 누적됐으니, 이제 보편적인 수치를 얻어내야 해요.”
“치프가 그렇게 하라면 해야지.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
픽 웃으며 말하는 필렌이었다.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선배.”
올란트가 구겨진 종이를 내밀었다. 질이 안 좋아 표면이 거친 종이 위에 굵은 글씨로 글이 쓰여 있었다.
-예속에서 자유로! 깨어난 시민들은 오후 5시 영토관리처 앞으로!
덴스는 글귀를 눈으로 읽은 후 올란트를 바라봤다.
“사람 앞길은 한 치 앞도 모른다더니. 상황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
“열기가 식질 않아요. 시민들 대응도 체계적으로 변하고 있고, 관료들 역시 대화 창구를 계속 열어두고 있어요.”
“볼로스의 주인이 정말로 바뀌는 건가.”
땅의 주인.
시민은 지주가 될 수 없다는 제국의 오래된 상식이 근래에 무참히 흔들리고 있었다.
발단은 두 달 전, 6월에 있었던 성도 시민 궐기.
성도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 볼로스에는 소식이 늦게 전해졌지만, 성도에서 시작된 해방의 불꽃은 줄어들긴커녕 더 커진 것 같았다.
“사상자는 없었겠지?”
“예. 이번 시위는 얌전히 끝났다고 해요.”
“처음 들고 일어난 날을 생각하면 많이 나아지긴 했네.”
신문으로 성도 소식이 전해진 그날, 상인을 주축으로 한 시민들이 자유를 외치고 들고 일어섰다.
볼로스 외각에 위치한 이 비밀스러운 격납고까지 시위의 열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수많은 사람이 다쳤다고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시위는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성도도 이와 비슷한 분위기려나?”
“군부가 있으니 격한 항쟁은 할 수 없겠죠.”
옆에서 얌전히 듣고 있던 필렌이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군부가 끼어들면 더 격화될걸? 아니지. 오히려 군부가 부추길 수도 있어, 시민들을.”
“군부가요?”
올란트가 팔짱을 꼈다. 덴스도 필렌의 말을 곱씹어 봤다.
“아, 그렇군요.”
먼저 입을 뗀 건 올란트였다. 덴스도 반 박자 늦게 깨달았다.
“군부는 황가와 의회, 양측의 입김이 닿아 있지만 속을 뜯어보면 양상이 좀 다르지. 황가와 의회에 충성하는 자들보다 센터라인에 기대는 자들이 더 많아. 그리고 센터라인은…….”
“자유 시민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죠.”
덴스는 안경을 벗으며 필렌의 말을 받았다.
군부.
제국의 방패이자 창.
황가에 충성을 맹세한 수호기사대와 달리, 오직 제국의 안녕을 위해 존재하는 무력 집단.
황제와 의회의 통솔을 받지만 종속된 기관은 아니었다.
“게다가 허스 경이 복귀했으니 좀 더 복잡해졌군요.”
정통성 없는 핏줄.
과거, 허스가 군부 정점에 오르기 전 고아인 그를 비하하기 위해 사용됐던 말이다.
지금이야 시민 출신이라고 얕잡아보는 정신이 나간 인간은 없지만.
“허스가 장군을 거쳐 총수에 오른 후 귀족 대우를 받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대우일 뿐 정식으로 작위를 받고 귀족이 된 건 아니니까. 바라기만 하면 하루아침에 영주가 될 수 있었는데, 그냥 성도의 작은 집에서 살았고.”
필렌이 말했다.
덴스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가 이질감에 눈을 씰룩였다.
허스?
너무나도 편한 호칭이었다.
“왜 그렇게 봐? 아! 알겠다. 내가 허스 그놈을 막 불러서 그렇지? 하여간 사람들은 걔를 너무 신성시한다니까. 은근히 잘 삐지는 남자인데 말이야.”
심드렁하게 말하던 필렌이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처음 보는 사진이었다. 군복을 입은 채 제국 깃발 앞에 서 있는 네 명.
한 명은 필렌이고, 그 옆에 있는 건 확실하진 않지만 게스할트 장군 같았다.
나머지 두 사람은 처음 본다.
올란트를 힐긋 봤다. 올란트는 필렌이 꺼내 든 사진을 이전에도 본 적이 있다는 눈치다.
“이건 저번에…….”
올라트가 말끝을 흐렸다. 필렌이 손가락으로 사진 속 젊은 남자를 가리켰다.
“여기 멀겋게 웃고 있는 이놈. 얘가 허스야.”
“예?”
사진을 넘겨받았다. 선하게 웃고 있는 남자를 자세히 뜯어봤다. 동시에 둔 군부에 걸려 있는 총수의 초상화를 떠올렸다.
딴 사람이었다.
사진과 초상화.
둘 중 하나는 잘못됐다는 건데, 필렌이 거짓말할 이유가 없으니 초상화 쪽이 잘못된 건가?
“다들 진짜 허스는 만난 적 없고 얘기로만 들었을 테니까.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도 들었고, 이제 좀 편히 말해도 되겠지.”
필렌이 사진을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친분이 있으셨군요.”
하긴, 생각해보면 친분이 없는 게 더 이상하다.
아른고개의 푸른 기사와 제국기사의 총수. 둘 다 영웅으로 칭송받던 자들이니 만찬회 같은 곳에서 몇 번이고 마주쳤으리라.
“허스 얘기 할 때마다 불경죄 저지른 사람처럼 볼까 봐 미리 말한 거야. 아무튼 중요한 건 걔가 복귀했다는 거야. 애초에 병으로 죽었다는 건 믿지도 않았어. 내가 걱정한 건 지쳐서 자살하는 거였는데, 복귀한 걸 보면 어느 정도 이겨낸 거 같기도 하고.”
신랄한 말이었다.
헛기침을 한번 한 후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대로 허스 경께서 복귀했으니 센터라인도 시끄러워지겠군요.”
“허스를 포섭해 시민 측에 참여시키려는 놈들이 분명 나올 거야. 군부 중역들한테는 이번 사건이 기회일 테니까. 귀족제를 아니꼽게 생각하는 군장성들은 권력 재편성과 도시 국가를 꿈꾸니까.”
도시 국가.
연합왕국이 채택한 국가의 형태.
연합왕국의 도시 국가들은 시민의 손으로 영토의 대표를 뽑는다고 한다.
아닌 곳도 있지만, 대다수가 투표권을 행사해 국가 원수를 선정한다고 들었다.
“그렇게 급진적으로 변할까요?”
올란트가 말했다.
“황가와 의회. 시의회 발족을 찬성했다면 이미 대응책을 마련해 뒀다는 뜻이겠죠. 특히나 의회에서 손을 거들었다는 건 시의회를 와해할 방법이 있거나, 혹은 쉽게 다룰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죠. 판세가 급격하게 바뀌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올란트가 낯빛을 굳히며 말했다.
색다른 모습이었다. 정치는 모른다며 정치 얘기만 나오면 빙긋 웃고 마는 후배였는데.
시선이 집중되자 올란트가 예의 맹한 웃음을 짓는다.
“그냥 이럴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필렌이 아무 말 없이 낮게 웃었다.
덴스는 올란트와 필렌을 번갈아 봤다. 둘만 아는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다.
“좀 섭섭하네. 나만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 같아서.”
“그게……”
올란트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필렌이 올란트에게 턱짓을 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말하는 게 어때? 벼랑 끝까지 같이 간 사이에 숨길 필요가 있나.”
“그렇긴 하죠.”
올란트가 뒷머리를 매만진 다음 입을 열었다.
전후 사정이 길어서 한참 들어야 했지만,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첼 총집사님의 손자다?”
“예.”
하, 헛웃음이 나왔다.
배신감 이런 건 없었다.
오히려 상쾌했다. 뛰어난 교육을 받아왔기에 그런 비상한 발상이 가능했구나.
“재미있지 않아? 세나티아가에서 뛰쳐나오다니. 얘도 정상은 아니야.”
필렌이 푸핫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게요. 정상은 아니네요.”
“낭만이 있다고 해주세요.”
“후회한 적 없어? 아무리 사랑이 좋다지만, 그래도…….”
“전혀 없진 않죠. 그래도 그때로 돌아간다면 똑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덕분에 귀여운 아들도 만났으니까요. 아내가 더 오래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욕심이라는 걸 알고 있고.”
쓸쓸하게 미소 짓던 올란트의 어깨 너머로 다급하게 뛰어오는 보안팀원이 보였다.
“교수님. 왔습니다.”
“뭐가 왔다는 겁니까?”
“멧시언 제철소장님께서 인근에 도착했습니다.”
“소장님께서?”
알렝 국장 사망 이후 연락이 두절됐던 소장이 갑자기 찾아왔다?
덴스는 필렌을 바라봤다.
“황가에서 움직인 걸까요?”
“일단 만나보면 알겠지.”
그때 보안팀원이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동행인으로 민 크알데 교수가 왔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