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위험한 마신?”
-네. 마신, 흉신, 악신, 역신. 온갖 흉흉한 이름으로 불리는 그 무서운 정령과 같이 있는 건 너무 위험해요.
“산페르 아저씨는 그런 분이 아니야.”
-그 친근한 호칭부터 그만두죠. 아저씨라니.
카트시의 안구가 원을 그리며 작업실 내부를 돌아다녔다. 부산스러운 동작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두 손을 뻗어 안구를 붙잡았다.
“진정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보안책임자는 우리를 관리 감독, 그리고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그런 걸 해야 했어?”
-네!
“나한테 말해준 적 없잖아.”
-방금 막 생긴 거라고 하죠! 아무튼 그 마신은 지금 어디에 있죠? 떠난 건가요? 영영 떠나 버렸으면 좋겠는데.
산페르 아저씨가 이 말을 들으면 슬퍼하지 않을까. 아니, 아저씨라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흥미를 보일지도?
“지금은 곁에 안 계셔.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그나마 다행이네요. 마신이 곁에 있었으면 전 기절하고 말았을 테니까.
“계속 말하지만, 산페르 아저씨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말을 끝맺지 못했다. 카트시의 눈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사물을 분별하는 동그란 장치가 유달리 크게 보인다.
-나타 왕조 142년. 마옴 도시 북쪽의 거대한 산이 폭발하며 도시가 사라졌죠.
“그게 아저씨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폭발이 일어나는 시기에 그 마신이 목격됐어요.
“그게 다야?”
-나타 왕조 194년. 기록적인 폭우로 왕국의 젖줄인 유안 강이 범람해 수천의 사상자를 내고, 동시에 발생한 전염병으로 수만이 죽었을 때도 그 정령이 목격됐죠.
그뿐만이 아니라며 왕조 시대에 있었던 온갖 굵직한 사건을 나열하는 카트시였다.
-재앙에 가까운 재난이 일어날 때 그 정령은 항상 나타났어요. 이게 무슨 뜻이겠어요?
“산페르 아저씨는 오랫동안 살아왔어. 그러니까 여기저기서 발견돼도 이상하지 않잖아?”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마신은 재앙이 닥치는 순간에만 모습을 드러냈어요. 그래서 다들 역신이니 흉신이니 마신이니, 안 좋은 이름으로 부른 거고요.
“억지 같은데.”
카트시의 눈이 바르르 떨었다.
-억지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이건 확률의 문제니까요. 마신의 목격담이 늘어나면 반드시 사고가 터져요. 왕조 시대 때 기록만 합해도 굵직한 사건이 11개가 넘어요. 아까 가하란이 말했죠? 마신은 오래 살아왔다고. 다른 곳에서 일으킨 사건까지 합하면…….
가하란은 입을 씰룩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가 문제를 일으켰단 증거는 결국 없는 거잖아. 근데 왜 일으켰다고 해?”
-좋아요. 그건 제 억측이라고 할게요. 억측이 아니겠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마신과 가까이해선 안 된다는 거예요.
가하란은 오른손을 들어 눈을 매만졌다.
심상세계에 갇혀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낄 때 손을 내밀어 보듬어준 게 산페르였다.
격통을 이겨낼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었다. 덕분에 눈을 제대로 쓸 수 있게 됐고.
“오해가 있는 게 아닐까? 난 산페르 아저씨를 믿어.”
-오, 세상에. 가하란! 혹시 세뇌당한 건 아니겠죠?
“그렇게 보여?”
-아니요. 그건 아니겠죠.
가하란은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작은 거북. 산페르의 모습이었다.
“본 적 있어?”
-거북이라면 몇 번 봤어요. 자료집을 통해서도 보고, 줄리어스가 가져온 실물로도 보고. 근데 왜요?
“이건 거북이 아니야. 산페르 아저씨지.”
-…농담하는 거겠죠?
“맞아. 정말 이렇게 생겼어. 물론 정령세계에서 봤을 때는 눈동자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컸지만.”
카트시의 눈이 좌우로 갸웃거렸다.
-그 마신이 이렇게 생겼다고요? 크기는요?
“내 곁에 있을 땐 딱 이 정도 크기야. 손바닥 크기.”
-이게 마신이라고요?
“카트시 머릿속에 기억된 마신은 어떻게 생겼는데?”
카트시의 눈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형태가 기록된 건 없어요. 현신한 거미처럼 거대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거든요. 떠다니는 물 같다, 빛 덩어리 같다, 보이지 않았다 등등 다양한 설만 기록돼 있을 뿐이죠.
“그러니까 카트시는 한 번도 본 적 없으면서 다른 사람이 남길 글로만 아저씨를 판단한 거네?”
-기록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언제나 진실만 적힌다고 확신할 수 있어?”
-아니요. 아닌 건 아닌 거니까요.
가하란은 눈을 갸름하게 떴다. 입꼬리를 올리고 말을 꺼냈다.
“그러면 직접 만나서 얘기해보기 전까지, 아저씨를 나쁘게 말하는 건 그만둬.”
-그렇게까지 마신…….
마신이란 말에 카트시를 째려봤다. 카트시가 정정했다.
-산페르를 믿는 이유가 뭔가요?
“몇 번이나 나를 구해 주셨으니까. 그리고 우리 엄마와도 아는 사이고.”
-친모와 아는 사이다?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산페르 아저씨가 우리 엄마를 곁에서 지켜봤다는 것만 알아.”
-그 위험한 정령이 지켜봤다고요? 집안 내력이 독특하네요. 그 눈도 정령과 연관이 있는 걸까요?
“글쎄. 아저씨는 내 질문에 답해준 적이 거의 없어.”
-하긴. 가장 오래된 형태들은 자기 멋대로 행동한다고 하죠.
가하란은 정령세계에서 본 산테를 그린 다음 카트시에게 보여줬다.
-이번엔 좀 무섭게 생긴 쥐네요.
“눈이 루비처럼 예쁘신 분인데, 이름은 산테야. 기록에 이 이름도 남아 있어?”
-그분이야 잘 알려져 있죠. ‘산의 전사’들, 타린족이 섬기는 위대한 영령이니까요. 근데 타린족과 관련된 이야기만 몇 개 남아 있을 뿐, 그분의 개인사는 기록된 게 없어요. 인간사에 개입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
카트시도 산테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분과도 만난 적이 있나요?
“응. 정령세계에 처음 갔을 때 날 구해주셨어.”
-가하란.
“응?”
-제발 조심하세요. 지금 들어보니까 여기저기 위험한 곳을 다 쑤시고 다니는 거 같은데, 그러면 안 돼요. 아시겠어요?
“그, 그렇게 위험하진 않아.”
-안원, 정령세계를 방문하는 것 자체가 큰 위험이에요. 휩쓸려 죽는 정령술사가 얼마나 많은지 숫자로 알려드려요?
가하란은 도리질을 쳤다.
“알았어. 사실 아빠랑 약속도 했어. 절대 찾아가지 않기로.”
-근데 얘기한 걸 들어보면 이미 몇 번은 간 거 같은데요?
“내가 간 거 아니야. 갑자기 끌려간 거지.”
-솔직히 말해봐요. 강제로 끌려갔지만 즐거웠죠?
“…재미있긴 했어.”
-가하란은 두려움이란 걸 몸에 익혀야 해요.
카트시가 거북 그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저 정령이 찾아온다면, 저한테도 말해주세요. 만나서 얘기해 봐야겠어요.
“그래. 만나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조금 무뚝뚝하지만 나쁜 분은 아니니까.”
-가하란 기준에 나쁜 사람은 아마 없을걸요?
“아니야, 있어. 많지는 않지만.”
가하란은 찢어진 책처럼 생겼던 정령을 떠올렸다.
-어쨌든 좋아요. 직접 보지 않고 평가하는 건 옳지 않으니 저도 험한 말 안 할게요.
가하란은 웃으면서 모노클을 눈 위에 얹었다.
-눈을 또 사용해도 괜찮은 거예요? 더 쉬는 게 좋을 텐데요.
“이제 괜찮아.”
펜을 들고 지난번에 카트시가 보여준 도안을 그려냈다.
“이거 말인데.”
-냉동 보관 장치 회로. 한 번 보여줬을 뿐인데,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네요?
“마나포집은 어느 정도 된 것 같으니까 이것도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서. 근데 상자 같은 거에 회로를 적용해야 할 텐데, 아무 데나 새겨도 되는 거야?”
-그렇진 않아요. 엔엔의 인형은 생긴 건 투박하지만 재료는 꽤 고급이에요. 그래서 감각기를 통해 옅게 새긴 회로도 오랫동안 유지되는 거고요.
“그러면 제대로 된 마법 공학품을 만들려면 다른 게 필요해?”
-제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세공사가 정밀하게 그려 넣거나, 아니면 툴을 사용해 마나회로를 집어넣었어요.
“툴?”
엔엔이 설명해줬던 물건 중에 ‘그랑겔 툴’이란 게 있었다.
“그랑겔 툴을 말하는 거야?”
-이름만 들어서는 확인할 길이 없어요. 그런데 그랑겔이란 이름이 또 등장하네요. 저번에는 그랑겔 건틀릿이라 했죠?
가하란은 제철소 건물 상단에 매달려 있던 거대한 강철 장갑을 떠올렸다.
“거병을 만들 때 쓰이는 마법 공학품이야. 카트시와 마찬가지로 지하에서 발견된 거라고 했어.”
-아하.
“설명해주던 아저씨 말로는 야장의 신이라고 해.”
-야장의 신? 설마 그 꼬마가 유명해진 건 아니겠죠?
“꼬마?”
가하란은 몸을 돌려 카트시를 바라봤다. 흥미가 생겼다. 야장의 신이 꼬마라니.
-줄리어스의 작업을 도와주던 어린 인간이 있었어요. 손재주가 정말 뛰어났죠. 이름은 그랑겔.
“같은 사람일까?”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비범한 손재주를 썩히지 않았다면 분명 이름을 알렸을 거예요.
“기록으로 남은 건 없어?”
-없어요. 그랑겔과 몇 번 만난 후 우린 영원한 꿈을 꾸게 됐으니까요.
영원한 꿈.
카트시가 잠들어 있는 동안 그랑겔이 성인이 돼 유명한 장인이 된 걸까?
아니면 그냥 우연의 일치로 이름만 똑같은 걸까.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가죠. 아무튼 제대로 된 마법 공학품을 제작하려면 회로 안정화가 필수예요. 툴 없이 손으로 직접 그 작업을 할 수 있지만, 그게 가능한 건 제가 활동하던 시대에도 손에 꼽을 정도였어요.
“근데 마법사들은 양피지를 비롯한 다양한 물건에 마법을 건다고 들었는데. 툴 없이도.”
-스크롤화하는 건 마나회로를 새기는 것과 전혀 다른 거예요. 마법은 정해진 규칙 같은 게 없어요. 규격도 없죠. 그래서 개인마다 제작 가능한 스크롤도 다르고요.
“마법과 마법 공학. 마나를 쓰는 것만 같지 아예 다른 거구나?”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사실 마법에 대해서는 저도 잘 알지 못해요. 그건 심상세계를 다루는 학문이니까요. 어렵죠.
“배워야 할 게 많네.”
-천천히 해요, 가하란. 시간은 많으니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엔엔의 작업대 쪽에서 소리가 났다.
시계에 박힌 작은 종이 땡땡땡 경쾌한 소리를 낸다.
-밥 먹을 시간이에요.
“이거 좀 더 해보고.”
-가하란. 영양 섭취는 제대로 하지 않으면 건강을 잃어요. 비실비실한 인간이 되고 싶진 않죠?
“…알았어. 먹고 할게.”
잔소리의 패턴이 점점 룽네 아줌마를 닮아간다.
“엔엔 님은 늦으시나.”
-그러게요. 점심 같이 먹기로 했을 텐데.
“조금 기다려보자.”
가하란은 느리게 움직이는 시침을 보며 말했다.
* * *
-좋은데?
쿵, 쿵, 쿵!
거병이 뜀박질할 때마다 바닥이 푹 파였다. 발목이 꺾이며 축이 기울었으나, 금방 중심을 회복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덴스는 가시화 패드를 살폈다.
인지통합 안전성 5.
감각확장 6단계.
오토마타의 서포팅 능력을 한계치까지 끌어 올리고 있었다.
“감각확장 6단계면…….”
“통증 완화 회로가 반쯤 꺼진 상태지.”
“몸에 상당한 부담이 걸릴 텐데, 저걸 버티시네요.”
“버티는 것뿐만 아니라 즐기는 거 같지 않아?”
덴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올란트를 바라봤다.
뛰어난 거병 기사도 감각확장 5단계부턴 조종에 어려움을 느낄 정도로 몸에 부하가 걸린다.
그런데 6단계에 진입한 상태로 날뛰고 있었다.
“저런 분이니 블루아이를 다뤘겠지.”
“이런 말 하는 거 좀 그렇지만, 괴물이 따로 없네요.”
괴물.
어감이 좀 그렇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고 덴스는 생각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