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14화 (187/558)

제214화

“배열을 조금 바꿔봤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

가하란은 모노클을 끼고 구석에서 기웃거리는 인형에게 손짓했다.

임시로 달아놓은 팔을 흔들며 인형이 다가왔다.

-퍼밀리어 종속 관계가 바뀐 것 같아요. 이젠 엔엔보다 가하란을 더 잘 따르는 걸 보면.

“엔엔 님이 따로 부탁한 게 아닐까? 내 말을 잘 들어달라고.”

-그런 적 없을걸요?

가하란은 작업대에 얌전히 누운 인형을 바라봤다.

“잠깐만 살펴볼게.”

착용한 감각기로 시그니처를 불러냈다. 방사형으로 뻗어 나가는 다양한 색의 마력선들.

그 상태로 눈에 힘을 주었다.

주변 사물들이 점차 선으로 된 정보로 변해간다.

“시간 재줄래?”

-알겠어요.

손을 내밀어 선들을 움켜쥐었다.

줄리어스가 만들어낸 마력선 짜맞춤은 평면이 아닌 입체적인 개념이었다.

평면에 그어진 선들을 그러모아 공간을 점유하는 형태로 만들었다.

손바닥 위에 뜬 타원형의 마력선 집합체. 카트시의 원형과 제법 흡사하다.

“됐어.”

-12초. 계속 줄어들고 있어요.

“하다 보니까 점점 익숙해지는 거 같아. 아직 이 조합들이 뭘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원리는 몰라도 가용할 수 있잖아요. 이 시대에서 줄리어스의 유산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건 가하란뿐이에요.

가하란은 선의 세계를 좀 더 깊게 들여다봤다. 작업대 위의 모든 물건이 꾸물대는 선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물질이 형태를 잃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선이 생성된다.

저기 푸른빛으로 똬리를 튼 건 연필이고, 저기 검게 툭툭 튀고 있는 건 먹다 남은 빵.

선 하나하나의 의미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선의 집합이 만들어낸 형태로 본래의 모습을 유추해낼 수 있게 됐다.

이제 작업실 안에 물건들은 선의 세계를 통해서 봐도 구별이 가능할 정도다.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머리가 멍해지며 두통이 일어나는 건 여전하지만.

“저번엔 c2 쪽 덩어리를 건드렸으니까 오늘은 e2 쪽을 바꿔볼게.”

-좋아요.

선의 세계를 통해 본 선의 집합을 카트시는 볼 수 없다. 지금 카트시가 보고 있는 건 시그니처로 불러낸 마력선뿐.

카트시의 도움을 받으려면 오토마타에 적용된 기술처럼 시야를 공유해야 하는데, 공방에서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체스보드의 좌표 읽는 법을 이용했다. 이 역시 평면상의 좌표만 얘기할 수 있어 완벽하진 않지만, 적어도 어느 부위를 수정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으니까.

선의 배열을 조금 바꿨다.

바꾸는 기준은 간단했다. 선의 반응을 보는 것이다.

위치를 조금씩 바꾸다 보면 선의 색이 바뀌거나, 진동 혹은 미세한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중 ‘괜찮겠다’ 싶은 선들을 고정해두는 것이다.

“이거면 된 것 같아.”

눈이 조금씩 아려온다. 선의 세계에서 빠져나왔다. 모노클을 통해 사방팔방 뻗어 나가 있는 마력선을 바라봤다.

-이제 도안으로 옮겨보죠.

“잠깐만.”

종이를 깔고 펜을 쥐었다. 고개를 수시로 위아래로 움직이며 선의 구조를 확인한 뒤, 도안으로 만들었다.

처음 도안을 작성해본 건 두 달 전. 여전히 삐뚤빼뚤, 엉성하기 그지없는 도안이지만 처음 만들었을 때보다는 나았다.

바꾼 영역을 모두 기입했다.

복잡한 선으로 들어찬 도안을 카트시에게 보여줬다.

“어때?”

-음, 가하란.

“응?”

-기준점 제대로 잡고 그리라고 했죠?

“맞다. 미안해.”

가하란은 펜을 들고 구석에 점을 찍었다.

“여기가 기준점이야. 이쪽부터 시작해서 e2고.”

-제가 제공한 마나포집 원안하고 꽤 비슷해졌네요. 회로 형태도 잡혔고.

“그러면 옮겨볼게.”

배열을 바꾼 마력 회로를 인형에 옮겨 심었다. 뻗어 나간 마력선들이 인형으로 빨려 들어간다.

얌전히 누워 있던 인형이 벌떡 일어나 구석으로 뛰어갔다.

“저번에는 일주일 동안 움직였으니까, 이번에는 며칠 버티려나.”

-지켜봐야 알겠죠. 마나포집이 정상 작동하면 계속 움직일 거고, 아니면 좀 더 보완해야 할 거예요.

폴짝 뛰며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인형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정교해지고 있어요. 근데 그림은 원래부터 잘 그렸나요?

“본 건 잘 잊지 않으니까. 그걸 떠올리면서 따라 그리는 건 쉬워.”

-다른 인간들은 쉽게 따라 하지 못할걸요?

“그건 아니야. 가구거리에 화가 아저씨가 한 분 계시는데, 나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그리셔. 얼굴 몇 번 쓱 보고 손 몇 번 움직이면 멋진 초상화가 완성된다니까. 간단한 그림인데 되게 닮았어.”

-가하란도 그렇게 될 거예요. 눈의 사용법도 점점 익혀 나갈 거고, 도안으로 옮기는 것도 수월해지겠죠.

“도안을 완벽하게 만들게 되면, 다른 사람들도 마나포집을 사용할 수 있겠지?”

-이론상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 그걸 보여줘서는 안 돼요. 저번에 저와 엔엔이 말했던 거, 잊지 않았죠?

가하란은 카트시를 바라봤다.

인형에 마나포집을 적용한 날.

엔엔이 조금 무서운 표정으로 마나포집의 위험성을 설명해 주었다.

획기적인 기술은 편의를 가져다주지만, 동시에 혼란도 불러온다고.

“기억하고 있어.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 안 했고. 브라인 님이 계속 눈치를 주고 있지만, 그래도 입 꾹 다물었어.”

-잘했어요. 가하란의 눈과 지금 깨달은 정보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탐낼 보물이에요. 가하란은 아직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없으니 조심해야 하고요.

“숨기지 않고 다 같이 공부하면 더 좋을 텐데.”

-가하란 말도 틀리진 않아요. 학회나 학파 같은 게 생기는 이유도 공동 연구의 효율성 때문이니까요. 하지만 몇 번을 말했지만, 너무나도 특출한 지식은 반드시 위험을 낳아요.

“난 모르겠어. 내가 본 어른들은 다들 착하고 좋으신 분들이었는데.”

-대놓고 악인은 없어요. 정신 이상자가 아닌 이상 왜 악행을 저지르겠어요. 뭐가 득이 된다고.

카트시의 눈이 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권이 걸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각자의 정의가 서로 다른 형태의 악을 낳아요.

“정의가 악을 낳아?”

-네.

“정의는 옳은 거잖아.”

-옳은 게 뭔데요?

가하란은 대꾸하려다가 아, 하고 소리는 내뱉었다.

“이 얘기 예전에 했어. 할아버지, 아빠. 그리고 칼리고 아저씨랑. 관점에 따라서 옳고 그름이 바뀐다.”

-가하란은 역시 영리해요. 우리가 말하는 위험이 뭔지, 충분히 이해했을 테죠.

“그래도 난 마나포집을 하루라도 빨리 다른 사람들한테 알려주고 싶어. 너무 아깝잖아. 이렇게 편리한 기술인데.”

커넥터 환경이 조성된 연구단지 내에서는 어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원하는 시간에 간편히 불을 켤 수 있으니까. 유등의 기름을 갈 필요도 없고, 심지가 닳아서 꺼질 염려도 없다.

그뿐인가?

사람 없이도 선로를 따라 자동으로 움직이는 수레, 거대한 거병을 싣고도 끄떡없는 해더 트럭과 트레일러, 조작 한 번이면 활짝 열리는 창고 문과 마법처럼 나오는 따뜻한 물.

마나포집만 제대로 작동한다면, 편리한 마법 공학품들을 모두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커넥터 시공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과 정제된 마나를 끌어오는 수고도 필요 없다.

도시 전체에 마나포집이 적용된다면, 늦은 밤에도 불을 환하게 켜놓고 신나게 놀 수 있겠지?

“생각해 봤는데, 해더 트럭으로 거병 말고 다른 걸 실어 나르면 많은 사람한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짐마차 몇 대분의 물건을 해더 트럭이라면 쉽게 옮길 수 있으니까.”

-그런 것도 생각해 봤어요?

“응. 마나포집을 모두가 쓸 수 있게 된다면 다양한 마법 용품들이 또 생겨날 테니까. 하늘을 날 수도 있지 않을까?”

-마나포집이 뛰어난 마나회로 방식인 건 맞지만, 만능은 아니에요. 방해받을 수도 있고 주변 뿌리 상태에 따라 흡수하는 마나량도 달라져요. 하늘을 날던 기계가 갑자기 떨어진다면, 큰 사고가 나겠죠?

“그건 위험하네.”

담벼락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아찔한데, 저 높은 하늘에서 떨어진다면…… 상상하기도 싫었다.

-우리가 마나포집을 고안해냈을 때 줄리어스는 그걸 이용할 방법을 고민했어요.

“나타 왕국에선 다들 마나포집을 썼겠네?”

얼마나 편리하고 좋았을까.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아니요. 마나포집 대중화는 언급조차 안 됐어요.

“왜?”

-일단 마나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예요. 마나는 한정 자원인가, 아니면 무한히 생성되는 힘인가. 여기서부터 문제였죠.

“아… 쓰다가 마르는 우물이라면 아껴 써야 하니까.”

-정확해요. 왕국 전역에 마나포집 기술을 적용하는 건 수고롭지만 어렵지 않은 사업이었어요. 하지만 시행되지 않았죠. 연구가 더 필요했거든요.

“그렇다면 나타 왕조 때도 마나포집 기술이 적용된 건…….”

-우리가 유일했어요.

“좋다고 해서 함부로 쓸 수는 없구나.”

-선의로 시행된 일이 재앙을 불러오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심한 가뭄이 찾아왔을 때, 비를 내려 보겠다고 나선 정령술사가 있었어요.

“비를 내리게 할 수 있어?”

-위대한 자들의 힘을 빌리면 가능하다고, 그자는 장담했죠. 그자는 안원을 찾았고 사람들은 위대한 자를 맞이할 준비를 했죠.

“어떻게 됐어?”

-현신은 성공했어요. 몸에 불을 두른 거미가 나타났죠. 아니, 그걸 거미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그 정령은 도심에 나타났고…… 주변 사람들을 불태워 죽였어요.

불태워 죽였다는 말에 가하란은 어깨를 움츠렸다.

“왜? 화가 난 거야?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야?”

질문하는 입과 다르게 머리는 어렴풋이 답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유 없이 저주를 퍼붓던 정령.

찢어진 책을 닮았던 그 정령.

정령세계, 안원에서 만난 수많은 정령은 인간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지극히 다르기에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기에 공포의 대상이 된다.

-가하란이라면 알 텐데요?

“……아무 이유가 없었구나.”

-네. 거미는 그냥 주변을 휩쓸고 사라졌어요. 뜻을 전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죠. 어쩌면 가볍게 기지개를 켠 걸 수도 있어요. 인간들이 안 보였을지도 모르죠.

가하란은 산페르를 떠올렸다.

눈에 닿는 모든 곳을 물로 채워버렸던 아저씨. 만약 산페르 아저씨가 둔 한가운데 나타나 도시를 물로 뒤덮어 버린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런 사고가 벌어진다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아마 기도뿐이리라.

-그 뒤로 제물을 동원해 정령을 현신시키는 건 위법으로 지정됐어요. 말이 나온 김에, 요즘 정령술사들은 어떤가요?

“작은 정령을 불러내서 구경시켜 줘.”

-그게 끝이에요?

“응. 둔에서 본 정령술사들은 다 그랬어. 축제 때면 종종 볼 수 있거든.”

-뭐, 자연스럽게 쇠퇴했나 보네요. 사실 정령과 교류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니까요. 지능을 갖춘 정령들은 말은 통하겠지만 위험하고.

“산페르 아저씨는 위험하지 않아. 사슴 님도…….”

-산페르?

“지금은 곁에 안 계시지만, 언젠가 돌아오게 되면 만나게 해줄게.”

-자, 잠깐만요. 산페르라니. 가장 오래된 형태를 말하는 건가요?

“카트시도 그 이름을 알아? 사슴 님도 산페르 아저씨를 그렇게 부르던데.”

-세상에. 가하란, 그 위험한 마신과 만나는 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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