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저, 저…….”
의도치 않게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 손도 떨리고 있었다.
이건 아무나 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돌려줘야 한다.
하지만 남자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는 칼리고 단장 곁으로 갔다.
붙잡을 수 없었다. 손을 대거나 불러 세우면 불경죄로 끌려갈 것 같았으니까.
“돌아다닐 때는 폐하께서 하사한 검을 차고 다니라니까요. 알아보기 쉽게.”
“괜찮습니다.”
“아니, 본인이야 괜찮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이 곤란하다고요. 게다가 광장에 떡하니 세워둔 그 동상! 그리고 사진! 그것도 문제가 되고 있어요. 실제로 생긴 거하고 전혀 다르니까 난리가 날법하죠.”
“그건 아르드헨이 해결할 문제니 넘어가죠. 고생해서 얼굴이 변했다고 둘러대거나.”
“세상 참 편하게 사십니다. 부러워요, 부러워.”
잡담을 나누며 멀어지는 두 사람이었다. 아니, 선배도 질질 끌려가고 있으니 세 사람.
밀레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손에 든 만년필을 내려다보았다.
“그, 그거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지?”
율이 손가락으로 만년필을 가리키다가 불에 덴 것처럼 손을 치웠다.
“함부로 만지면 끌려가는 거 아니야?”
“몰라. 근데 진짜 그거 맞지? 폐하께서 가장 가까운 분들에게만 선물한다는…….”
“검은 만년필에 푸른 사자. 소문이 잘못된 게 아니면 그거 맞아. 확실해.”
밀레나는 앞을 바라봤다. 남자의 등이 점점 더 멀어져 간다.
“그렇다면 저분은…….”
“밀레나.”
율이 숨을 꿀꺽 삼키더니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기억해? 내가 딱 한 번만이라도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던 사람.”
“왜 모르겠어. 총수님의 장례식 날, 너 말도 안 되게 울었잖아. 누가 보면 부친상인 줄 알 정도로.”
어, 하는 사이 율이 한 걸음 내디뎠다. 밀레나는 다급하게 율의 팔을 붙잡았다.
“뭐 하게?”
“뭐 하긴! 기회를 잡아야지. 지금 아니면 사석에서 언제 총수님을 뵐 수 있겠어?”
“총수님인 거…… 확실하지?”
“맞다니까. 허스 경이 아니면 누가 황제 폐하의 존함을 그리 쉽게 부르겠어? 그리고 중앙광장의 동상이라고 말했잖아.”
“그, 그렇긴 해.”
말릴 생각이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율과 함께 걸음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멀어졌던 총수의 등이 금방 가까워진다.
“근데 너희 어머니하고도 친분이 있으신 건가? 그리고 생일 선물이라고 했지?”
“모르겠어. 엄마는 총수님에 관해 얘기해준 적이 없거든.”
앞서가던 단장과 총수가 걸음을 멈췄다. 밀레나도 움찔하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스콜라의 후배들께서 할 말이 남은 것 같네요.”
단장이 총수의 등을 슬쩍 밀었다.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
밀레나는 긴장한 채 기다렸다.
제국을 지탱해 온 수많은 영웅이 있으나, 작금 제국을 대표하는 영웅을 한 명만 말하라고 하면 이견 없이 언급될 단 한 사람.
제국 기사의 총수.
허스 벨루 산트.
“스, 스콜라 생도 율입니다! 보, 복귀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율이 말했다. 평소의 당찬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염소처럼 떨고 있었다.
“고마워요. 죽었던 사람이 돌아와 여기저기 시끄러운 문제만 만드네요.”
“아닙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군례를 올리는 율이었다. 당장 내일 죽어도 좋다는 표정이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밀레나는 허스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광장 곳곳에 전시된 사진과 확연히 달랐다. 일단 거친 수염 따윈 없었다. 부리부리한 눈도 아니고.
전반적으로 온순한 얼굴이었다. 아니, 온순하다는 느낌도 들어맞지 않는다.
공허한 분위기.
눈도 입가도 웃고 있지만, 그 미소에 온기가 없었다. 눈동자는 앞에 있는 걸 바라보는 듯하지만, 초점은 현실이 아닌 저 먼 미래, 아니, 과거에 고정된 것 같다.
눈앞에 있지만 마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존재감이 희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희한했다.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었다. 상상 속에서 그려온 총수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대장군에 어울리는 기개와 근엄함.
좌중을 단번에 사로잡는 위엄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장군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강렬한 인상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가까이서 제대로 본 총수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밀레나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착각일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없이 많은 전장에서 이기고 살아 돌아온 시대의 영웅, 허스 경이었다.
그런 사람이 위태로워 보인다니.
긴장해서 머리가 이상해진 게 분명했다.
뺨을 툭 치는 것으로 정신을 차리고 싶었지만, 예의 없는 행동이니 대신 입 안의 볼살을 꽉 깨물었다.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젠가 총수님 앞에서 모의전을 선보이는 게 제 꿈입니다. 부족한 실력입니다만, 총수님께서 세우신 기록을 넘어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제 기록이 아직 남아 있던가요?”
“예! 스콜라 전당 꼭대기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부끄럽네요. 나중에 스콜라를 찾게 된다면 지워달라고 해야겠어요.”
총수의 고개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시선이 마주쳤다.
머릿속으로 정리해뒀던 말과 질문들이 가닥가닥 해체되기 시작했다.
어,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땀이 삐질 났다.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인사만 하고 돌아설 수는 없었다. 율만큼이나 허스 경을 만나고 싶었으니까.
스콜라 생도라면 누구나 다 꿈꿔온 일이 이뤄졌는데 멍청하게 있을 순 없었다.
“저… 그…….”
답답했다.
왜 말을 못 하니?
자신에게 화가 나서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멍하니 허스를 올려다볼 때였다.
“눈을 천천히 감아봐요. 의식하면서.”
허스가 말했다. 이유 따윈 묻지 않고 시키는 대로 했다.
눈꺼풀을 천천히 움직여 세상을 덮었다. 어둠이 눈앞으로 찾아왔고, 들쭉날쭉한 숨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려왔다.
“호흡을 크게 마시고.”
스으읍, 몸 안쪽을 공기로 가득 채울 정도로 들이마셨다.
“가늘고 길게 내뱉어요.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모든 게 정리돼 있을 겁니다.”
후우, 어깨를 누르던 긴장감이 호흡에 실려 날아갔다.
“필렌이 저와 제 아내에게 알려준 방법이죠. 어때요? 좀 괜찮아졌죠?”
“네.”
왜 그렇게 긴장했는지 의아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아졌다.
“말하고 보니 저만 아는 얘기를 한 것 같네요. 필렌과 제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그게 궁금한 거겠죠?”
“맞아요. 엄만, 아니, 어머니는 총수님에 관해 말씀하신 적이 없거든요.”
“자랑거리로 삼을 만한 사이가 아니라서 그래요.”
“네?”
자랑거리로 삼을 만한 사이가 아니다?
총수가 눈웃음을 지었다.
“티격태격 싸우기도 하고, 실없는 거로 웃기도 하고. 몇 달간 아무 소식도 주고받지 않다가 어쩌다 만나게 되면 기분 좋게 얘기할 수 있는 친구.”
“그 말씀은…….”
“어중간하게 가까우면 괜히 티를 내고 싶어지죠. 근데 말도 못 하게 친하면 굳이 그런 얘기를 밖으로 꺼내지 않잖아요. 아니지. 필렌이라면 그냥 귀찮았을지도 몰라요.”
“……어머니라면 그럴 수도 있죠.”
방금 총수가 한 말로 확실해진 게 하나 있었다.
두 분은 정말로 격 없이 지냈구나.
“필렌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어요. 그게 어딘지, 뭘 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하네요.”
옅게 웃는 허스였다.
심리적 거리감이 단번에 줄어들었다. 긴장을 비워낸 몸이 이제 흥분으로 가득 차올랐다.
한 박자 늦게 몸과 정신이 들떴다. 밀레나는 들고 있던 만년필 상자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거, 정말 감사합니다만 제가 받아도 되는 물건이 맞나요?”
“만약 누가 문제 삼는다면 제 이름을 대세요. 그러면 대부분 해결될 테니.”
그야말로 명쾌한 대답이긴 하지만, 그래도 손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밀레나는 상자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절대 잃어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간직하는 것보단 쓰는 게 낫지 않을까요?”
“예? 이걸요? 아니요! 이건 평생 보관해둘 거예요. 먼지 한 톨 안 묻도록.”
“그럴 필요까진…….”
허스가 머쓱하게 웃었다.
하늘이 내린 영웅, 아군에겐 천사, 적들에겐 악마.
소문으로 만들어진 이미지가 그 풋풋한 웃음에 다시금 옅어졌다.
그 때문일까.
밀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풋, 소리를 내서 웃고 말았다. 옆에 선 율이 경악하며 쳐다보는 게 보였다.
아차. 얼른 표정을 가다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웃는 것도 필렌을 닮았네요.”
“죄, 죄송합니다.”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뒤를 돌아보는 허스였다.
“단장님이 기다리는 것 같으니 이만 가봐야겠네요.”
아쉽지만 이별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다. 율과 눈짓을 주고받은 후 군례를 올렸다.
허스가 고갯짓한 후 몸을 돌렸다.
“오늘 일은 평생 못 잊을 거야.”
율이 말했다. 밀레나도 “나도”라고 작게 대답했다.
몇 걸음 걸어가던 총수가 다시 이쪽을 바라봤다.
“아, 블루아이에 그려진 사과파이. 아직도 그대로인가요?”
밀레나는 눈을 깜빡였다.
“네. 여전히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양을 아시나요?”
“사과파이 연맹.”
“사과파이 연맹?”
“나중에 필렌을 만나게 되면 물어봐요. 재미난 얘기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총수가 몸을 돌려 걸어간다.
총수와 단장, 비일의 모습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밀레나는 제자리에 오도카니 서서 길목을 바라봤다.
“상상했던 것하고 완전 딴판이셨지?”
율이 말했다.
“어.”
“난 솔직히 말하면 마주치자마자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무서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실망했어?”
“아니, 더 멋있어. 게다가 경호대도 없이 저렇게 혼자 다니시고.”
“단신으로 괴물을 갈라버리신 분이야. 경호대가 붙으면 오히려 방해겠지.”
“그렇긴 해.”
“근데 비일 선배는 잘 풀린 거겠지?”
“총수님과 단장님 사이에 낀 것 같으니까, 일단 출셋길은 열린 것 같은데? 고생길도 같이 열린 것 같지만.”
“또 한동안은 못 만나겠네.”
“그러게.”
밀레나는 울상 짓는 비일을 떠올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만 갈까?”
“가야지.”
“우리 꿈꾼 거 아니지?”
“꿈이라기엔 네가 들고 있는 만년필이…….”
율의 말에 밀레나는 만년필 상자를 내려다봤다.
“…가보로 삼아야지.”
“나 잠깐만 보면 안 될까? 아까 제대로 못 봤어.”
“안 돼. 손때 타.”
밀레나는 싱긋 웃으며 상자를 소중히 감싸 쥐었다.
* * *
-허스라. 죽은 대장군이 복귀했다는 건 정치적 쇼일 가능성이 커요. 근데 좀 구닥다리네요. 너무 뻔히 보이는 수라.
카트시가 귓가에 대고 말했다.
“그래? 사람들은 다들 좋아하던데. 특히 테리 형은 종일 방방 뛰며 좋아했어. 자기 예상이 맞았다고, 영웅이 죽었을 리 없다고.”
-드라마틱한 전개는 누구나 좋아하죠. 연극 대본을 왜 극적으로 짜겠어요? 다 민심을 휘어잡으려는 장치예요. 황제는 약은 사람이군요. 원래 그런 자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거지만.
안구를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카트시였다.
-연이은 테러, 영웅의 귀환, 시의회 발족.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네요. 황제가 모든 걸 꾸민 건지, 아니면 예상치 못한 사건 때문에 이렇게 흘러간 건지.
“미안하지만 내가 알아봐 줄 수 있는 건 없어. 아니면 신문 더 볼래?”
-그건 다 읽었어요. 뭐, 뻔한 얘길 테니 여기서 그만두죠. 그보다 가하란, 마나포집 진행 상황은 어때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