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가룬은 계속 공사 현장에 있는 건가?”
율이 거병관리국 입구를 지나며 말했다.
“무너진 건물 더미를 다 치워내기 전까진 거기에 있겠지. 재건에 투입될지도 모르고.”
“사람 손으로 치워낼 수 있는 크기가 아니니까. 저번에 보니까 어느 정도 정리는 했더라.”
왕성이 있던 곳을 바라보는 율이었다.
“왕성이 무너지다니. 시시한 악몽을 계속 꾸는 거 같아. 깰 법도 한데 깨지 못하는 그런 악몽.”
“그러게.”
전략 병기가 공사 현장에 투입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은퇴해서 관리국 한쪽을 장식하던 거병인데 이렇게 쓰일 줄 누가 알았겠어.”
“그나마 마나 효율이 좋다니까 은퇴한 기체라도 끌어다 써야지.”
“가룬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내가 가룬의 오토마타라면 썩 즐겁지는 않을 거야.”
율이 어깨를 으쓱였다. 밀레나는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토마타는 감정을 알지 못해.”
“알아. 근데 지내다 보면 내 데이터가 오토마타 안에 쌓이고, 점점 대화가 부드러워지잖아? 학습의 결과고, 사용자의 편의를 위한 장치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율이 중간에 말을 끊더니 맞은편을 향해 손을 흔든다. 밀레나도 시선을 옮겼다.
저 멀리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걸어오는 비일이 보였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귀족거주지에서 일어난 테러 이후 여기저기 불려 다니더니, 6월 축제를 기점으로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하긴, 그동안 비일 선배가 벌인 일들을 생각하면 못 만나는 게 당연했다.
“총수님과 함께 나타난 우리의 영웅!”
율이 쫄래쫄래 다가가 비일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비일이 핼쑥한 얼굴로 픽 웃는다.
“너희 둘 다 오랜만이다.”
밀레나는 거무죽죽한 비일의 낯빛을 보며 말했다.
“만나서 반갑기는 한데, 선배 괜찮은 거예요?”
“어? 아, 괜찮냐고? 일단 살아 있으니까 괜찮은 거겠지?”
실실 웃는 모습이 반쯤 맛이 간 것처럼 보인다.
“선배!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요. 다른 누구도 아닌 총수님과 함께한 써전인데. 동기들 사이에서 여전히 난리예요.”
“아직도?”
질겁하는 비일이었다.
“네! 4월 테러 때 총수님과 연합해 괴물을 무찌른 써전! 게다가 이번 6월 축제 때 복귀한 총수님을 거병 어깨에 태우고…… 선배?”
비일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그늘진 곳을 가리켰다. 밀레나는 율에게 눈치를 준 다음 비일을 끌고 그늘로 걸어갔다.
“축제 이후로 하루도 못 쉬었어. 아니지. 4월부터 여기저기 끌려다녔으니까 근 넉 달을 피폐하게 살았어.”
바닥에 주저앉아 실실 웃는 비일이었다.
“몸이 많이 안 좋은 거면 휴직계를 내는 게 어때요?”
밀레나가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어. 근데 저질러놓은 일이 있어서 그럴 수가 없네. 무엇보다…….”
비일이 관리국 입구 쪽을 보더니 몸을 홱 틀었다.
“선배?”
“나 못 본 거야.”
선배가 기어서 골목 으슥한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왜 저러지?
의아해하고 있을 때였다. 유쾌한 목소리가 쨍하게 들려왔다.
“간만에 다시 보네요. 병원에서 본 이후로 처음이던가?”
밀레나는 유난히 곱슬곱슬한 칼리고의 머리를 잠깐 본 후 말했다.
“네, 단장님.”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율 양도 오랜만이에요.”
율이 긴장하며 예, 라고 대답했다.
“성도가 좁으면서도 넓어요. 사람 만나는 게 영 쉽지 않으니.”
두리번거리던 칼리고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혹시 비일 씨를 봤나요?”
“아, 그게 선배라면…….”
특수감찰단 단장에게 거짓말한다는 선택지가 존재할까?
밀레나는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렸다. 비일이 숨어 있는 골목을 향해서.
칼리고가 눈을 찡긋거렸다.
“사실 알고 있었어요.”
주머니에서 푸른 넥타이를 꺼내 목에 두르는 칼리고였다.
“저기, 단장님.”
“말씀하세요.”
“비일 선배가 큰 잘못을 저질렀나요?”
감찰단장이 직접 찾을 정도면…….
안 좋은 상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 건 아니고 남자 대 남자로서 긴히 할 얘기가 있거든요.”
남자 대 남자?
뭔지는 모르겠지만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안도의 한숨이 저도 모르게 나왔다.
“제가 만나는 사람마다 다 죽이고 다니는 살인마도 아니고, 그렇게 반응하면 좀 섭섭해요.”
“죄송합니다.”
“…방금 것도 농담인데 다들 정색하고 대답하시더라고요. 슬퍼요. 이 넓은 성도에 저랑 놀아줄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게.”
장난스럽게 훌쩍이던 단장이 골목을 향해 걸어갔다. 밀레나는 율과 함께 어두운 골목을 바라봤다.
잠시 후, 단장의 손에 이끌려 선배가 끌려 나왔다.
“네? 제가요?”
“예. 그렇게 됐어요.”
밀레나는 앞을 지나치는 단장과 선배를 바라봤다. 무슨 일인지 알고 싶었지만, 캐물을 용기는 없었다.
다행히도 단장이 걸음을 멈추더니 설명해 주었다.
“이 친구의 채무를 제가 물려받기로 했거든요.”
채무?
“선배, 빚졌어요?”
엉뚱한 단어에 얼떨떨한 목소리가 나왔다. 대답은 칼리고가 해줬다.
“돈 문제는 아니고 각종 위법 행위에 대한 처리 사항이에요. 여러분의 선배는 참 굵직한 사건을 연이어 일으켰잖아요? 특히 4월 테러 때 멋대로 거병을 끌고 나간 거.”
“그, 그건 총수님을 돕기 위해서…….”
비일이 대꾸했으나 단장의 손짓이 말문을 막았다.
“결과는 좋았지만 결국 통제권자의 명령 없이 무단이탈한 건 변함없잖아요? 그리고 은근슬쩍 돕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사실 그냥 간 거잖아요. 재수 좋게 그곳에 ‘랜더’… 아니, 총수가 있었을 뿐.”
입을 달싹거리던 비일이 툭 끊기는 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숙였다.
다 포기한 표정이다.
“민 교수는 요즘 잘 지내나요?”
“최근에 뵙질 못했어요. 이 주 전에 뵀을 때는 조금 피곤해 보이긴 하셨죠.”
힘없이 웃던 민 교수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쪽도 그쪽 나름대로 고충이 많겠죠. 성도로 왔다는 건 폐하께서 시킨 일이 있다는 건데, 그 일을 진행하기도 전에 연이어 문제가 터졌으니.”
“저희도 붕 뜬 상태예요. 스콜라 생도로서 훈련하는 것도 아니고, 관리국에서 뭔가를 맡은 것도 아니고.”
이야기를 듣던 단장이 방긋 웃었다.
“밀레나 양.”
“예?”
“어중간할 때가 가장 좋은 거예요. 책임 소재도 불명확하고 해야 할 일도 없고. 적당히 즐겨요. 마비됐던 행정 처리가 곧 정상화될 텐데, 그때가 되면 모두가 정신없어질 테니.”
“단장님 말씀대로 지금은 여유를 즐겨야겠네요.”
단장이 율을 바라봤다.
“율 양은 바쁘겠어요. 센트럴 아고라에 오는 거죠?”
“예, 예! 어쩌다 보니 저도 참석하게 됐습니다. 발언 시간이 짧아서 별 얘기는 못 하겠지만요.”
“말하는 게 중요한가요. 듣는 게 중요하지. 다행히도 시민들은 젊은 귀족한테 호의적이에요. 돌아가신 알렝 경의 작품 중 하나죠. 뭐, 이런 분위기도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아스라이 종소리가 들려왔다. 길을 걷던 사람들이 잠시 멈춰서 시간을 확인하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곧 점심이네요.”
단장이 회중시계를 슬쩍 보며 말했다.
“선약이 없다면 같이 밥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정말 아쉽네요.”
칼리고가 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악수를 하고 한 걸음 물러섰다.
“기회가 되면 나중에 또 보죠.”
“예, 단장님.”
“비일 씨도 그만 흐느적거려요. 이미 결정된 거니까 되돌릴 수 없어요.”
단장이 축 늘어져 있는 비일을 달랬다.
선배의 채무를 넘겨받은 단장.
둘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고 간 걸까?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선배의 고생길이 활짝 열렸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선배, 다음에 꼭 봐요.”
살아서, 라는 말은 내뱉지 않았다.
울상을 지으며 버티는 비일을 칼리고가 힘으로 잡아끌 때였다.
“여기 계셨네요.”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밀레나는 급히 한 걸음 내디디면서 몸을 틀었다. 율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단장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뒤를 잡혔다.
“애들 놀랐잖아요.”
“아, 그런가요? 미안합니다.”
단장과 무덤덤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남자. 단장과 비슷한 연령대로 보였다. 서른 초중반? 허름한 보호장구에 닳아서 찢어지기 직전인 가죽 장화.
복장에 어떠한 표식도 없었다. 신분을 알아내기 어려운 상태였다.
누구지?
차림새를 보면 기술자는 아니었다. 관료 특유의 느낌도 없다.
이곳은 거병관리국.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다.
특수감찰단 단원인가?
그럴 가능성이 크다. 기척을 숨기고 접근할 정도로 훈련받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스콜라 생도 등 뒤에 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아시는 분이. 자자, 얼 필요 없어요. 두 사람의 실력이 모자라서 기척을 못 잡아낸 건 아니니까.”
칼리고가 말했다.
방금 ‘분’이라고 했지? 단원이라면 높여 말할 이유가 없다.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남자가 옆을 지나 단장에게 다가설 때였다.
남자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밀레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일단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단장이 말했다. 남자한테 한 말 같았다.
밀레나는 영문을 몰라 칼리고를 바라봤다. 장난스럽게 웃는 칼리고는 그렇다 치고, 그 옆에 붙어 있는 비일이 경직된 표정으로 자세를 잡고 있었다.
단장 옆에서도 흐느적거리던 선배가 열병식을 준비하는 군인처럼 꼿꼿해졌다.
“혹시 필렌의…….”
밀레나는 남자를 바라봤다.
다른 이름도 아니고 엄마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혹시 거병 기사인가?
어쨌든 예의를 갖춰야 할 상대인 것은 확실해졌다.
밀레나는 표정을 다잡고 말했다.
“밀레나 엔첸세입니다.”
“맞군요. 눈매가 닮아서 혹시나 했는데.”
남자가 턱을 들었다. 멀거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빛이 복잡해 보인다.
“잠깐만요.”
남자가 조끼 안쪽에 손을 넣더니 작은 목함을 꺼냈다. 윤이 나는 나무 상자.
“마땅히 줄 게 없어서 미안해요.”
“네?”
“밀린 생일 선물이에요. 이거라도 줘야 나중에 필렌에게 혼나지 않을 거 같아서요.”
무슨 상황인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으나 일단 받았다.
“그거 주면 안 될 텐데요.”
단장이 얼굴을 씰룩이며 말했다.
뭐지? 위험한 물건인가?
단장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상자를 다시 돌려주려 할 때였다. 남자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괜찮아요. 아르드헨에게 하나 더 달라고 하면 되니.”
누구요?
손바닥 위에 올라온 상자가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아르드헨.
동명이인이길 간절히 빌고 있지만, 분위기상 아닌 것 같았다.
아르드헨이 그 ‘아르드헨’이 맞는다면 앞에 있는 이 남자는, 아니, 이분은 대체 누구지?
“열어봐요.”
남자가 말했다.
손아귀에 땀이 찬다. 긴장하면서 뚜껑을 열었다.
안에 든 건 펜이었다.
검은색으로 치장한 날렵한 만년필. 여분의 펜촉이 왼쪽에 놓여 있다.
시선이 움직였다. 펜대에 아주 익숙한 문양이 박혀 있었다.
사자.
그것도 푸른색.
그냥 사자라면 모를까, 푸른색 사자가 의미하는 건 제국에서 단 하나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