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11화 (184/558)

제211화

“미식을 즐긴다는 건 맛에 국한된 게 아니야. 맛,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맛 못지않게 향도 중요해. 그러면 맛과 향, 두 개만 중요할까? 아니지. 멋. 시각을 자극하는 요리의 색채와 구성 역시 중요해.”

포크가 움직였다.

자그마한 삼지창 끝에 꽂혀 있는 건 엉성한 모양의 생선살 요리였다.

가하란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거 제가 만든 거예요.”

“그래. 네가 만들었겠지.”

브라인이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요리를 입에 넣었다.

“내가 지금까지 한 말 다 이해하고도 그렇게 웃는 거지?”

“요리는 정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어요.”

“정성?”

“네.”

“누가 그래?”

“아빠가요.”

“그건 틀린 말이야.”

“밀리언 아저씨도 그랬는데요?”

“…그건 맞는 말이고.”

브라인이 눈동자를 굴리며 채소볶음을 콕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같은 말인데 한쪽은 맞고, 한쪽은 틀려요?”

“밀리언은 인정받아 마땅한 인간이니까. 물론 요리에 한해서.”

“저희 아빠도 요리 잘해요.”

“밀리언하고 비교하면 어떤데?”

“…그건 말할 수 없어요.”

“그런 거야.”

식사를 마친 브라인이 식기를 바구니에 담고 덮개를 덮었다. 보자기에 싸인 바구니가 책상 밑에 놓였다.

“이건 내가 가져다줄 테니까 넌 이만 가봐.”

“갈 수 없어요.”

가하란은 의자를 끌어당겨 브라인 옆으로 갔다. 브라인이 인상을 쓰며 몸을 뒤로 뺀다.

“또 왜?”

“말씀하셨잖아요. 식사하는 동안 얌전히 있으면 대답해 주시기로.”

“그랬던가?”

“네.”

브라인이 길쭉한 귀를 손으로 훑어 내렸다.

“내 나이쯤 되면 깜빡깜빡하거든.”

“괜찮아요. 제가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브라인 님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꼬마야, 내가 이걸 즐기는 동안 가만히 있어. 그러면 네 궁금증 하나를…….’”

특무대령의 억양을 따라 할 때였다. 브라인이 손을 내저었다.

“그래, 그래. 기억났으니까 얼른 물어봐. 정치에 관한 거랬지?”

브라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너 정치가 뭔지는 알고 있는 거지? 개념부터 설명해 달라는 거라면 불공정거래야.”

“밀리언 아저씨가 설명해줘서 뭔지 알아요.”

“뭔데?”

“툴하고 같이 살 수 있도록 싸우는 거요.”

대답하고 나서 브라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짧은 시간 동안 다양한 표정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어이없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결국 평소의 나른한 대령님의 얼굴로 돌아왔다.

“앞뒤에 붙어야 할 얘기가 있겠지?”

“네.”

“…후, 자긴 글렀네. 말해봐.”

기록보관서로 오는 동안 밀리언에게 들은 걸 최대한 요약해 말했다.

“비유를 들어도 참. 밀리언, 그 애도 가끔 보면 나사 하나 빠져 있는 것 같다니까.”

“그래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정치가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고.”

“사회 질서를 축약해서 가정사로 만든 건 좀 그렇지만, 어쨌든 정치란 게 뭔지는 대강 이해했겠네. 그래, 정치 세계에 입문한 꼬맹이가 나한테 할 질문은 뭐지?”

가하란은 빗을 손에 쥐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브라인이 등을 돌렸다.

의자에 올라가 뭉친 털을 빗으며 말했다.

“밀리언 아저씨가 그랬어요. 자격을 위한 자격이 문제라고. 귀족과 싸울 수 있게 됐는데 왜 자격이 문제죠?”

“밀리언이 든 비유에서 이어 나가보자. 그리고 왼쪽도 좀 빗겨줘.”

가하란은 브라인의 왼쪽 목덜미를 빗으로 쓸어내렸다.

“도시에서 개를 기르는 게 불법이 됐다면, 그걸 개정하기 위해 정치, 즉 싸우러 가야겠지?”

“네.”

“툴과 가장 가까운 네가 대표로서 나간다고 치자. 그때 옆집에 사는 한 인간이 이렇게 말하는 거야.”

브라인이 목소리 톤을 바꿨다.

“‘세금이 너무 부당해. 세율을 낮추는 게 좋겠어. 내가 대표로 나가서 말할게.’ 어때?”

“같이 가면 되겠네요.”

“그러면 좋겠지만 안건을 하나밖에 처리할 수 없다면?”

“그러면…….”

가하란은 고민한 다음 말했다.

“툴은 가족이에요. 돈도 물론 중요하지만 가족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세금을 낮추지 않으면 흉년에 굶어 죽는 사람이 100명이 나온다면?”

“네? 100명이요?”

“말이 그렇다는 거야. 아무튼 죽는 인간이 나온다고 쳐. 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

“그러면 세금 이야기를 꺼내야죠!”

“아하. 툴은 도시 밖으로 버려야 한다는 거네?”

“아, 아니요. 툴 문제도 같이 해결해야죠.”

“한 번에 하나의 안건만 상정할 수 있다니까. 회의 한 번에 문제 하나.”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어디 있긴. 네가 태어나고 발붙여 살아가는 이 도시도 비슷한 형태로 운영돼. 모든 걸 한 번에 처리할 순 없어. 기간을 두고 순차적으로 해결하지.”

가하란은 빗질을 멈췄다.

돈 문제를 해결 못 하면 사람이 죽는다. 그렇다고 툴을 방치해둘 수도 없다.

“그런데 아뿔싸! 맞은편에 사는 다른 인간이 또 다른 문제를 제시하며 자기가 대표로 나서겠다고 하네?”

“또요?”

브라인이 고개를 틀었다. 영롱한 눈동자가 장난기 어린 빛을 머금고 있었다.

“자격을 위한 자격. 누굴 대표로 뽑을 것인가. 대표를 선정한 다음 어떤 문제를 먼저 해결할 것인가. 시의회가 생겼다고 시민 계층의 인간족들이 좋아하고 있지만,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야. 합치를 봐도 문제, 분열해도 문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 전 툴하고 헤어질 수 없어요.”

“도시 밖으로 나가서 살면 돼. 툴이 정말로 중요하다면 양보하는 방법도 있으니까.”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간단하면서도 쉬운 방법이었다.

“조금씩 양보하면 다 해결할 수 있는 거네요?”

“이상적으로 생각하면 그럴지도 몰라. 근데 꼬마야, 세상에는 물러설 수 없는 일이란 게 있지. 그런 사람들은 결코 양보하지 않을 거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고.”

물러설 수 없는 일.

머리가 핑핑 돌았다.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지기도 하고.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다들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정답을 알고 싶어?”

“네!”

브라인이 몸을 돌렸다.

특무대령은 맛있는 요리를 앞뒀을 때만큼이나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없어.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 따윈 존재하지 않아.”

“어째서요?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꼬마야. 행복도 자원이야. 자원은 언제나 분배가 문제고. 모두가 불행해지는 방법은 셀 수 없이 많지만,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은 있을 수 없어.”

브라인의 동그란 눈이 평소와 달리 무섭게 보인다. 가하란은 어깨를 움츠렸다.

“가하란.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야. 결국은 선택의 문제야. 행복과 불행. 너는 특별한 아이니까 선택권을 쥐게 되겠지. 너라면 뭘 선택하고 싶어?”

“…저는 슬픈 건 싫어요.”

“그러면 행복을 고르겠네?”

“아마도요.”

“네가 행복을 가져갔어. 그러면 뭐가 남았지?”

“불행이요.”

“남은 불행은 어디로 가는 걸까?”

“사라질 거예요.”

“아니야, 아니야. 넌 알고 있어.”

“그렇다면 불행도 제가 가질게요.”

“한 번에 하나. 선택이란 건 그런 거야. 둘 다 가질 순 없어.”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 아닐까요?”

“모르는 일이라. 그럴지도 모르지. 나라고 다 아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그 좋은 머리로 이 말은 기억해둬. 결국은 선택이라는 걸.”

브라인이 생긋 웃었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는 것 같았다.

가하란은 가늘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브라인 님은 가끔 무서워요.”

“항상 무서워야 정상이야. 다른 인간들은 날 어려워해. 그게 맞는 거고.”

“전 어렵진 않아요. 브라인 님은 상냥하시니까요.”

“그건 네 착각일 거야.”

쓱쓱, 가하란은 멈췄던 빗질을 이어나갔다.

결국은 선택.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 * *

덥다.

밀레나는 손수건으로 목덜미를 찍어냈다. 머리 꼭대기에 뜬 태양이 무서울 정도로 열기를 뿜어낸다.

작년 여름도 이렇게 더웠던가?

얼음을 띄운 시원한 차를 생각할 때였다.

“우리는 좀 더 논의해야 합니다! 졸속 처리는 기껏 얻어낸 기회를 버리는 꼴입니다. 시의회 대표 빈센달은 각 토론장에 찾아와 폭넓은 대화를…….”

단상에 오른 여자가 맹렬한 기세로 외치고 있었다.

끔찍했던 3월과 4월을 지나, 혼란했던 6월까지 보내고 마침내 찾아온 8월.

성도는 예전과 무척이나 달라진 모습이었다.

한때 거리공연의 무대로 사용됐던 장소들이 시민들의 토론장으로 바뀌었다.

‘아고라’라 명명된 저런 장소들이 성도 곳곳에 생겨났고, 하루도 빠짐없이 시민들이 모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자유 시민은 물론 각 계층의 인사들이 참여하는 ‘센트럴 아고라’.

밀레나는 중앙광장에 마련된 센트럴 아고라를 바라보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왜?”

옆에 있는 율이 말을 걸어왔다.

“시의회 말이야.”

“아, 저거.”

“언제쯤 효력을 발휘할까.”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내년 초쯤에 제대로 된 협상 자리가 마련된다고 해.”

“아직 시간이 꽤 남은 건가?”

“그건 모르지. 시민들의 의견을 총합하려면 오히려 모자란 것 같기도 하고.”

율이 챙이 넓은 모자를 머리에 살짝 얹었다.

“우리야 스콜라에서 시민 애들하고 부대껴서 그런진 몰라도, 저런 행동 자체가 불편하진 않잖아? 하지만 어른들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야.”

“쉽지는 않겠지. 매번 말로만 하던 화합이 진짜 코앞으로 다가온 거니까.”

황제가 강조하던 시민과의 화합.

언어가 물질의 옷을 입고 마침내 현상이 돼 현실로 나타났다.

성도 저택을 관리하는 관리인들도 요즘 분위기가 달라졌다. 다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같이 기분이 좋아진다. 가족이니까, 그들이 행복해지는 걸 바라니까.

“귀족을 상대로 한 폭행이 요 두 달 사이 엄청 늘었어.”

율이 말했다.

“그래?”

“사용인들 쪽에서 문제가 발생하나 봐. 이제 동등한 자격을 갖췄는데 왜 무시하냐고.”

“동등한 자격.”

철저히 귀족들로만 꾸려져 왔던 정치 세계에 시민들이 발을 내디뎠다.

참정권을 얻어냈으니 동급이라 할 수 있는 건가?

“시의회 발족은 시작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아직 멉니다. 결속하여 신분제 폐지까지 도달해야, 그래야 우리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습니다.”

우리.

저들이 말하는 우리에 귀족은 포함돼 있지 않다.

밀레나는 손을 올려 머리끈으로 사용 중인 스카프를 매만졌다.

“만약에 신분의 차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질문을 들은 율이 눈웃음을 지었다.

“평민과 귀족. 신분제를 없앤다고 한들 차이가 사라질까? 너도 알잖아. 우린 쥐고 있는 게 많아. 귀족이란 이름을 잃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율. 오늘따라 냉소적이네.”

“그럴 수밖에. 나도 어찌 됐든 권력가의 일원이니까.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그랬었지.”

밀레나는 소리치는 여자를 조금 더 지켜보다가 몸을 틀었다.

“가자. 아직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너와 달리 난 할 수 있는 게 꽤 있는데? 센트럴 아고라에도 곧 나갈 거고.”

“갑자기 멀어 보이네.”

“엔첸세는 자유분방하게 살아도 되지만, 우리 가문은 아니거든. 치이는 쪽이 될 수는 없으니 일단 나가서 얘기해 봐야지. 할아버지가 걱정하고 있어. 이게 내전의 불씨가 될지도 모른다고.”

“내전이라. 끔찍한 말이야.”

“그런 일이 안 일어나도록 일단 말을 많이 해봐야지. 입이 아픈 게 피를 흘리는 것 보단 낫잖아?”

“옳은 말이야.”

밀레나는 저 멀리 있는 거병관리국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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