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0화
시의회 발족?
마지막 말만 기억에 남았다. 앞에 총수라고 한 것 같기도 한데, 말이 워낙 빨라서 제대로 듣지 못했다.
가하란은 돈이 이렇게까지 흥분하며 말하는 걸 몇 달 만에 처음 봤다.
언제나 느긋하게 행동하는 아저씨였는데.
“돈.”
“예, 셰프님.”
“침착하고 일단 숨 돌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다음에 하자.”
“아, 예. 숨 쉬어야죠.”
숨을 한껏 들이마신 다음 천천히 내뱉는다. 들뜬 가게 안 분위기가 느긋한 숨소리에 맞춰 가라앉았다.
“시의회를 뭐 어떻게 한다고?”
밀리언도 마지막 말만 제대로 들었는지 시의회부터 물었다.
“황제가 시의회 발족을 선언했어요.”
“정치적 퍼포먼스 아닐까? 신년 연설처럼 슬며시 언급하는 정도라면…….”
“아니요, 이번에는 달라요.”
돈이 둘둘 말린 신문을 펼쳤다.
굵은 머리기사와 함께 큼지막한 그림이 박혀 있었다. 정교한 그림. 얼핏 보면 사진이라 여길 정도였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단상 앞에 화려한 복장을 한 남자가 있었다. 얼굴은 자세히 묘사되지 않았으나 옷에 그려진 사자를 통해 저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제국의 황제.
“성 안드레 축제에 맞춰 시민들이 들고 일어섰답니다. 소문으로만 돌던 시민 궐기가 현실이 된 거죠.”
“성도 시민이 전부?”
“예! 신문 운송 업체에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이 있어서 물어봤죠. 성도에 사는 모든 시민이 중앙광장으로 모였고, 그 사람들 앞에서 황제가 선언했다고 해요. 시의회를 인정하고 황가와 의회와 동격으로 대우하겠다고.”
“황가와 의회, 두 곳과 동격으로?”
“그렇다니까요. 지금 난리도 아니에요. 총수가 살아 돌아온 것도, 황제가 암살당할 뻔했다는 것도 시의회 발족에 묻혀서 소문 거리도 안 돼요.”
가만히 듣고 있던 가하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돈 아저씨. 시의회가 생기는 게 그렇게 좋은 일인가요?”
“그럼! 네가 좀 더 컸다면 이게 얼마나 대단한 사건인지 확 와닿았을 텐데. 제국 시민이라면 누구나 품고 사는 소망, 그게 이뤄진 거야.”
두 주먹을 움켜쥐며 그렇지, 라고 외치는 돈이었다.
가하란은 문밖을 바라봤다. 밖이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지금 난리도 아니에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축제를 벌일 기세예요.”
“축제요?”
축제란 말에 눈이 번쩍였다.
가하란은 의자에서 내려와 가게 밖으로 나갔다.
“빈센달 만세! 아르드헨 황제 폐하 만세!”
“민중의 이름으로!”
“예속에서 자유로!”
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도로를 점거했다. 귀족들의 마차가 다니는 전용 도로 역시 사람들로 가득 찼다.
도로를 정비하고 시민을 통제해야 할 치안경비대도 사람들 틈에 섞여 ‘자유’를 외치고 있었다.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즐거워 보인다.
가하란은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었다.
예속과 자유.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워 보이니 함께하고 싶었다.
앞으로 튀어 나가려 할 때였다. 밀리언이 목덜미를 잡았다. 뚱한 얼굴로 바라봤다.
“위험해.”
“…네.”
밀리언이 가하란을 번쩍 안아 어깨에 올렸다. 커다란 몸에 올라가니 더 멀리 보인다. 눈앞의 거리뿐만 아니라 저 멀리 가구단지까지 사람들로 득실거렸다.
둔에 사는 모든 시민이 거리로 뛰쳐나온 것 같았다.
“예속에서 자유로!”
“빈센달 만세!”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음성에 몸이 다 떨릴 정도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신이 나니 좋았다.
가하란도 두 손을 머리 위로 들며 외쳤다.
“예속에서 자유로!”
그러자 밀리언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뭘 뜻하는 건지 알고 있는 거냐?”
“아니요. 잘 몰라요. 그래도 자유는 필요한 거라고 아빠가 그랬어요. 책임이 따르는 자유. 그걸 위해야 한다고.”
“좋은 말이구나. 어려운 말이기도 하고.”
가게 앞을 지나가던 노부부가 환희에 찬 얼굴로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점점 더 커지는 함성,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모여든 사람들.
가하란은 저 멀리 대열을 맞춰 서 있는 군인들을 바라봤다. 온 거리가 환호성으로 가득한데, 군인이 모여 있는 곳만은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저 아저씨들은 왜 좋아하지 않는 걸까요?”
군인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밀리언이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속으로 기뻐하고 있을 거다. 단지 티를 낼 수 없을 뿐이지. 저들의 임무는 혼란을 잠재우는 거니까.”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길목 너머로 군 중앙부가 보였다. 매일같이 드나드는 건물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진다.
“아저씨.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겠죠?”
밀리언이 옅은 웃음을 짓더니 가하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군 중앙부 쪽을 바라보며 밀리언이 말을 이었다.
“이곳 통수권자는 계산이 빠른 사람이니까.”
덩치가 큰 남자가 수레를 밟고 올라서더니 굵은 목소리를 냈다.
“도시를 시민의 품으로! 우리 모두 행정처로 향합시다!”
그 외침은 사람은 사이로 금방 전파됐다. 행정처를 연호하며 사람들이 발걸음을 옮겼다.
“더 복잡해지기 전에 음식을 가져다줘야겠구나.”
가하란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 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아저씨. 시의회가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조금 복잡하지만, 너라면 얼추 알아들을 수 있겠지.”
밀리언이 바구니를 넘겨받았다.
“가면서 얘기해주마.”
“같이 가주시는 거예요?”
“오늘은 그래야 할 것 같다.”
밀리언이 손가락으로 거리를 가리켰다. 밀집해 이동 중인 사람들이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혼자서 저길 뚫고 군 중앙부로 가는 건 어렵겠지.
밀리언의 손을 붙잡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전부 대로로 나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길들은 한산했다.
“시의회는 시민들로 구성된 정치 집단이 될 거다.”
“정치 집단이요?”
“국가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일들을 그들이 결정하게 돼. 황제가 시의회 발족을 선포한 건, 시민들도 정치에 개입할 수 있게 문을 열어 주겠다는 뜻이고.”
“정치.”
가하란은 물웅덩이를 폴짝 뛰어 피하며 말했다.
“왜 다들 정치를 할까요? 할아버지도 그렇고, 아빠도 그렇고. 다들 정치 때문에 괴롭다고 하면서 또 필요하다고 해요. 이상해요.”
“너희 집에 큰 개가 한 마리 있다고 했지?”
“네! 이름은 툴이에요.”
“어느 날 갑자기 도시 내에서 개를 기르는 게 불법이 되면, 넌 어떻게 할래?”
“그건 말도 안 돼요. 툴은 가족이에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가하란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억울한 게 있으면 이동판사에게 재판을 부탁해야 한다고 들었어요.”
“이동판사 역시 법을 기준으로 판결을 내리지. 개를 기르는 게 불법이 되면 판사는 툴을 도시 밖으로 쫓아낼 거다.”
“안 돼요! 그건 잘못된 거예요. 툴은 착한 개예요. 좀 게으르고 장난기가 많지만, 남한테 피해 주진 않아요.”
“하지만 규칙이 정해지면 따라야 해. 집단에 소속된다는 건 그런 거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요? 툴을 버릴 순 없어요.”
“그래. 버릴 수 없지. 그러니 정치가 필요한 거다. 잘못된 법, 어긋난 규칙, 정당치 못한 원리를 바로잡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통해 싸우는 거지.”
“싸워요?”
밀리언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일반 시민은 싸울 자격조차 얻지 못했다. 하지만 시의회가 생긴다면…….”
“싸울 자격을 얻는 건가요?”
“일단은. 물론 내가 말한 것처럼 모든 게 쉽게 되지는 않을 거다. 많은 문제가 남아 있지.”
“어떤 문제요?”
밀리언이 담담한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우선은 자격을 위한 자격. 이게 가장 큰 문제가 되겠지.”
* * *
둔 최고사령관.
썩 나쁘지 않은 자리였다.
아니, 아주 좋은 자리였다.
마음에 들었기에 지키려고 애를 썼고, 그 결과 둔 통수권자 위치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디온은 차향을 즐긴 다음 한 모금 마셨다. 활짝 열어둔 창문으로 습도 높은 바람이 들어왔다.
곧 여름이 시작됨을 알리는 바람 같았다.
“폐하. 장난치고는 정도가 심하군요.”
시야 밑으로 벌떼처럼 밀려드는 시민들이 보인다. 진로를 보아하니 행정처로 향하는 것 같았다.
똑똑똑, 세 번의 노크. 디온은 말없이 차를 마셨다. 몇 초 후 수석부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행정처장이 급히…….”
“날이 덥군. 이런 날은 사람을 만나지 않는 편이 좋지. 서로 짜증만 날 테니까. 그렇지 않나?”
수석부관이 고개를 깊게 숙이며 한 걸음 물러섰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행정처 돼지는 모레쯤 보면 될 거고. 생각을 정리하던 디온이 대기 중인 수석부관을 바라봤다.
“거병관리국 국장과 제철소장, 두 분의 일정이 어떻게 되지?”
“공식 일정이 잡힌 건 없습니다.”
“두 양반 다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겠군. 제철소장 쪽은 오히려 한숨 돌린 건가.”
“멧시언 쪽에 연락을 넣을까요?”
“저녁이 좋겠군. 간만에 식사도 할 겸.”
“알겠습니다.”
손가락을 까닥거려 수석부관을 옆으로 불렀다.
“자네, 저 밑에 뭐가 보이나.”
“흥분한 시민들이 보입니다.”
“황제께서 시민에게 권리를 줘버렸어. 게다가 의회의 최고어른 중 하나인 가트델은 똥오줌도 못 가리는 신세가 됐지. 누구의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황가가 의회를 짓눌러 버린 건 명백해.”
수석부관이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다.
“…거기에 총수께서도 복귀하셨으니 황가, 아니, 황제 폐하의 위상은 한층 더 올라갔을 겁니다.”
“재미있지 않은가? 국장까지 치러버린 제국의 영웅이 화려하게 복귀해 버렸어. 영웅이란 참 대단해. 무덤에서도 되살아나고.”
제국기사의 총수, 15년 전쟁을 끝낸 ‘허스’가 복귀식을 치렀다.
정보망에 따르면 다수의 마법사로도 통제 못 할 거대한 마나 폭발을 단신으로 막아냈다고 한다.
덕분에 수천의 성도 시민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총수는 상식의 잣대로 재는 게 의미 없으니 그렇다고 치고, 폐하께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가리를 여신 걸까.”
아가리. 참으로 어울리는 단어였다.
“시의회 발족을 인정했다는 건, 의회 역시 찬성표를 던졌다는 뜻이겠지. 이파전이 지겨우니 이제 삼파전으로 가겠다는 건가?”
“시의회 초대 회장으로 오를 빈센달이 황제의 인형이란 얘기가 있습니다.”
“의회도 짓누르고, 시의회 역시 황제의 손아귀라. 거참, 욕심도 많으시군.”
디온은 행정처 앞에서 시위 중인 시민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통제권 상실을 예견하셨을 텐데, 대체 왜 이딴 식으로 일을 저지르신 거지. 정말로 도시 국가를 시행해버릴 참인가?”
“참모진들이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다른 영토와 주요 도시 쪽에도 사람을 보내 상황을 알아보는 중입니다.”
“그래, 자네가 고생을 좀 해야겠어.”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수석부관이 방을 나선 후 조용히 문을 닫았다.
디온은 막대기를 들고 시민들을 통솔하는 남자를 바라봤다.
“의결권. 정치 참여. 좋은 말이야. 근데 그쪽 대표는 또 누가 할 거지? 결국 돌고 돌아 자리싸움인데 말이야.”
어찌 됐든 폭탄은 던져졌다.
둔마저도 이 꼴이다.
아마 다른 곳은 시민들에 의해 점거당했을지도 모른다.
정당성.
그 위험한 말에 혹한 시민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귀족 하나, 아니면 행정처장을 죽여줬으면 좋겠군.”
디온은 남은 차를 홀짝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