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제 머리가 어떻게 된 걸까요?”
펜톤의 바짝 마른 입술이 움직였다.
올란트는 펜톤의 어깨를 토닥였다. 펜톤이 깊은 한숨과 함께 책상에 머리를 기댔다.
지난 밤, 예상했던 대로 연구진들은 날밤을 새워 대화를 이어갔다.
펜톤의 말에 따르면 자정까지는 이변이 없었다고 한다. 회로의 위험성을 논하며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는데, 어느 순간 의견을 지지하던 동료가 슬그머니 발을 뺐다고 한다.
“아니지. 발을 뺐다는 건 제 관점에서 그런 거고, 그 친구들은 정답을 알아본 거겠죠. 저와는 다르게…….”
헤나에 이어 고르벱, 킨단, 라울레, 홉스. 과반수 이상이 회로의 효용성과 안정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펜톤은 동료들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당혹스러움을 넘어 두려웠다고 말했다.
“불과 10분 전까지만 해도 같은 의견을 내던 동료가 순식간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로 변경을 지지했어요. 전…… 정말 모르겠습니다. 이권 다툼도 아니고 정말 순수한 공학적 문제인데, 한순간에 입장을 바꾸다니.”
펜톤이 고개를 들었다. 퀭한 눈으로 올란트를 바라봤다.
“치프님. 이 논리 회로를 이해 못 하는 제가 무능한 겁니까?”
“아니에요. 단지, 우리가 이해 못 한 일이 이 안에서 벌어지고 있을 뿐이죠.”
“이해 못 하는 일이요?”
올란트는 펜톤 옆에 앉았다.
“저도 어느 순간 알게 됐을 뿐이에요. 거듭된 사고의 연장선에서 공식화한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알게 된 거죠. 펜톤 씨가 이해 못 하는 건 능력 부족이 아니에요.”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깨닫고 있는데, 전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겠어요. 거병이 연이어 정상 가동한 걸 보면 회로에 이상이 없다는 뜻인데, 제 머리로는 도무지 납득이 안 되거든요. 왜 저게 작동하지? 왜 저게 왜곡이 발생하지 않지?”
두 손으로 가볍게 머리를 누르던 펜톤이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잠깐 눈을 붙여야겠어요.”
“그러세요. 한숨 자고 나면 좀 나아질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펜톤이 물러갔다.
그리고 몇 분 후 다른 연구원이 찾아왔다. 어젯밤에 열렬히 회로를 반대하던 연구원이다.
“치프님! 이제 알겠어요. 이렇게 단순한 거였는데, 어젠 왜 몰랐을까요?”
그렇게 하나둘씩 올란트를 찾아와 허탈함과 기쁨, 두 개의 감정을 담아 말했다.
“남은 건 펜톤 한 명뿐인가.”
덴스가 방을 찾아와 말했다.
“예. 다른 분들은 회로를 지지하는 쪽으로 의견을 바꿨어요.”
“덕분에 프로젝트는 순조롭게 진행되겠지만, 이 상황 역시 골치 아프게 됐어.”
“그러게요.”
무엇이 이해와 몰이해의 기준점이 됐는가.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꾼 연구원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왜 이걸 몰랐을까요?”라고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지각의 경계.”
덴스가 책상에 펜을 놓으며 말했다. 세로로 놓인 펜 왼쪽에 주먹 쥔 손이 있었다.
“연구진의 지적 능력은 의심할 필요 없지. 다들 우수해. 모자람이 없는 친구들이야.”
“우열을 따질 수 없죠.”
“그런데도 이해하는 데 시간차가 발생했어. 감각, 센스 이런 문제도 아닌데 말이야.”
덴스의 손이 펜 오른쪽으로 넘어갔다.
“초록이 초록임을 모른다.”
“하지만 결국은 깨달았죠.”
“길을 제시해줬기 때문에 쉽게 깨달은 거야. 나 역시 네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평생 이해하지 못했을 거고.”
“누군가 그랬죠? 신은 장난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건 신의 장난 같아요. 이유를 모르겠어요.”
덴스는 벽에 기댄 채 헛웃음을 지었다.
“시험당하는 기분이야.”
“시험이요?”
“은사 중 한 분께서 종종 난해한 문제를 냈지. 풀어내면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질 거라면서. 어려운 문제였지. 도통 이해가 안 됐어. 해답을 찾으려고 서적을 뒤적거리고, 자문을 구했지. 그러다 어느 날 알게 된 거야.”
덴스가 창문 쪽을 바라본다. 바싹거리는 햇볕이 비스듬히 열린 창으로 들어왔다.
“답을 안 순간 그 복잡했던 문제가 하나의 이정표처럼 변했어. 개별적이던 정보들이 그 이정표를 기준 삼아 보니까 연결되는 부분이 있더라고. 아는 것들이 새롭게 변하는 순간이었지. 그래, 올란트 네가 발견해낸 그 회로처럼 말이야.”
시험.
왠지 모르게 마음을 잡아끄는 단어였다. 올란트는 실없는 웃음을 지은 다음 말했다.
“이게 만약 시험이라면, 무엇을 위한 시험일까요?”
“글쎄. 시험이 시작되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원하는 건 하나지. 선별.”
“선별이라.”
팔짱을 끼고 입에 맴도는 단어 몇 개를 중얼거릴 때였다.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쿵쿵, 누군가 격하게 문을 두드렸다.
“치프님! 펜톤입니다!”
“들어와요.”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온 펜톤은 진리를 규명해낸 학자처럼 흥분한 상태였다.
“이해했어요. 아니, 이해가 됐어요! 다른 사람들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제야 알겠어요. 너무나도 당연한 건데 이제야 깨닫다니!”
환호성을 지르던 펜톤이 실례했다면서 방을 빠져나갔다.
“선배님이 안 보일 정도로 흥분했네요.”
“그럴 만하지. 다들 이해했는데 혼자 앓고 있다가 깨달은 거니까. 그나저나, 이걸로 한 가지는 확실해진 것 같네.”
“네. 시간차는 존재하나 결국 알게 된다는 거죠.”
“한 번의 번뜩임. 그걸 발견해내는 게 가장 중요할지도 몰라. 올란트, 좀 더 힘써봐. 다음엔 뭘 가져다줄지 기대할 테니까.”
“그런 말씀 마세요. 부담스러우니까.”
“부담 되라고 하는 말이야.”
덴스가 이따 보자며 방을 나섰다.
올란트는 닫힌 방문을 보며 생각했다.
늘상 봐오던 것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낸다.
수없이 들어온 말이지만 직접 경험해보니 어이가 없을 정도다.
거병 회로의 자그마한 변화가 계산을 웃도는 에너지 효율을 가져왔다.
정말 미세한 변화가 거대한 파도를 일으킨 것이다.
세상을 수놓는 수많은 정보들.
그것들을 재조합하거나, 혹은 그 안에서 새로운 이치를 발견해 낸다면 많은 것이 바뀌리라.
올란트는 아들 가하란을 떠올렸다.
그 아이의 눈은 특별했다.
우리가 못 보는 것들을 보는 눈.
격납고 안에서 벌어난 이 작은 소동과 연관 지어보면 어떤 의미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얌전히 지내고 있으려나.”
주변에 훌륭한 어른들이 많으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올란트는 해맑게 웃는 아들의 모습을 그려보다가 도안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 * *
“안녕.”
가하란은 아주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포대기에 싸인 아이가 꼼지락거리다가 자그마한 손으로 손가락을 잡았다.
아니, 잡았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았다. 아직 손아귀에 힘이 없어 손가락에 손을 걸친 정도였다.
“너무 예뻐요.”
생후 1개월이라고 들었다. 퉁퉁한 볼, 이마를 간신히 가리는 머리카락, 불그스름한 피부.
“이름은 아직이겠죠?”
밀리언의 아내, 에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셀린. 신고는 1년 뒤에 하겠지만 이름은 이미 지어놨어.”
셀린. 가하란은 아이의 이름을 작게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꿈뻑이며 바라보던 아이가 눈을 감았다. 졸린 모양이다.
“이제 그만 들어가 봐. 가게 걱정은 하지 말고.”
밀리언이 에나에게 말했다. 에나가 아이를 안은 채 일어섰다.
“가하란. 나중에 셀린이 크면 같이 놀아줄 거지?”
“그럼요. 저 노는 거 잘해요.”
“우리 셀린은 좋겠네. 든든한 오빠가 벌써 생겨서.”
다음에 또 보자며 에나가 직원과 함께 가게를 나섰다.
“애들은 참 귀여운 거 같아요.”
그 말을 들은 밀리언이 작게 웃었다.
“왜 그러세요?”
“네가 그 말 하니까 웃겨서.”
“안 웃긴데요.”
“너만 안 웃길걸? 잔소리 그만하고 빨리 따라와라. 오늘은 손질할 게 좀 있으니까.”
밀리언이 먼저 주방으로 들어갔다. 가하란도 조리복을 갖춰 입었다.
‘가하란’이란 이름표가 달린 내 조리복. 입을 때마다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주방으로 들어가 손을 씻고 발받침용 상자에 올라섰다.
“오늘은 칼을 쓸 거다.”
“정말요?”
작은 칼이 눈앞에 놓였다.
“나처럼 잡아봐라. 각자 방법이 있다지만 처음에는 정석으로 배우는 게 좋을 테니까.”
손잡이를 잡았다. 손안에 찰싹 달라붙었다. 손 치수를 재서 만든 것처럼 딱 알맞은 크기였다.
“어떠냐? 쥘 때 불편하면 지금 말하고.”
“아니요. 오랫동안 쓴 것처럼 잘 맞아요.”
“그러면 됐다.”
밀리언이 푹 익은 무를 자르며 칼 쓰는 법을 알려줬다. 가하란은 동작 하나하나를 천천히 따라했다.
“손질법 같은 것도 배워두면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다.”
“네.”
“그리고 날붙이 다룰 땐 항상 조심해야 한다. 이렇게 말해도 몇 번은 다치겠지만.”
“조심할게요.”
재료 몇 개를 다듬었는데, 금세 손아귀가 얼얼해졌다.
밀리언이 쓱 보더니 칼을 가져갔다.
“쓴 뒤에는 항상 세척을 잘해야 한다. 오래 쓰려면 무엇보다 관리가 중요하니까.”
밀리언은 칼의 물기를 닦아내고 가죽집에 넣었다. 돌돌 말린 가죽집이 선반 위로 올라갔다.
“칼은 여기서만 쓰도록 해라. 능숙하게 다루게 된다면 그땐 선물로 주마.”
가하란은 가죽집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이는 식칼. 공구만큼이나 탐나는 물건이었다.
밀리언이 조리모를 고쳐 썼다.
방해하면 안 되는 시간이 찾아왔다. 가하란은 조금 물러서서 요리에 집중하는 밀리언을 바라봤다.
커다란 몸이 날렵하게 움직였다. 몇 달을 지켜보니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있는데, 요리할 때 동선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가하란은 완성돼 가는 요리를 바라보며 먼 미래를 상상했다.
연구단지에 있는 실험실이나, 공방처럼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된다면 밀리언 아저씨처럼 알맞은 곳에 필요한 물건을 놔야겠다.
“반죽을 조금씩 떼어내서 물에 넣어봐라. 모양을 예쁘게 다잡으면 좋고.”
찐득한 반죽을 조금씩 떼어내 물에 넣었다. 밀리언처럼 동그란 모양을 만들고 싶었는데, 쉽지가 않았다.
쭈굴쭈굴하게 퍼진 반죽이 물속에서 익어갔다.
옆에서 조금씩 일을 거들다 보니 어느덧 완성이 됐다. 생선살을 으깨 만든 요리라고 하는데, 이름은 따로 없다고 했다.
“야전… 그러니까 길바닥에서 내 동료들과 가끔 해 먹던 특식이다. 특무대령님도 좋아하시고.”
오목한 그릇에 음식을 옮겨 담았다. 뜨거운 물이 담긴 물주머니를 바구니 곳곳에 두고 가운데에 그릇을 넣었다.
“식어도 맛이 괜찮지만 그래도 따뜻할 때 먹어야 식감이 좋지.”
따로 덜어놓은 음식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밀리언이 준비해준 죽에 빵을 올리고 옆에 생선 요리를 뒀다.
“먹어봐라.”
한술 떠서 입에 넣었다. 식감이 재미난 요리였다. 맛은 두말할 것도 없고.
“맛있어요.”
“바구니 안에 든 건 이것보다 조금 더 짤 거다. 대령님 입맛엔 그게 더 맞을 테니.”
밀리언이 음식을 입에 넣었다. 가하란은 슬쩍 밀리언의 입가를 살폈다.
가느다란 웃음. 음식 맛이 괜찮다는 증거다.
“더 먹어도 되나요?”
“얼마든지.”
그릇에서 음식을 덜어낼 때였다.
가게 문이 열리며 돈 아저씨가 들어왔다.
가하란은 숨을 몰아쉬는 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나 차분하게 걸어 다니는 아저씨였는데.
“셰, 셰프님. 이거 보셨습니까?”
돈이 신문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격정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시민들이 들고 일어섰어요! 황제는 암살당할 뻔했고요. 근데 무엇보다 중요한 건…… 총수가, 제국의 영웅이 돌아왔다는 겁니다.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황제가 시의회 발족을 선언했어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