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07화 (180/558)

제207화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포일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매만졌다.

어떤 심정일지 덴스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시뮬레이션을 해본 거겠죠?”

포일의 시선을 받은 올란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께서 일정을 바꾸자고 했을 때, 그리고 새로 도입해볼 기술이 있다고 했을 때 솔직히 의구심이 들었어요. 이런 시기에? 이런 상황에? 근데 이걸 보니…….”

개발팀장 포일이 올란트의 계획서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납득이 되네요. 공학도로서 이런 걸 보고 무시할 순 없죠. 가능성도 충분하고.”

“실적용해서 10월까지 결과물을 내야 하는데, 일정이 어떨지 팀장님 의견을 듣고 싶군요.”

포일은 유능한 마나회로 개발자였다. 출간 논문과 약간의 정치적 문제로 교수직을 못 받았을 뿐, 실력은 나무랄 곳이 없었다.

그렇기에 프로젝트 초기 멤버로 뽑힌 거고.

“해봐야 확실하게 알겠지만, 의외로 여유가 있을 것 같아요. 회로를 모두 뜯어내는 게 아니라 베이스 소스 걸 몇 가닥 뽑아내 이용하는 거니까.”

포일이 계획서를 다시 잡았다.

“어려운 접근 방식은 아니에요. 베이스 소스를 이용해 자원 관리를 한다, 여기까진 다들 생각했던 거니까요. 하지만 이상하네요. 마력 회로에 층을 나눈 후 베이스 소스를 끌어다 쓸 생각을 왜 못 했을까요? 이리도 간단한 것인데.”

자조적인 웃음을 담아 말하던 포일이 올란트를 바라봤다.

“아, 치프님의 발견을 폄훼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이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한 제 머리가 한심해서 그런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 아까 선배님과 얘기를 나눴는데…….”

올란트가 검지로 기획서를 가리켰다.

“저 역시 이상한 느낌을 받았어요. 지금 보면 너무나도 단순한 개념이에요. 떠올리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죠. 하지만 저 역시도 얼마 전까지 이런 식의 접근을 상상하지도 못했어요.”

올란트가 눈을 찌푸렸다.

“얻어걸렸다는 표현조차 어울리지 않아요. 그냥, 그냥 한순간 떠올랐어요.”

“그게 치프님의 장점 아닐까요? 다른 사람과는 다른 시선으로 해석하는 게…….”

“아니요, 팀장님. 이번 건은 좀 이상해요. 보셨으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베이스 소스를 이용해 회로를 간소화하는 것. 덴스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체면 차리지 말고, 또한 추켜세울 생각하지 말고 냉정하게 얘기해보죠. 올란트가 발견해낸 방식은 그리 놀라운 게 아니에요.”

“맞아요, 선배. 이건 마나회로, 마력선 도안을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쉽게 떠올릴 구조예요. 아니, 떠올리지 못하는 게 말이 안 될 정도로 단순해요.”

덴스는 포일을 바라봤다. 음, 하며 계획서를 보던 포일이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 말씀하신 대로 너무나도 당연해 보여서 이걸 왜 몰랐는지 이상할 정돕니다. 끓는 물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걸 보고도 물이 뜨겁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수준이에요.”

이야기할수록 기이함이 더해진다.

왜 이걸 몰랐을까?

이토록 당연한 것을, 이토록 자명한 것을 왜 여태껏 생각해내지 못 했을까?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방해한 듯한 느낌마저 드는군요.”

포일이 말했다.

“누군가가 방해를 했다?”

“그냥 답답해서 해본 소립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거든요. 아마 다른 공학도들한테 이걸 보여주면 같은 소리를 할 겁니다. 아니, 이걸 왜 몰랐을까?”

다들 말이 없어졌다.

덴스는 펼쳐진 기획서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여기까지 하죠.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으니 내일부터 바빠질 겁니다.”

“이 개선안을 모두에게 공개하고 재조정에 들어가야겠군요.”

“그렇게 해야죠. 아마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걸 이해 못 하고 의아해하는 연구원이 있다면 여기에 있을 자격이 없는 거죠.”

포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얘기가 나온 김에 A섹션 쪽만 살짝 건드려 보죠. 가동률이 78%라 했으니 그쪽을 건드려 보면 답이 나올 겁니다.”

연구실에서 나와 격납고로 향했다. 테스트용으로 분리해놓은 유사 정령으로 다가갔다.

“치프님께서 시뮬레이션을 해봤다고 하니, 실적용을 바로 해보죠.”

포일이 감각기를 끼고 손을 내밀었다. 가시화된 마력선이 눈앞에 펼쳐졌다.

수없이 많은 까만 점이 허공을 점유했다. 포일이 손가락을 움직여 점의 배열을 바꿨다.

“시뮬레이션 없이도 가능하겠습니까?”

덴스가 옆에서 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조율은 제국 내에서 저보다 잘하는 인간이 없을 겁니다.”

자만이 아닌 근거를 갖춘 자신감.

덴스는 미소를 짓고 조율이 끝나길 기다렸다.

테스트용 유사 정령의 외피를 들어냈다. 회로 기억을 담당하는 엘리멘트 패널이 노출됐다.

포일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감각기에 연결된 그랑겔 툴이 패널에 마력선을 그려 넣었다.

“물리적으로 새겨 넣은 베이스 소스라 끌어다 쓰려면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그래도 못 해먹을 정도는 아니에요.”

분주히 움직이던 툴이 한순간 멈췄다. 포일이 뒤로 물러서며 모노클을 꼈다.

“완벽하진 않지만 이 정도면 꼬임은 없을 겁니다.”

“가동해보죠.”

커넥터에 연결된 마나응축봉에서 격렬한 파장이 흘러나왔다.

덴스는 테스트용 유사 정령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병 쪽으로 옮겼다.

구동음이 들려왔다. 액상 근육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거병 내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섬유처럼 가늘게 뿜어진 액상 근육이 관절을 휘감았다. 외장갑을 분리해놓은 상황이라 내부 변화가 한눈에 들어온다.

골격인 탈로스 위로 액상 근육이 덧대지고, 마나를 공급받은 각 모듈이 작동 점검에 들어갔다.

덴스는 가시화 패드를 바라봤다.

마나 분포도가 이상적이었다. 액상 근육 활성도도 기대치 이상이었다.

“마나 소모량은?”

올란트를 보며 물어봤다. 마나응축봉 옆에 서 있던 올란트가 환희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조약돌의 기동 소모량은 180u였어요. 그런데 지금 작동 점검을 끝냈는데 40u입니다. 선배님, 예상했던 절감률을 웃도는 수치에요. 이건…….”

말을 잇지 못하는 올란트였다. 덴스는 후배에게 다가가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네가 해낸 거다. 이건 우리가 꿈꾸던 발견이야.”

“다 같이 이뤄낸 거예요, 선배.”

포일이 감각기를 하늘로 집어 던졌다. 탄성을 내뱉으며 펄쩍 뛰는데 그 소리에 격납고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무슨 일이야?”

필렌이 다가왔다. 가동 중인 조약돌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몸값이 아주 비싸졌어요. 황가와 의회, 양측 모두 저희를 일방적으로 몰아세울 순 없을 겁니다.”

덴스는 진동하는 거병을 바라보며 말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또 하나 해냈나 보네. 잘됐어. 교섭 테이블에 올릴 수 있는 카드가 많아질수록 우리한테 유리하니까.”

덴스는 말없이 올란트를 바라봤다. 포일과 함께 시스템적으로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설명해주고 있었다.

세상을 바꿀 천재.

이젠 질투심조차 경외심으로 바뀔 지경이다.

어쩌면 저놈의 앞길을 닦아주고 보좌해주는 게 인간 덴스의 역할인지도 모른다.

순응하고 수긍할 차례인가.

찬란한 별과 동시대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분명 축복받은 인생이다.

동떨어진 시대에 태어났다면 역사적인 순간을 목도하지 못했을 테니까.

“바람 좀 쐴까?”

필렌이 팔을 툭 치며 턱짓했다. 필렌을 따라 격납고 밖으로 나왔다.

제법 시원한 봄바람이 얼굴을 스쳐 간다.

“올란트의 작품이야?”

“예. 저 녀석이 또 해냈어요.”

“그래서 그런 표정이었네.”

덴스는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티가 나던가요?”

“아니. 그냥 느낌이 그랬어. 존중과 질시. 그 미묘한 줄다리기.”

“못난 선배죠? 부끄럽네요.”

“왜 부끄러워. 사람이면 응당 그런 감정을 느껴야지. 그냥 헤벌쭉 웃으며 넘기는 놈들보단 훨씬 좋아.”

덴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독 밝은 별이 눈을 찔렀다.

“올란트, 저놈은 공학자들의 길라잡이가 될 겁니다. 저와 달리 저놈은 방향을 제시하거든요.”

“내가 봐온 덴스 교수는 올란트 못지않게 잘하고 있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덴스는 격납고 안을 슬쩍 봤다.

다들 마나응축봉 앞에 모여 환호를 지르고 있었다.

“학자로서 새로운 지식 세계를 경험한다는 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행복이죠. 저 역시 즐거워요. 감사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옹졸한 인간 덴스는 후배를 보며 시기심을 품어요. 왜 나는 깨닫지 못했을까, 왜 바로 앞에 있는 것을 보지 못했을까.”

다른 사람한테는 털어놓지 못할 말이다. 하지만 필렌 앞에서는 속에 든 말을 꺼내놓을 수 있었다.

책임연구자로서 이곳에 있지만, 덴스가 생각하는 실질적 리더는 필렌이니까.

“그럼 더 궁리해봐. 더 노력해보고.”

“하하하, 가혹하시네요.”

“옹졸한 인간 덴스라며. 원래 옹졸한 인간은 포기를 몰라.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지. 그리고…….”

필렌이 올란트 쪽을 보며 말했다.

“가끔 천재한테 한 방 먹여주면 즐겁잖아?”

“그게 될까요?”

“덴스. 네가 올란트한테 품은 그 질투, 저기 있는 수많은 연구원들이 너를 보며 품고 있어. 너 역시 누군가한테는 질투 나는 천재야.”

말을 끝낸 필렌이 싱긋 웃었다.

“물론 둘 다 나한테는 안 되지만. 난 재능을 갖춘 노력의 천재거든.”

“반박할 수 없는 농담이라 좀 짜증이 나는군요. 제가 듣기로 필렌 경의 과거 모습은 이렇지 않았다고 하던데.”

필렌이 고개를 까닥였다.

“얌전한 애였지. 이리저리 치이는 애였고. 자기주장이라고는 없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인형. 옹졸한 덴스보다 더 못한 인간.”

“그런데 어떻게 바뀌신 거죠?”

“뻔한 거 아니야? 사랑이지.”

“……아, 예.”

맹한 공백이 잠깐 이어졌다.

덴스는 풋 하고 작게 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격납고 안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안에 있던 올란트가 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중에 필렌 경께 물어봐. 웃지 않고는 못 배기는 얘기를 해줄 테니까.”

박수를 한 번 치고 격납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왕 모인 거 구동 테스트까지 해봅시다. 기존 데이터는 폐기하고 새롭게 시작할 거니 아주 바빠질 겁니다.”

새로운 시작이지만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마나회로를 조금 더 가다듬고, 이해 가능한 범주를 설정해 도식화하면 개발 일정도 획기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마나 잔여량을 고민하지 않고 기동 테스트를 할 수 있다는 게 최대 장점이었다.

소형화를 이룬 거병에 올란트가 발견한 회로 구조를 적용하면…….

마나응축봉 하나로 한 달 이상 작전을 수행하는 거병이 탄생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효율이다.

황가와 의회가 이걸 포기할 리 없었다.

알렝이란 배경을 잃었지만 의도치 않은 곳에서 활로가 뚫렸다.

향후 계획을 머리로 정리하며 연구진들을 한데 모을 때였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전 이해가 되질 않네요. 이게 왜 가능한 거죠? 어째서 오류 없이 작동이 되는 건가요?”

연구원 한 명이 의문스러운 눈빛을 던졌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멍해졌다. 이곳에 모인 공학도들은 이미 검증이 끝난 상태였다.

우수하다는 표현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인재들.

근데 이 간단한 회로 구조를 이해 못 한다?

그때였다.

“저도 이해가 안 됩니다.”

“어째서 꼬임이 발생하지 않는 거죠?”

덴스는 눈을 찌푸렸다.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원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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