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6화
쉽지 않은 길이라는 거, 잘 알고 있었다. 부침을 거듭하다 자빠지고 웃고 울게 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이 맥락 안에서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알렝 국장의 죽음.
이건 맥락에서 한참 벗어난 일이었다.
아니, 죽음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국장이 지병으로 세상을 등졌다면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사고에 휩쓸려 소천(召天)했다면 운명의 신을 욕하며 울분을 토해냈을 것이다.
하지만 알렝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자살. 결과만 봐도 당혹스러운데 과정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 정도다.
황제가 기거하는 왕성을 날려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맥락. 그 읽어낼 수 없는 흐름이 덴스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사람 앞날은 알 수 없다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야. 그렇지?”
덴스는 눈앞에 내밀어진 잔을 바라봤다. 오렌지빛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대낮에 술이라니. 평상시였다면 필렌을 바라보며 한 소리 했겠지만, 지금은 군말 없이 받았다.
혀를 감고 목으로 넘어간 술.
아무 맛도, 어떤 느낌도 없었다.
혀만 고장 난 건지 아니면 정신을 비롯해 몸뚱이 전체가 맛이 간 건지, 알 수가 없다.
“이거 더럽게 독한 술이거든? 근데 아무 맛이 안 나.”
필렌이 말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아무 맛이 안 나는군요.”
잔을 내려놨다.
“방향은 잡혔어. 대책도 마련했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넘어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악은 면할 수 있을 거야.”
최악을 피한다. 암울한 현실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필렌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항상 하늘을 향해 올라가 있는 입꼬리가 수평을 그리고 있었다. 고심이라고는 전혀 모를 것 같던 사람이 탁한 눈으로 정면을 본다.
“사람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 말했지. 불안한 모습을 보일 순 없으니까.”
“덕분에 다들 마음을 다잡은 것 같습니다.”
“덕분은 무슨. 다들 덴스 널 믿고 따르는 게 보이니까, 난 그냥 네 말에 힘을 실어줬을 뿐이야.”
덴스는 안경을 벗으며 필렌을 바라봤다.
“정치권에서 언제쯤 압박이 들어올까요? 저희를 계속 내버려 두지는 않을 텐데.”
“왕성이 사라졌어. 성도도 2번이나 테러를 당했고. 사태를 수습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거야. 게다가 길리우드라는 놈도 잡아야 할 테니.”
“길리우드.”
황가가 이번 테러의 주동자라 지목한 인물.
“명목상 내세운 인물이겠죠?”
“사건 정황도 모르고, 갑자기 이름 하나가 툭 튀어나왔으니까 의심은 해봐야지.”
필렌이 낮은 테이블에 발을 올렸다.
“튤립 사태부터 뭔가 삐거덕거리기 시작했지. 전쟁으로 달아오른 제국이 채 식기도 전에 이 꼴이 났어. 이다음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기도 싫어.”
“파벌 문제였을까요?”
“글쎄. 황가와 의회. 그 둘이 투닥거리는 게 제국의 역사라지만 결국 둘 모두 권력을 쥐고 있는 실세들이야. 싸우지만 목덜미는 물어뜯지 않아. 하지만 튤립 사태는 좀 달랐지. 아잔탄스가 명백하게 선을 넘어버렸어. 황제도 강력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겠지.”
덴스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댔다. 정치권 이야기는 듣기만 해도 신물이 올라온다.
“황가와 의회, 양측 분위기가 안 좋았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이해가 안 됩니다. 알렝 국장은 당파 싸움에서 한 걸음 물러난 분입니다.”
“그렇지. 신흥 귀족의 필두로 취급받지만, 사실 그분은 귀족이란 타이틀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어.”
“그런 분이 왜 갑자기 목숨을 버려가며 왕성을 폭파시킨 건지,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유서에는 민중 봉기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적혀 있었다.
심정이야 납득한다고 쳐도 시기와 방법, 둘 다 이상했다.
“온건하신 분이었지. 강직한 행정 처리 때문에 가끔 강경파란 이야기가 돌긴 했지만, 정말 필요한 일에 한해서만 힘을 쓰셨어. 이치에 맞는다면 자기 뜻도 굽히시는 분이었고.”
“필요한 일.”
이번 왕성 폭파가 목숨을 버려 가면서까지 했어야 할 일이라는 건가?
“언젠가 시민들이 자신의 손으로 권리를 쟁취하고 자유를 이뤄낼 것이다. 알렝 국장께서 하신 말이야. 누구보다 시민들의 응집력과 지성을 믿었던 분이지.”
덴스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알렝은 시민을 믿고 지지하는 쪽이었다. 그렇다면 왕성 폭파라는 극단적인 선택은 더욱 이상하다.
“누군가 국장의 등을 떠민 걸까요?”
“국장님은 말이야, 목에 칼을 들이밀고 협박해도 차분히 눈을 감고 기다릴 사람이야. 불의와 타협 같은 건 없어.”
“그렇다면…….”
필렌이 남은 술을 다 마신 후 말했다.
“우린 아무것도 알 수 없어. 예측하기엔 사건의 규모가 너무 크잖아. 무엇이 국장님의 마음을 바꾸게 했는지, 어째서 통보도 없이 일을 진행한 건지,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 거야. 본인만 답을 알 테니.”
덴스는 연구실 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곧 지독한 어둠이 찾아올 것이다.
“길리우드. 그자가 실제로 존재하고 잡힌다면, 이번 일을 어느 정도 규명할 수 있을까요?”
“잡혀도 문제야. 무엇 하나 신용할 수 없으니까. 시민들은 이제 황가의 말을 믿지 않을 거야. 길리우드를 잡아내도 그놈이 진범인지, 아니면 면책을 위해 만들어낸 인간인지 의심부터 할 테니까.”
“차라리 일이 더 복잡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우리한테도 시간이 생길 테니까요.”
혼란이 잦아드는 순간, 국경지대에 비밀리에 세워진 이 격납고로 제국의 인사가 찾아올 것이다.
“이르면 네 달 뒤. 늦으면 12월쯤에 황가에서 소식이 오겠지.”
“그때까지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결과물을 내야겠군요.”
“여기서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해봐야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여기 계셨네요.”
연구실 문을 열며 올란트가 들어왔다. 몇 시간 동안 바삐 움직였는지 상당히 피곤해 보인다.
손에는 서류 뭉치를 들고 있었다.
덴스는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나도 도왔어야 했는데.”
“선배만큼 힘들진 않으니까 괜찮아요.”
필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이서 얘기해.”
필렌이 사라지고 연구실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침묵을 깬 건 올란트였다.
“재정 상태를 재차 확인해 봤어요. 필수품 재고량도 검점했고요.”
“상황은 어때?”
“회의 때 예상했던 대로 앞으로 10개월은 넉넉하게 버틸 수 있어요.”
“그나마 희소식이네.”
“5월에 물자 보급을 받아놓은 게 컸어요. 그걸 미뤘으면 손쓸 방법이 없었을 거고요.”
“버틸 체력은 되는데, 문제는 시간이야.”
덴스는 필렌과 나눴던 대화를 간추려 올란트에게 전했다.
“이르면 10월이라. 저희 1차 목표가 10월 완성이니, 어찌저찌 결과물은 낼 수 있겠네요.”
주먹 쥔 손을 내려다보던 올란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황가 쪽에서 협상을 제안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저희를 재판대에 세우면…….”
“연구 결과물보다 반역자의 목이 필요하다면 협상은 없겠지.”
덴스는 목덜미를 만졌다.
‘조약돌’에 적용된 각종 마법공학보다 민심을 달랠 피가 필요할 수도 있다.
“역모죄로 끌려가게 되면 가족들 역시…….”
“무사하지 못하겠지. 본보기로 삼을 테니까.”
아내와 딸의 웃음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알렝 국장과 한데 묶여 처분당한다면, 성도에 있는 가족 역시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주억거리던 올란트가 쥐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읽어 보시겠어요?”
“뭔데.”
“보시면 알 거예요.”
재고 수량 보고서라면 지금 볼 필요는 없을 텐데. 의아해하며 종이 뭉치를 들췄다.
흰 여백에 고정됐던 눈동자가 글자를 하나씩, 하나씩 읽어 나갔다.
덴스는 입을 다물고 침을 삼켰다.
눈동자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활자가 뇌에 새겨질 때마다 감탄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수식화된 마력선 구성을 보고 그 아래 그려놓은 도안을 훑었다.
기존에 존재했던 개념을 조금씩 틀어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냈다.
“얼마 전에 생각해낸 겁니다.”
덴스는 기획서에서 눈을 떼고 정면을 바라봤다. 올란트의 신중한 눈빛이 보인다.
“오토마타의 베이스 소스, 그건 건드리기 어렵죠. 우리가 그 뜻을 알아내기도 힘들뿐더러 멋대로 건드리면 유사 정령 자체가 작동을 멈추니까요. 하지만 소형화를 하려면 회로 축소는 필연적이고, 밀접도를 높이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봤어요.”
“그래서 생각해낸 게 이거다?”
마나를 붙들어 둘 수 있는 금속으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베이스 도안을 그린다.
그다음 이해 가능한 마력 회로를 덧씌우는 게 현 시대의 유사 정령 제작 방식이었다.
“마력회로를 각 층으로 나누어 오류가 일어나지 않게 설정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지. 근데 이 방식대로라면…….”
“베이스 소스에 사용된 마력선을 1차 레이어에서도 사용해보는 겁니다.”
“겹침이 발생해. 꼬임도 일어날 거고. 이런 발상을 다른 공학자들이 안 해본 건 아니야.”
“하지만 선배, 거기에 적힌 대로 해본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덴스는 입을 다물었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기획서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이유.
올란트의 접근 방식은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유사 정령 작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깔아두는 베이스 소스. 그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마나를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마력선 밀접도를 올리는 건 어려워요. 하지만 베이스 소스에 깔린 회로를 이용해 회로를 간소화한다면 꽤 여유가 생겨요.”
덴스는 올란트의 입가를 바라봤다. 무의미한 얘기를 책상 위로 끌고 올 후배가 아니다.
“이렇게 말을 꺼냈다는 건…….”
“시뮬레이션 해봤어요.”
“결과는?”
“꼬임이 발생하긴 했어요. 하지만, 작동에 성공했어요.”
“조약돌의 유사 정령을 기반으로 한 거야?”
“예.”
“가동률은?”
“78%. 유사 정령이 자체 기능 점검으로 내린 수치예요.”
“마나 소모는?”
“꼬임을 잡고 기동에 성공하면 지금의 절반, 아니 그 이상의 마나를 절약할 수 있어요.”
절반.
단 1%를 줄이기 위해 제국의 교수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하지만 성과는 시원치 않았다.
덴스는 재차 기획서를 살폈다.
대담한 접근이지만 개념 자체는 기존에 존재하던 것이다.
“한 번쯤 다들 생각하고 해봤을 거야. 하지만 이다음 단계는 내다보지 못했지. 이렇게나, 이렇게나…….”
간단한 것인데.
차마 뒷말은 내뱉지 못했다.
상식을 초월한 발상과 발견이었다면 그저 놀라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올란트가 제안한 방식은 딱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기이할 정도였다.
왜 이 생각을 못 해냈을까?
그토록 많은 교수들이 왜 이 개념에 도달하지 못했을까?
“희한하죠? 저도 떠올리자마자 좀 이상했어요. 어마어마한 발견은 아니에요. 하지만 떠올리기 직전까지 이런 사고 자체를 못 했어요.”
기획서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간단한 걸 십수 년간 알아채지 못하다니.
“선배. 해보죠. 이거라면 황가도 솔깃할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검토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올란트가 자리를 떠났다. 덴스는 몇 시간 동안 같은 글을 계속 봤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덴스는 기획서를 옆에 내려두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내가 이걸 발견해 냈다면…….”
깊은 한숨이 나온다.
천재는 이런 약간의 견해 차이가 만들어내는 걸까.
심란한 마음을 다잡고 일어섰다.
질투할 시간에 움직여야 했다.
“계획을 조금 바꾸겠습니다.”
덴스는 사람을 모아놓고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