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05화 (178/558)

제205화

“37회차. 운동능력 테스트 시작하겠습니다.”

올란트는 기록판을 들며 말했다.

400미터 거리를 두고 꽂아둔 두 개의 말뚝.

왼쪽 말뚝 옆에서 대기하던 거병이 서서히 움직였다.

첫 발은 가볍게.

전고 11미터의 거병, 기체명 ‘조약돌’이 소름끼칠 정도로 낮은 소음을 내며 움직인다.

거병의 경량화와 필렌의 조종실력.

두 개의 뛰어난 특성이 놀라운 조화를 선보였다.

왼발에서 오른발로, 다시 주춧발을 바꾸며 거병이 나아간다.

아니, 뛰어간다.

쿵, 쿵, 쿵! 지면을 차는 소리에서 박자감이 느껴진다.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말뚝을 향해 전진하는 거병은 둔중한 전략병기가 아니었다.

말뚝을 끼고 거병이 선회했다. 왼쪽 발목이 이상적인 각도로 꺾였다.

하중을 지탱하는 모듈과 힘을 분배하는 액상 근육의 컨디션이 최고조였다.

기록을 매기며 모듈조정값 세부수치를 표기해 놓았다. 이상적인 값을 찾아냈다. 조약돌의 성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숫자였다.

한 바퀴 돈 거병이 이번엔 좌우로 뛰기 시작했다.

콰드드득, 지면이 파이면서 한쪽으로 쓸렸다. 무게중심에 급격한 변화가 생겼지만, 필렌은 여유롭게 균형을 잡았다.

좌우로 뛰는 개구리처럼, 조약돌이 이동했다.

훌륭한 퍼포먼스였다. 전진만 아는 거병이 기민한 좌우이동을 해냈다.

물론 외장갑을 모두 착용하고 병기까지 들게 된다면 지금보다 민첩성이 떨어질 것이다.

마법공학의 힘으로 중량을 거둬낸다고 해도 한계치라는 게 있으니까.

거병 개발은 결국 무게, 그리고 마나소모량과의 싸움이었다.

-어, 어!

확성기를 통해 필렌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당혹감에 젖은 목소리.

이유야 금방 알 수 있었다.

신나게 좌우로 뛰던 거병이 왼쪽으로 기우뚱거리다가 이내 바닥에 처박혔다.

쿵! 왼쩍 어깨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올란트는 입을 살짝 벌린 다음 왼손으로 입가를 쓸어내렸다.

바닥에 자빠져 허우적대던 거병이 정지했다. 보아하니 왼쪽 발목, 충격을 흡수하는 기관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하긴.

좌우로 뛰며 50미터만 전진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필렌은 300미터 가까이 뛰며 기체에 부하를 걸었다.

예상치를 웃도는 부담을 모듈이 버틸 수 있나.

“아니, 저걸…….”

지난 몇 년간 실질적으로 조약돌을 제작, 관리해온 개발자들이 탄식을 내뱉고 있었다.

올란트는 그들을 향해 머쓱한 웃음을 보낸 후 거병 쪽으로 뛰어갔다.

체임버 덮개가 열리며 필렌이 올라왔다. 산발한 머리를 손으로 쓱쓱 다듬더니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는 있었어. 무리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감기는 맛이 좋아서 정신차리고 보니 뛰고 있더라.”

“그 말은 저기 계신 연구진에게 해주세요. 보이시죠? 다들 넋나간 얼굴로 보고 있는 거.”

“연례행사니까 이해해줄 거야. 그보다, 이거 너무 좋은데? 감각확장도 수준급이고 무엇보다 기동성이 말이 안 돼. 만약 프레임이 블루아이 정도만 됐어도 더 뛸 수 있었을 거야.”

올란트는 진흙이 뭍은 거병이 장갑을 만지며 외쳤다.

“조약돌은 섬세한 친구에요! 블루아이만큼 튼튼하지도 않고요. 애초에 블루아이와 비교할 수 있는 거병은 몇 없어요.”

“그건 나도 잘 알지!”

필렌이 폴짝 뛰어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4미터는 될 법한 높이인데, 놀라운 신체술이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쓰러지기 직전에 오토마타가 경고해 줬나요?”

“어. 버틸 수 없는 무게라고 알려주더라. 그 말 듣고 약간 오기가 생기서 안에서 이렇게 외쳤지. ‘할 수 있어’, ‘이겨내’ 라고 말이야.”

“응원한다고 성능이 좋아지진 않아요. 부품내구성이 높아지지도 않고요.”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기사와 거병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유대라는 게 있지.”

“유대는 원래 안 보이는 개념이죠. 수치화 할 수도 없고요.”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니. 거병 관련해서는 사람이 너무 삭막해져.”

필렌이 조약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시험기로도 이정도 성능이야. 제대로 된 골격을 갖추고, 액상 근육의 버전도 높인다면 말도 안 되는 기체가 탄생할 거야.”

“아직 갈길이 멀어요. 모든 테이터가 조약돌을 기반으로 한 거라, 새로운 기체에 적용하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걸 어찌저찌 해내는 게 너와 저 친구들의 일이고.”

“공학도들이 들으면 기가 찰 말을 아무렇제 않게 하시네요.”

필렌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엄지를 세웠다.

아른고개의 푸른 기사.

근험한 명칭에서 오는 이미지는 이제 남아있지 않았다.

조금 막무가내고, 성격파이며, 때때로 그 유명한 귀족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자유분방하다.

격없이 지내는 건 좋지만 아주 가끔 격식이란 걸 차렸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덴스는?”

“안에서 충격흡수 장치 점검하고 계세요.”

“그래? 난 일단 덴스한테 가볼게. 말해야할 것도 있고.”

“예. 정리는 저희가 할테니 좀 쉬세요. 오후에도 테스트할 게 몇 개 더 남아있으니.”

“응축봉 잔여량이 얼마 안 될 텐데. 기동할 수 있으려나?”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성도에서 온 여유분이 남아있고, 8월쯤 재보급될 예정이니…….”

올란트는 말꼬리를 흐렸다.

생필품 조달을 위해 마을로 갔던 케이시가 손에 뭔가를 움켜쥐고 뛰어오고 있었다.

“표정이 안 좋은데.”

필렌이 말했다.

숨을 헐떡이며 격납고 앞까지 뛰어온 케이시가 손을 내밀었다. 꾸겨진 신문이 들려 있었다.

“치, 치프님! 이것 좀……”

“무슨 일이에요?”

신문을 넘겨받아 펼쳤다. 뒷면을 쓱 훑었는데 별다른 기사거리가 없었다.

흔들리는 케이시의 눈동자를 보며 신문의 앞면을 살폈다.

미간이 찌푸려진다. 눈에 들어온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이 신문에서만 다룬 건가요?”

오보일 수도 있었다. 교차검증 전까지 믿을 수 없었다.

“제가 다 보고 왔어요. 다른 신문들도 다 똑같았어요.”

올란트는 기사 제목을 다시 보았다.

-왕성 소멸.

“무슨 일이야?”

필렌이 물었다. 올란트는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기사 내용을 읽어주었다.

왕성이 사라졌고, 실행범은 알렝 바르베이며, 배후로 지목된 건 길리우드란 자라고.

“그럴 리가. 알렝 국장이 그런 짓을…….”

필렌이 신문을 빼앗았다. 재빨리 기사를 훑는 눈에 불신이 가득하다.

“지금 난리도 아니에요. 성도에서 막 넘어온 상인 말에 따르면, 자기가 떠나기 직전 성도 분위기는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 했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성도에서 열린 6월 축제에 못 간다고 다들 아쉬워했는데.

올란트는 멍한 머리로 오늘 날짜를 떠올렸다. 5월 27일.

“신문 기사와 상인의 말이 일치했으니 오보는 아니겠네요.”

“이 정도 규모의 사건이라 볼로스까지 단기간에 전해진 거지, 아니었다면 반년 뒤에나 소식을 받아봤을 겁니다.”

연구원 중 한 명이 말했다.

올란트는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바라봤다.

“오후 테스트는 취소하겠습니다. 기체 수거해서 격납고에 보관해주시고, 팀장급들은 따로 보시죠.”

신문을 움켜쥔 채 격납고 옆 개발실로 향했다.

* * *

덴스는 구겨진 신문에 몇 번이고 시선을 주었다. 안 그래도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은데.

헛웃음이 나왔다.

알렝의 죽음에 애도를 표할 여력이 없을 정도였다.

“소장님 쪽에서 연락이 없다는 건….”

덴스는 올란트를 보며 말했다.

“그쪽도 처리해야할 일이 많겠죠. 여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정도로.”

“미치겠군.”

프로젝트 ‘장난기 많은 난쟁이.’

거병 경량화 및 소형화를 목표로 추진된 이번 프로젝트의 총책임자가 바로 알렝 국장이다.

거병 소형화 이후 미개척지 개발건까지 연결돼 있는 거대한 공동작업.

행정2국의 국장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에, 제철소장 멧시언도 책임자로 나섰거늘…….

“나의 죽음이 민중의 봉기로 이어지길 바란다라.”

마지막까지 시민의 편에 서서 목숨을 불태운 사람. 방법이 어땠든 그 숭고한 의지야 경이롭고 존경스럽다.

하지만, 남겨진 자들은?

목숨을 버려야할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있었던 건가?

아니면 여기서는 파악 못한 다른 사유가 있는 것인가.

거병 소형화 역시 민간을 위한 계획이었다.

미개척지 개간으로 국토를 확장하고 시민에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겠다는 그 약속.

“덴스 교수. 이거 현실적으로 생각해야할 문제일세.”

루겐이 말했다. 언제나 중심을 잡아주는 고마운 사람. 하지만 백전 노장 같은 루겐도 오늘만큼은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야겠죠. 저희 자금사정은 어떻습니까?”

“1년 정도는 버틸 수 있네만 그 후는…….”

“1년.”

평상시였다면 희망적인 기간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막대한 연구개발비가 드는 거병 산업에서 1년이란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건 대단한 일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낙관론의 티끌조차 끄집어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알렝 국장이 죽는 순간 모든 게 끝났다. 지원이 완벽하게 차단된 프로젝트.

그 끝은 실패 뿐이다.

“1차 공정기간이….”

“10월입니다.”

대략 4개월 정도면 시험기인 조약돌이 완성단계에 이른다. 그걸 바탕으로 황가와 의회에 접촉해 정치구도를 다잡는 게 올해 목표였다.

하지만 중재자가 되어야 할 알렝이 사망했으니 이 또한 물거품이 됐다.

“자금 여력이 있다면 일단 완성해 보죠?”

필렌이 말을 꺼냈다.

“어차피 황가와 의회, 양측 모두 이곳에 자금이 흘러들어가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어요. 알렝 국장이 전면에 나섰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테고.”

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됐든 간에 결과물을 만들어 놓고 타협선을 찾아보죠. 우리가 원했던 용도로 쓰이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여기 남은 분들의 목숨을 보장받는 형식으로 자료를 넘길 수 있으니.”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눈이 따금거린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위염이 순식간에 재발한 것처럼 위가 쓰리다.

알렝 국장과 연관이 있다.

게다가 거병 개발 프로젝트였다.

알렝이 왕성을 날려버린 순간, 여기 남은 자들은 제국 전복을 꿈꾼 테러집단이 된 것이다.

물론 황가와 의회는 알고 있을 터다. 이곳이 테러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걸.

하지만 진실은 언제나 쓸모없는 법.

“조만간 성도에서 사람이 오겠죠. 그건 내가 상대할 게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했던대로 연구에 힘써요. 정치는 내 선에서 처리할 테니.”

말을 끝낸 필렌이 덴스를 바라봤다.

“그래도 괜찮겠지?”

덴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거 외에는 방법이 없겠군요.”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해오면, 나도 블루아이 끌고 성도 탐방을 할 거라고 맞수 놓을게.”

필렌이 생각 좀 하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덴스는 각 팀장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연구성과가 우리 목숨이라 생각하죠. 넘겨줄 지언정, 개죽음은 피해야 하니 마무리 지어봅시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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