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04화 (177/558)

제204화

“그렇지. 아주 오래전에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했다고 하지만, 영혼세계가 입증되면서 그 논의는 끝나 버렸지.”

“한편 의식과 영혼은 별개의 것으로 취급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아직 명쾌하게 답이 내려지지 않은 영역이야. 다른 것으로 치부하는 자도 있고, 같은 것으로 여기는 자도 있지.”

유단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말했다.

“영혼은 모든 장소, 모든 시간에 존재하는 기억입니다.”

“틀림없지.”

“오크족 주술사가 말하길, 영혼에는 자의식이 없어 설령 만난다고 한들 생존해 있을 때처럼 대화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확인할 수 없는 검증 절차가 몇 번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솔직히 모르겠다. 네크로맨서들이 불러낸 영혼은 분명 대답을 해. 물론 그게 자의식에 의거해 의지를 표명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한 정보 발산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단은 손깍지를 끼며 준비해 온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 교수님께선 영혼, 혹은 인간의 의식이 다룰 수 있는 정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보라.”

퀜이 안경을 벗었다. 사용감이 있는 천으로 안경알을 천천히 닦는다.

“민감한 얘기군.”

“그렇습니까?”

“중앙 성당이 제국의 실세이던 시절에 방금 같은 발언을 했다면, 아마 으슥한 곳으로 끌려갔겠지.”

“논의 자체가 문제라면 여기서 그만…….”

교수가 불편해한다면 대화를 끝내야 했다. 아직 연구동에서 얻어야 할 게 많으니까.

퀜이 안경을 썼다. 깨끗해진 안경알 너머로 웃고 있는 눈이 보였다.

“예전 일이야. 지금이야 법적으로 문제 될 것도 없고. 하지만 그런 주제 자체를 불경하게 여기는 자들도 있으니 발언할 땐 조심해야겠지.”

“주의하겠습니다.”

퀜이 검지로 턱을 툭툭 두드렸다.

“3층에 있는 라우켄 교수와 엥겐 교수, 그리고 기빈 학파 쪽은 그런 주제에 민감하니 신경 쓰고.”

“예.”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영혼을 다룰 수 있는 정보라 생각하느냐…….”

퀜이 눈을 살며시 뜨며 유단을 바라봤다.

“넌 어떻게 생각하지?”

“저는 세상 모든 것이 정보라고 생각합니다.”

“정보. 인간의 고귀한 영혼조차 정보에 불과하다는 거냐?”

“영혼에 가치를 매긴 건 같은 인간입니다. 무엇보다 고귀하다는 근거가 부족합니다.”

“정말 위험한 말이군. 그래서 재미있지만.”

퀜이 책을 한 권 들었다.

“한 인간의 역사를 책에 온전히 옮겨 담을 수 있다면, 그걸 영혼이라 부를 수 있겠군. 네 의견대로라면 말이야.”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중앙 성당의 고매한 성직자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존재해서 인간을 고결하게 만든다고 하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지?”

유단은 고개를 저었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실재하는 걸까요? 오히려 그런 모호한 표현이야말로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 생각합니다.”

“너는 인간을 동물과 다를 바 없다고 믿는구나.”

“예, 그렇습니다.”

퀜 교수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우열이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정보만이 모든 걸 대체한다.”

자리에서 일어선 퀜이 벽으로 걸어갔다.

벽에는 풍경화가 하나 걸려 있었다. 하늘 높이 뜬 태양 밑에 말라비틀어진 나무들이 그려져 있었다.

“영혼을 다룰 수 있는 정보라고 한다면, 넌 그걸로 뭘 하고 싶은 거냐?”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만.”

“다들 망상 하나씩은 품고 살지. 말해봐.”

유단은 퀜이 만지작거리던 책을 바라봤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간의 영혼을 이해 가능한 정보의 형태, 예로 들자면 책 같은 걸로 변형시킵니다.”

“그래서?”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다른 책에 옮기는 겁니다.”

“다른 책?”

퀜이 그림에서 시선을 떼고 유단을 바라봤다.

“형태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아무래도 좋다는 건 틀린 말이야. 왜냐하면 그릇에는 규격이 있으니까. 영혼을 정보화해서 옮겨 담는다면 그에 걸맞은 그릇을 준비해야겠지. 인간의 영혼을 담을 그릇. 인간의 육체 외에 또 뭐가 있지?”

유단은 대답 대신 두 손을 모으고 옅은 웃음을 보였다.

“좋아, 망상을 끝까지 밀어붙여 보자고. 영혼을 정보화해 옮겨 담을 수 있는 형태로 만들었다 치자. 하지만 빈 그릇을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살아 있는 인간의 의식을 뽑아내 빈 그릇으로 만든다면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생각해봐. 우리가 처음 논했던 게 뭐지? 인간의 영혼과 의식의 동일성이야. 네 말대로 어찌저찌해서 몸에 든 영혼을 축출해 낸다고 해도 그릇에 의식이 남아 있다면? 반대로 영혼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면?”

유단은 퀜의 말을 들으며 눈썹을 씰룩거렸다.

문제점을 정확하게 잡아냈다.

유단의 몸을 점거했을 때, 가장 우려했던 점이 영혼의 존재였다.

유단의 의식, 정신은 육체 깊숙한 곳에 처박아 두었다.

인간의 몸은 기계가 아니기에 정확히 어디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자의식이 관장하는 영역 바깥으로 밀어낸 건 확실했다.

유단의 몸을 차지한 뒤부터 몇 번이고 영혼의 존재를 감각해보려 했지만, 아쉽게도 ‘유단의 영혼’은 느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영혼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을 했으나 지금까지 별다른 악영향은 없었다.

모든 장소와 모든 시간에 존재하는 기억. 그리고 영혼 세계.

짧은 고민 끝에 무엇인가 번뜩였다.

그리고 도달한 결론.

“교수님께서는 인간의 몸 안에 영혼이 들어 있다고 여기십니까?”

퀜이 입가에 미소를 거두었다.

“인간의 육신은 영혼을 담는 값싼 껍데기라는 말이 있지. 그만큼 영혼을 중요시 여기고 있고. 하지만 넌 다르게 생각하고 있구나.”

“영혼이란 특수한 무엇을 품고 있다는 가정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닐까, 이런 상상을 했습니다.”

“영혼은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다?”

퀜이 팔짱을 끼며 벽에 기댔다.

“육신에 담겨 있던 영혼이 죽음을 기점으로 영혼세계로 옮겨 가는 것이 아닌, 애초에 육신에는 영혼이란 게 없었다?”

“뇌가 관장하는 의식. 이것만이 육체에 존재하고 영혼은 영혼세계에만 있는 게 아닐까요?”

퀜이 검지를 흔들며 방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크족 주술사는 인간을 만지는 것으로 영혼을 들여다보고, 미래를 예언하다고 하지. 육체에 영혼이 없다면 그러한 행동은 설명이 안 되는데?”

“교수님. 오크족 주술사는 모든 것에 통달한 자입니까?”

퀜이 우뚝 멈춰 섰다.

“통달한 자. 만물을 깨우쳤다고 볼 수는 없지. 오크족 주술사 역시 영혼세계의 영혼과 대화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오크족 주술사는 영혼세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하지만, 주술사가 모든 걸 깨우쳤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유단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인간의 육체는 시간에 묶여 있습니다. 하지만 영혼은 아니죠. 모든 장소, 모든 시간에 존재하는 기억이니까요. 육체가 죽음에 이르러도 영혼은 존재합니다. 어쩌면 육체가 존재하기 전에도 영혼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영혼의 탄생 시기와 육체의 생성 시기가 같지 않다? 재미난 관점이야.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육체보다 영혼이 앞선다. 이 간단한 발상을 어째서…….”

헛헛한 웃음을 짓던 퀜 교수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지 입을 다물고 책상만 바라본다.

유단은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입가가 씰룩거리고 있었다.

불현듯 떠오른 가설.

육체 이전에 영혼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떠올리자마자 희열에 휩싸였다.

대단한 발견도 아니었다.

그저 관점을 약간 비틀었을 뿐이다.

누구나 쉽게 해낼 수 있는 발상.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십 년 동안 이 개념에 접근하지 못했다. 영혼세계에 관해 그토록 오랫동안 탐구해 왔는데…….

말할 수 없는 것.

조금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이 이제 막 생성된 느낌이었다.

아니, 누군가 감춰놓은 진실을 기어이 들춰낸 기분이기도 했다.

“이상하군. 정말 이상해. 왜 이 생각을 지금까지 안 했을까? 어째서?”

퀜 교수가 입을 열었다.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넌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한 거냐?”

“저도 방금 떠올랐습니다.”

“방금?”

“예.”

유단은 풍경화에 눈길을 주었다.

밝은 태양에 말라비틀어져 가는 나무들.

“교수님.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숨겨놓은 걸 찾아낸 기분이 듭니다.”

퀜이 책상을 탁 소리 나게 쳤다.

“나도 똑같아. 마치 사기를 당한 것 같아. 코앞에 진실이 있는데, 누군가 천으로 가려놓은 거지. 그리고 방금 그 천을 들춰낸 거고.”

“이리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개념인데, 마치 통제당한 것처럼 생각해내지 못했습니다.”

유단은 어머니, 위대한 창조주를 떠올리며 말했다.

“마치 설계자의 의도처럼.”

“설계자의 의도?”

“예. 진실이 눈앞에 굴러다녀도 그걸 감지해낼 눈을 제거당한다면, 우린 진실을 볼 수 없으니까요.”

“설계자, 신을 말하는 거겠지. 재미있는 표현이야. 설계자. 만약 그 설계자가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보는 걸 원치 않았겠죠.”

퀜이 입꼬리를 아래로 내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보여주기 싫었다면 애초에 치워냈으면 될 일이야. 게다가 이런 식으로 깨달을 여지조차 남기면 안 되고. 신은 완벽한 설계자니까.”

“신이 완벽하다는 전제라면…….”

“어쩌면 우리가 깨달아주길 바랐을 지도 모르지.”

“테스트인가요?”

“그렇지, 테스트. 선별. 하지만 무엇을 위한 선별일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고민에 잠길 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며 퀜 교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퀜이 고개를 틀어 시계를 바라본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

유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교수님의 시간을 너무 뺏은 것 같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무척이나 흥미롭고 재미있었어. 마음 같아서는 날 새도록 얘기해보고 싶었는데, 선약이 있어서 말이야.”

퀜이 모자와 외투를 챙겼다. 곁으로 다가온 퀜이 유단의 어깨를 두드렸다.

“과감한 주제 선정과 전개였어. 설계자 얘기는 좀 허무맹랑한 것 같지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긴 했으니까. 그리고 영혼이 육체에 선행한다. 이 점에 대해선 다음에 꼭 다시 얘기하자고.”

“알겠습니다, 교수님.”

퀜이 시간 날 때 언제든 찾아오라며 문을 열어줬다.

밖으로 나왔다. 나이 든 신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는 게 보였다.

선약을 잡은 손님인 것 같다.

퀜 교수에게 인사하고 물러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 만약 설계자가 완벽하지 않다면, 방금 느꼈던 기이한 감각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글쎄. 우리가 신의 의도를 읽어내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기해 보자면…….”

퀜이 모자를 눌러쓰며 말했다.

“세계가 붕괴할 조짐이라는 거겠지. 설계의 허점은 그런 거니까.”

다음에 또 얘기하자고, 퀜이 눈웃음을 남기고 떠나갔다.

유단은 텅 빈 교수실을 들여다보다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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