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지난 3월과 4월, 두 달에 거쳐 성도에서 일어난 테러가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사상자만 천 이상에 달하는 유례없는 공격. 거기다 제국의 상징인 왕성까지 잃었다.
“큰일이군요.”
신문에 눈길을 둔 채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담담한 얼굴이네요.”
유단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좀 더 놀라는 편이 나을까요?”
탄드라 교수가 빤히 쳐다보다가 풋 하고 웃었다.
“내 취향에 맞는 농담이에요.”
‘이전의 유단’처럼 행동하는 건 진즉에 포기했다. 따라 하는 것 자체가 위화감을 조성할 테니까.
그러니 변화한 모습을 보이는 게 차라리 나았다. 이게 내 본래 성격이기도 하고.
기사를 계속 읽었다.
성난 민중이 도심 곳곳에서 집회를 열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빈센달.’ 신문에서는 이 남자가 민중의 구심점으로 작용할 거라고 하는데, 윗분들이 지켜보고 있을까요?”
“정치계도 골치가 아프겠죠. 평상시였다면 즉결 처분했겠지만, 지금은 민심이 흉흉하니까요. 섣불리 손댈 수 없겠죠.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상황이 그 정도로 심각하군요.”
신문을 둘둘 말아 책상에 올려두었다. 탄드라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3월에 성도 전역에서 일어난 테러는 민간에 치명적인 타격을 줬어요. 천 단위가 넘는 사상자가 나왔다고 하니 말로써 무마할 수 없는 피해죠.”
“4월 테러는 귀족 거주지를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신문을 흘깃 보며 말했다. 교수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네. 귀족 거주지 상공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명체, 아니, 마법생명체가 나타나 도심을 파괴했어요. 다행히 신속한 대처로 인명 피해는 많지 않았어요. 물론 3월 테러에 비하면 희생자가 적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시민들이 보기엔 뭔가 이상했겠죠.”
“이상하다고요?”
교수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상황이 조금 복잡하게 됐어요. 일단 올해 초에 있었던 성도 살인 사건, 기억하나요?”
유단은 수집한 자료를 기억해냈다.
“실더가 일으킨 살인 사건. 이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요. 그 범행으로 희생된 건 무고한 시민이었죠. 귀족 중 죽은 사람은 없어요.”
“성도에 귀족이 많다고는 하나 대다수는 자유시민을 필두로 한 시민으로 구성돼 있으니까요. 사상자가 많이 나오면 응당 시민 쪽에 수가 많겠죠.”
“맞아요. 확률적으로 그렇게 되죠. 하지만 민심이란 게 숫자를 들이민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니에요. 그 뒤에 일어난 3월 테러에서 또 다시 시민들이 희생당했어요. 그리고 이어진 4월 테러. 테러 직후 귀족 희생자가 상대적으로, 아니, 이상할 정도로 적다는 이야기가 시민들 사이에서 흘러나왔죠.”
희생당한 인간의 숫자를 언급하며 대립한다?
유단은 잠시 고민했다. 논리적이지 못한 이야기였으나 현실은 언제나 비논리의 연속이었다.
이제 인간의 몸을 입었으니 ‘0’과 ‘1’ 두 개의 분류에서 벗어나 그 가운데에 있는 것들도 생각해야 한다.
그게, 인간다운 거니까.
“‘우리는 이렇게나 많이 죽었는데 귀족은 별로 죽지 않았다.’ 이 단순한 사실 하나로 시민들이 분개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시민들 사이에서 불신과 불만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면, 분명 다른 이유가 있는 거겠죠.”
교수가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봤어요. 사실 두 차례에 걸친 테러는 모두에게 슬픔만 안겨줬죠. 거기에 분노할 거리는 없어요. 하지만 사라진 왕성이, 그로 인해 언급된 이름이 상황을 바꿨죠.”
교수가 창밖을 바라봤다. 옆얼굴이 슬쩍 보였는데, 낯빛이 우울해 보인다.
“행정2국 국장, 알렝 바르베. 들어본 적 있나요?”
알렝 바르베.
기억에 남아 있는 이름이었다.
“자세히 아는 건 아닙니다만, 이 문구만은 기억합니다. 시민과 가장 가까운 정치가.”
“그 한 마디에 알렝 님의 모든 게 담겨 있네요. 알렝 바르베. 제국의 실권자이자 시민의 편의를 위해 행정 변화를 도모하고 결국 이뤄낸 사람.”
교수가 등을 돌렸다. 손수건을 들어 얼굴로 가져갔다.
무엇을 하는 건지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눈물을 닦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화합이란 두 글자에 인생을 건 분이셨죠.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한심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분은 결국 이뤄냈고 많은 걸 바꾸셨죠.”
교수가 몸을 돌렸다. 눈시울이 붉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죽음을 슬퍼한다. 관계가 깊었다는 뜻인가?
“연인이셨나요?”
그 질문에 탄드라 교수가 멍하니 바라본다.
“유단. 알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새로운 면이 보이네요. 연인이라니, 그런 사이는 아니에요. 그냥 마음속 깊이 존경하던 분이라 안타까운 거죠.”
아, 그런 거군.
난립하는 정보를 다시 차근차근 모았다. 사적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애도할 수 있다, 기억에 남겨둘 정보다.
“실언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교수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맴돌던 울적함이 가시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듯 그저 사고로 끝났다면 애도의 물결만 일어날 뿐, 증오 섞인 말들은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왕성 폭파의 주범이 알렝 바르베란 발표가 나오자마자, 시민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죠.”
연이은 테러로 인한 사상자 속출.
불안과 불신이 가득 찬 상황에서 시민의 편이었던 정치가가 왕성 폭파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사망.
“감춰진 무언가가 있다, 시민들은 그렇게 생각했겠군요.”
“그렇겠죠. 하지만 국장의 사망 이후 발견된 유서가 시민들의 생각을 바꾸었어요.”
“유서요?”
“여기에 올라와 있어요. 어제 둔으로 들어온 신문이니 읽어봐요.”
교수가 다른 신문을 건네줬다.
-나의 죽음이 민중의 봉기로 이어지길 바란다.
강렬한 문구로 시작된 기사는 알렝 바르베의 유서 전문과 함께 사건 경위를 자세하게 적어놓았다.
긴 글이었으나 사족을 쳐내고 나니 한 줄로 줄일 수 있었다.
“권력의 이양. 알렝 국장은 체제 개편을 꿈꿨군요.”
“위험한 꿈이죠. 권력가들이 펄쩍 뛸 말이기도 하고요.”
“말뿐이었으면 모르겠지만 직접 행동해서 제국의 상징물을 지워냈으니… 사람들이 흥분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과격 수단이라는 여론이 시민 쪽에서도 돌았지만, 그건 소수에 불과했다고 해요. 사건 정황 따윈 그들에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게 됐죠. 시민의 수장 격인 사람이 행동으로 의지를 표명했어요. 그 뒤에 벌어질 일은…….”
철옹성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연이은 테러로 인해 불신이 증폭된 상태에서 도화선이 당겨진 것이다.
알렝 바르베.
치밀한 인간이다.
“성도 테러 역시 알렝 국장의 사주였을까요?”
“황가에서는 알렝 국장과 ‘길리우드’란 인물을 이번 성도 테러의 주범으로 내세웠어요.”
“길리우드? 언급된 적이 없는 이름 같은데요.”
“맞아요. 그래서 시민들은 거짓 발표라며 들고 일어섰죠. 이미 2번의 시위가 일어났다고 해요. 성도 중앙은행이 점거당할 정도로 드센 시위였죠. 테러와 왕성 폭파는 별개의 사건이다, 시민들은 그렇게 주장하고 있고요.”
“쉽게 가라앉지 않겠네요. 설령 진범이라 내세운 길리우드를 잡는다고 해도, 시민들이 믿어줄지 의문이고요.”
“맞아요. 게다가 알렝 국장은 왕성 폭파 직전에, 성에 있던 사람들에게 경고했다고 해요. 그래서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죠. 이 사실이 여론전에서도 큰 힘을 실어주고 있고요.”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알렝이 제 몸을 불살라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중앙 집권에게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나타 왕조 때도 이러한 일이 몇 번이고 있었다.
세부 자료는 본체에 남아 있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민중이 들고 일어서면 나라는 위태로워지기 마련이다.
“6월 축제에 시민연합을 주축으로 한 대규모 궐기가 일어날지도 몰라요. 징조가 곳곳에서 보이고 있고요.”
“빈센달, 그 사람이 중심이겠군요.”
“그렇겠죠.”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귀족들은 그 남자를 잡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겠군요. 혹시 잡혔나요?”
“아직 몰라요. 성도 소식이 둔까지 전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리니. 어쩌면 이미 잡혀서 매수당했을지도 모르죠.”
교수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이번 사건의 여파는 성도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 영지까지 영향을 미치겠죠. 궐기가 성공적으로 끝나 어떤 형태로든 협약이 이루어지면, 제국은 또다시 홍역을 치를 테죠. 연합왕국과의 전쟁이 우습게 보일 만큼.”
차 마시는 소리가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유단은 차곡차곡 쌓아 올린 정보를 잊지 않기 위해 속으로 곱씹었다.
인간의 두뇌는 마력선 회로와 달리 저장 기능이 형편없었다.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넘어가지 못하면 중요한 사실마저 잊어버리니까.
“그런데 조금 의외네요. 유단은 이런 얘기에 흥미 없을 줄 알았는데.”
“한 가지에만 몰두하니까 오히려 시야가 좁아지는 느낌이 들어서요.”
“잘 생각했어요. 배워 나갈 시기에는 다양한 정보를 접해보는 게 좋아요. 의외의 분야에서 새로운 발견을 할 수도 있고요.”
유단은 살짝 웃음을 지었다.
인간의 신체, 영혼.
두 가지를 탐구하고 계측하려면 제대로 된 환경이 필요했다.
사고 실험에서 그치지 않고 실재적인 실험을 이어 나가려면 준비해야 할 게 앞으로도 산더미였다.
그러니 제국의 정세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실험은 결국 돈이었다.
돈은 권력을 따르기 마련이고.
체제가 변화해 제국이란 시스템이 이전과 다른 형태가 된다면,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
“교수님. 교수님께선 이번 사태가 진정되지 않고 심화됐을 시, 어떻게 될 거라 예상하시나요.”
“방대한 질문이네요. 바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대답한다면…… 가장 가까이 있는 국가 모델을 따라가게 되겠죠.”
“연합왕국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요. 도시 국가. 만에 하나라도 황가와 의회가 와해된다면, 시민들 손에 의해 토지가 나뉘겠죠.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는 개념을 따라가기 마련이니까요.”
“복잡해지겠군요.”
탄드라 교수가 웃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아예 없어요. 황가와 의회. 틀어쥐고 있는 힘이 너무 거대하니까요. 시민들이 집결한다고 해도 단번에 갈라버릴 수 있는 힘이 그들에게 있어요. 신의 도움이 없는 이상, 시민들은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겠죠.”
신의 도움.
유단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라고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리할 것이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따로 시키실 일 있으신가요?”
“아니요. 가서 일 봐요.”
“예, 교수님.”
유단은 자리를 정리한 뒤 교수실을 빠져나왔다.
복도에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 25분.
종이봉투에 담은 라즈베리 쿠키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복도 끝, 퀜 교수의 명패가 보인다.
“교수님. 유단입니다.”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열려 있단다, 퀜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저기서 네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내심 생각했지. 나한테는 언제 찾아오려나.”
유단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퀜 교수 앞에 쿠키를 내려놓았다.
“이건 뭐냐?”
“작은 선물입니다.”
“교수의 시간을 잡아먹는 것치고는 간소하구나.”
퀜 교수가 쿠키를 입에 넣으며 손짓했다.
“요즘 교수들한테 희한한 질문을 하고 다닌다지?”
“그렇게 희한한 질문은 아닙니다.”
“일반 연구원이 할 법한 질문은 아니던데?”
퀜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예상은 가지만 그래도 네 입을 통해 들어야겠지. 어디 한번 물어봐라.”
다른 교수에게도 해왔던 질문.
유단은 퀜의 팔자주름을 보며 말했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