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카트시, 당신이 장난친 건가요?”
가느다란 실이 카트시의 눈에 연결된 건가?
-무슨 일인데요?
“카트시가 한 거 아니에요?”
-뭘 했는지 알아야 대꾸를 하겠죠? 엔엔, 피곤하면 이만 가서 자는 게 좋겠네요. 맥락 없는 대화라니.
엔엔은 손을 내밀어 인형의 위쪽을 쓸었다. 손에 걸리는 건 없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정확히 분간해내는 이 눈이 실 따위를 못 봤을 리 없다.
그러는 사이, 인형이 다시 한번 꿈틀댔다.
환각도 아니고 누군가의 장난도 아니다. 마력이 고갈돼 움직일 수 없는 인형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미동했다.
-오.
카트시의 눈이 다가왔다. 내뱉은 감탄사로 보건대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듯했다.
가만히 바라봤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담아.
-실패한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일단은 성공한 것 같네요.
인형이 벌떡 일어섰다. 허름한 몸통 위에 달린 얼굴을 빙글빙글 돌린다.
엔엔은 손을 뻗었다. 인형이 펄쩍 뛰어 뒤로 물러섰다.
저 붙임성 없는 행동.
“32번. 확인할 게 있어.”
-32번? 이름도 안 붙여준 거예요? 삭막해라.
“그런 걸 따질 때예요?”
인형은 말을 듣지 않았다. 구석을 향해 맹렬히 뛰어갔다.
엔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제력을 발휘할 때다.
칼랑의 후손에게만 허락된 마법. 스크롤의 도움 없이도 발현할 수 있는 인형 마법을 사용했다.
손톱 끝에서 뻗어 나간 마나 파장이 인형을 건드렸다.
32번이 우뚝 섰다. 손가락을 까닥거려 이동을 명령했다. 반항심 넘치는 인형이 얌전히 다가왔다.
-칼랑의 마법은 편리하죠. 한번 발동해 놓으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상시 적용되니. 배우고 싶네요.
“칼랑께 빌어봐요. 허락해 줄지도 모르니.”
인형을 들어 올렸다.
모노클을 착용한 뒤 자세히 살폈다. 물결치듯 새겨진 마법의 흔적이 보인다.
인형 마법에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처음 보는 회로가 덧씌워져 있다는 점이다.
구조가 특이하다. 게다가 형태는 단순했다. 열기를 뿜어내는 가장 단순한 회로도 이것보다는 복잡할 것이다.
-마나포집이 제대로 작동하네요. 안착도 성공적이고.
“이게 마나포집이라고요?”
그럴 리가. 인형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카트시가 준 도안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았어요. 복잡하고 기괴하고 난해한 도안이었죠.”
-인간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든 거라 그래요. 평면에 표현한 거니 어지러운 게 당연하죠. 지금 인형에 새겨진 회로는 마력선 짜맞춤에 기반한 거예요. 당연히 겉보기에는 단순해 보이죠.
카트시의 눈이 인형 옆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 안에는 수많은 정보가 압축돼 있어요. 그래요, 압축. 이것이야말로 마력선 짜맞춤의 근간이죠.
“하지만 이건 도안을 기반으로 한 마법공학이잖아요. 어떻게 마법 위에 새로운 회로를…….”
마법과 마법공학.
마법은 마나를 매개 삼아 각 개인의 심상세계를 표현하는 것.
그렇기에 완벽하게 동일한 마법은 존재할 수 없고, 설령 같아 보인다고 해도 위력이나 범위, 기타 편의성 면에서 차등이 생긴다.
마법공학은 심상세계를 배제하고 마법과 유사한 힘을 사용하는 것.
마력선으로 이루어진 회로를 만들고 거기에 농도 짙은 마나를 흘려 보냄으로써 작동한다.
그렇기에 같은 방식으로 제작된 마법공학품은 마법과 달리 똑같은 성능을 낼 수 있는 것이고.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형태로 마나를 이용하는 두 개의 방식.
-말했잖아요. 마력선 짜맞춤은 차상위 개념이라고. 마법 위에 마법공학 회로를 넣는 건 불가능하다, 그 반대 역시 불가능하다. 이 전제는 일반적으로 옳지만, 마력선 짜맞춤은 그 틀에서 벗어나 있죠.
엔엔은 인형을 내려놓았다.
불현듯 깨달은 것이 있었다.
카트시의 정신이 담긴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모노클이 유사 정령에 새겨진 마력선을 잡아냈다.
“둔 지하에서 공동이 발견되고, 거기서 처음 카트시를 봤을 때 저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같은 의견을 냈죠. ‘이 유사 정령에 새겨진 마력선은 구시대적이다. 게다가 너무 단순해서 어떤 역할도 수행하지 못한다’.”
-그렇게 보였겠죠.
“그 평가는 지금도 같아요. 적어도 제 눈으로 봤을 때 이 마력선 회로는 볼품없어요. 하지만 인형에 적용된 것처럼 마법으로 새겨진 마법파형 위에 마법공학적 회로가 덧씌워졌다면…….”
엔엔은 카트시의 눈을 바라봤다.
“유사 정령. 마법공학품이라 한정 짓고 접근했어요. 하지만 아니에요. 카트시, 당신에게 적용된 건 마법공학뿐만 아니라 마법 그 자체였던 건가요?”
-그건 저도 알 수 없어요. 기억이 시작되기 전의 일을 알 순 없으니까요. 다만, 줄리어스는 이런 말을 하곤 했죠. ‘충분히 발달한 마법공학은 순수한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엔엔은 유사 정령에 손을 올렸다.
모든 공학자는 패러다임 시프트를 꿈꾼다.
각자 바라보는 목표는 다르겠지만, 궁극적인 염원은 같을 것이다.
마법과 마법공학의 경계를 허무는 것.
마법으로 창조된 인형에 마나포집이란 마법공학이 적용됐다. 오류 점검 및 작동 능력은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일단 움직였다는 게 중요하다.
마법과 마법공학이 일체화된다면 상용화에 어려움을 겪은 수많은 제품이 빛을 받게 될 것이다.
반대로 스크롤에만 의존해 발현에 어려움을 겪었던 마법 역시 마법공학품의 도움을 받아 한층 쉬워질 것이다.
“레거시. 어쩌면 구현 가능할지도 몰라요.”
레거시.
사용자의 의지로 발현되는 마법도구. 마법공학품과 달리 도구 자체에 마나가 담겨 있기에 누구나 편리하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게다가 카트시는 말했었다.
나타 왕조 때는 ‘영구 지속 가능한 마법 도구’만 레거시로 분류했다고. 그렇다는 건 일회성 레거시는 제작 가능했다는 뜻 아닐까?
“마법공학 회로가 적용된 제품에 마법을 담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어요. 하지만 마력선 짜맞춤이 새로운 해결책이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엔엔은 입을 꾹 다물고 카트시를 바라봤다.
-엔엔. 저는 현 제국의 정치 성향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어요. 이 시대의 문화 역시 모르는 부분이 많고요.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수천 년이 지난다고 해도 변하지 않겠죠.
카트시의 눈이 가까이 다가왔다.
-전 새로운 보안책임자가 좋아요. 존중과 배려로 절 대해준 그 아이가 소중해요. 줄리어스는 지켜내지 못했지만, 가하란은 지켜주고 싶어요.
엔엔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하란이 너무 위험한 걸 알아 버렸어요.”
-알아요.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가하란의 눈은 특별해요. 언젠가 다 알아낼 것이었죠.
“왜 말리지 않았죠? 정보를 차단할 수도 있었잖아요.”
-엔엔, 당신을 믿은 거예요. 가하란을 지켜줄 벽이 필요해요. 이 공방만큼 좋은 곳도 없죠. 인간의 욕심이 여기까지 미치진 않으니까요. 탐욕에 눈이 돌아간 인간이라도 칼랑의 공간을 침범하진 못할 테니.
“여기가 복잡하다고 싫어할 땐 언제고.”
-지금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요. 하지만 은신처로서 여기보다 좋은 곳도 없죠.
엔엔은 작업대에 놓아둔 인형을 바라봤다.
마법에 마법공학을 접목한 새로운 형태.
다들 꿈꾸지만 이미 수없이 실패해서 농담거리조차 안 되는 그 이상향이 가하란의 손끝에서 실현돼 버렸다.
그 어린아이가 공학자들의 꿈을,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보여주고 만 것이다.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격변이 일어날 텐데, 이미 완성품을 선보였다.
이 정보가 밖으로 유출된다면?
가하란이 응당 누려야 할 자유는 일단 제거될 것이다. 왕성 지하에 있는 연구실로 붙들려 가 일생을 연구에 바쳐야 할 터였다.
누군가에겐 탐나는 제안일지도 모른다.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연구를 할 수 있다니!
하지만 가하란은 매번 자신의 꿈을 말해왔다. 거병 제작이라는 공학자의 꿈도 있었지만, 그 외 다양한 목표를 품고 있었다.
-줄리어스는 왕국에 붙들렸어요. 우리를 탄생시킨 그 커다란 연구실이 그녀의 생활 터전이자 무덤이었죠. 짧은 시간이지만, 제가 경험한 가하란은 그런 곳에 갇혀 있으면 안 될 아이예요. 그 아이는 줄리어스와 달라요. 사람을 좋아하고 세상에 대한 탐구심으로 가득하죠.
“가하란을 붙잡아 골방에 가두는 것. 그것만큼 끔찍한 형벌도 없겠죠.”
-그러니 엔엔이 보호해줘요. 가하란이 무엇을 해냈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됐으니까요.
엔엔은 자신의 팔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런 생각은 안 했나요? 제가 욕심에 눈이 멀어 가하란을 넘길지도 모른다는 생각.”
-엔엔이 제가 과거에 봐왔던 칼랑족이었다면 가하란에게 수없이 말했겠죠. 저 음흉한 늑대를 조심하라고.
카트시가 아주 작게 웃었다.
-하지만 엔엔은 달랐어요. 앎의 욕구를 억누르고 절 분해하지 않았으니까요.
“고작 그런 거로 판단할 수 있어요?”
-가장 밑바닥에 깔린 욕구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그것만 보면 판가름할 수 있어요.
“기계한테 인정받아서 좋네요.”
-마음껏 기뻐하세요. 제가 네 번째로 좋아하는 게 엔엔이니까요.
“첫 번째는 줄리어스, 두 번째는 가하란이겠죠?”
-네.
“말이 나온 김에 세 번째는 누구죠?”
-저기 인형이요.
엔엔은 자빠져 있는 인형을 흘깃 본 다음 어깨를 으쓱였다.
“내일 가하란이 오면 얘기해야겠네요. 지금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고.”
-입이 무거운 아이이니 별문제는 없을 거예요. 엔엔, 당신만 조심한다면.
“그래요. 저도 조심하죠. 들떠서 괜한 소리 안 하도록.”
작업대로 가 다시 인형을 살폈다.
조금 전만 해도 선명하게 보였던 마법공학 회로가 조금 흐릿하게 변했다.
붕괴가 시작된 것이다.
-완벽하진 않네요. 수정해야 할 부분이 많아요.
“가하란이 어디까지 해낼지, 기대되면서도 걱정되네요.”
-옆에서 잘 지켜봐요. 줄리어스가 남긴 것들을 모두 이해하고 나면…….
카트시는 도중에 말을 끝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질 문장이 무엇이었을지, 엔엔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엔엔은 인형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말했다.
“세상이 바뀌겠죠.”
이건 추켜세우는 것도 아니고, 실없는 농담도 아니었다.
지극히 분명하고 명백한 사실이었다.
* * *
신문을 내린 탄드라 교수의 표정이 어둡기만 하다. 유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와 라즈베리 쿠키를 준비했다.
“안 좋은 기사가 올라왔나요?”
교수 앞에 잔을 내려놨다.
“안 좋은 정도가 아니에요. 소문으로 먼저 접하긴 했지만, 이렇게 기사로 다시 보니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마침내 실감하게 되네요.”
읽어보라며 교수가 신문을 건넸다. 유단은 신문을 받아 머리기사를 읽었다.
-귀족거주지 테러에 이은 왕성 소멸. 제국의 안위, 이대로 괜찮은가?
자극적인 제목이었다. 게다가 제국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내용까지 포함됐다.
유단은 신문 배포자의 이름을 살폈다. 울프지. 기억을 더듬었다. 황가와 의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신랄한 비판을 이어가는 정론지.
“울프지 기자들은 여전히 매섭네요.”
“거긴 한결같죠. 그래서 지지받고 있고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