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시그니처.
마법공학 연구자들이 얻어낸, 마법사들의 마법과는 결이 다른 마력선 조율 방식.
가하란은 눈앞에 펼쳐진 선들을 바라봤다. 마력선 도안에서 방사형으로 뻗어 나간 선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주변을 뒤덮었다.
-저번에도 봤지만, 이렇게 난잡한 시그니처는 제 데이터에도 없어요.
카트시가 엉킨 선 사이를 오가며 말했다.
“다른 교수님들처럼 멋지진 않지.”
연구단지를 오가며 다양한 시그니처를 볼 수 있었다.
정과 망치로 마력선을 조율하던 사람, 콧노래로 회로를 다잡던 사람, 다양한 색으로 그림을 그리듯 마력선을 조정하던 사람.
방식은 다 달랐지만 하나같이 간결한 느낌이었다.
“시그니처를 다듬다 보면 내 것도 달라지지 않을까?”
-글쎄요. 시그니처는 마법과 마찬가지로 심상세계의 표현이니까요. 가하란의 속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엄청 어지럽나 봐요.
“난 잘 모르겠는데.”
-뭐, 형태가 중요한 건 아니죠. 제대로 이용할 수 있다면 복잡하든, 단순하든 상관없어요.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각기의 도움을 받아 시그니처를 불러냈지만,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펼쳐진 실들을 만지고 옮길 수는 있다. 다만,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눈’이 필요하다.
시그니처를 불러낸 상태로 눈에 힘을 주었다. 선으로 변화하는 정보를 눈이 잡아냈다.
가하란은 방사형으로 뻗어 나간 시그니처를 바라봤다.
“이쪽을 잡아당겨서 옮기면…….”
가로로 짧게 연결된 선을 엄지와 검지로 살짝 붙잡았다. 팽팽해진 선의 질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선을 끌어당겼다.
천장으로 뻗어 나간 실들이 파르르 떨리며 이동을 시작했다.
한 점에서 시작된 실들이 형태를 유지한 채 인형 위쪽으로 옮겨졌다.
-아름답네요. 손상 없이 이전시키는 건 보통 일이 아닌데. 가하란은 마나포집의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한 건가요?
“아니. 아까도 말했지만 난 줄리어스의 이론을 전혀 모르겠어. 단지 어딜 당기면 반응하고, 어딜 접으면 안 되는지 정도만 알 뿐이야.”
-그게 놀라운 거예요. 세부 구조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응용 가능한 큰 틀은 알고 있다는 거니까요. 가하란의 그 눈, 그리고 이해력. 이 두 가지는 줄리어스의 지성에 버금가는 보물이에요.
“난 그냥 요령을 살짝 알게 됐을 뿐이야. 감자를 썰 때 칼에 안 붙게 하는 법, 불쏘시개가 잘 탈 수 있게 놓는 법, 공을 멀리 찰 수 있는 방법. 내가 알아낸 건 이런 수준이야.”
-위대한 자들은 항상 자신의 비범함을 낮춰 말하죠. 줄리어스도 그랬어요.
“그렇게 칭찬해도 선물 같은 거 없어.”
-그래요? 그러면 그만둘게요.
감각장치에서 킥킥 웃는 소리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가하란도 작게 웃으며 손끝에 딸려 온 마력선을 응시했다.
모든 걸 정보로 바꾸는 ‘눈’과 ‘시그니처’의 조합. 아직은 익숙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손발 다루듯 편해질 것이다.
적응하면 적응할수록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의 양도 늘어난다.
언젠가는 줄리어스가 남긴 마력선,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도 이해할 날이 올까?
오면 좋겠다.
줄리어스가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는지, 알고 싶었다.
지식보다는 그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카트시를 만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카트시를 비롯한 유사 정령들이 변화해 갔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리고…….
자신이 낳은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가뒀을 때,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손가락에 이끌린 마력선 끝단을 인형에 집어넣었다. 시그니처가, 사방으로 펼쳐져 형상화된 마력선이 한순간 인형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안착에 성공했나요?
“모르겠어. 난 내가 할 수 있는 걸 했어. 결과는 기다려야 알 것 같아.”
감각기를 손에서 뺐다. 시뮬레이션대로 마나포집이 작동한다면 인형은 곧 움직이게 될 것이다.
-아직은 작동 방식을 모르지만 가하란이라면 곧 알게 될 거예요. 그때가 오면 많은 게 달라질 거고요.
카트시가 인형을 보며 말했다.
초침 가는 소리가 작업실의 정적을 살짝씩 때렸다. 가하란은 손을 맞잡은 채 인형이 움직이길 기다렸다.
그렇게 5분.
인형은 침묵을 깨지 못했다.
“옮기는 것만으로는 안 되나 봐.”
-첫 시도니까요. 시그니처 사용법이 익숙해지면 결과물도 좋아지겠죠. 설마 첫걸음에 좌절한 건 아니겠죠?
“넘어졌으면 다시 일어나서 뛰면 돼. 아빠가 그렇게 알려줬어.”
가하란은 인형을 들어 엔엔의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한쪽뿐인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엔엔 님이 돌아오시면 움직일 수 있게 될 거야. 조금만 기다려.”
얌전히 놓고 돌아서려는데 인형의 어깨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다시 인형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뭐 하게요?
“지금 만져보니까 솜 인형 느낌이라서. 팔 정도면 내가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아.”
-어차피 마나회로로 연결돼 있지 않으면 장식품일 뿐이에요.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잖아.”
아빠를 찾아와 의수를 부탁하는 사람 중에는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사람도 있었다.
제대로 된 의수를 만들려면 돈이 많이 든다. 큰 관절뿐만 아니라 손가락까지 구현하려면 돈과 시간, 그리고 마법공학까지 필요하다.
돈 없는 사람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
아빠는 그럴 때마다 형태만 다 잡은 의수를 만들었다. 어떤 기능도 없는, 그저 모양뿐인 팔을.
“아빠가 지금 해줄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거든.”
궁금했다. 달려 있기만 한 팔 모양이 어떤 쓸모가 있을지.
의수를 선물받은 어떤 여자한테서 그 해답을 들을 수 있었다.
“가끔은 장애가 있다는 사실보다 날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들의 눈이 더 힘들어. 모양뿐인 팔이지만, 그래도 이게 있으면 그런 시선을 피할 수 있고. 옮는 병도 아닌데 날 무섭게 봐. 이상하게 보고. 이걸 달고 있으면 좀 나아지겠지. 올란트 씨 덕분에, 너희 아버지 덕에 좀 편해질 거야.”
푸근하게 웃던 그 눈웃음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가하란은 인형을 들어 올렸다.
헝겊 안에 자투리 천을 채워 넣어 팔을 만들고 그걸 인형에 달았다.
반대쪽 팔과 최대한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었지만, 재질이 달라서 조금은 엉성하다.
-팔이 생겼네요. 짝짝이지만.
“엔엔 님이라면 더 잘 만들어주실 거야.”
엔엔의 작업대에 인형을 올려뒀다.
“근데 왜 엔엔 님은 이 인형을 안 고쳐주셨지. 예전부터 팔이랑 눈 한쪽이 없는데.”
-마법공학이 아니라 마법이니까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겠죠. 아니면 귀찮았거나.
“설마.”
-공방 꼴을 보고도 그 소리가 나와요? 칼랑족은 정리와 담 쌓고 사는 자들이에요. 물론 엔엔은 좀 낫지만.
가하란은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작업대는 물론, 그 아래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이름 모를 마법공학품들.
엔엔의 인형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치우고 있지만 그 역시 ‘정리’라고 말할 순 없었다.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게 정리는 아니니까.
-반박 못 하겠죠?
“……아닐 거야.”
-뭐, 어차피 인형의 눈 같은 건 장식품이에요. 기능은 없죠. 쟤들은 시각 정보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마나를 써서 감각하니까요.
“그래도 고칠 수 있다면 고쳐주고 싶어.”
가하란은 귀 뒤쪽을 긁으며 말했다.
-근데 인형 팔 만들 때 보니까 실로 칭칭 매서 관절도 표현하던데, 인체 모형에 관심이 있어요?
“아빠가 의수 만들 때 옆에서 본 걸 따라 해봤을 뿐이야.”
-아빠라. 생물학적 아빠겠죠?
“다른 아빠도 있어?”
-인간은 복잡하니까요. 다른 아빠도 있을 수 있죠.
가하란은 뚱한 얼굴로 카트시의 안구를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보안책임자의 보호자. 언젠가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
“아빠를?”
-네. 예전 얘기지만, 항상 궁금했어요. 줄리어스를 낳은 사람은 얼마나 대단한 인간일까. 창조주의 창조주. 그러다 줄리어스를 통해 부모란 자들을 알게 됐죠.
“줄리어스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는데?”
-좋게 말하면 효율을 중시하는 자들이었죠.
“효율?”
-말했죠? 줄리어스는 사회성이 결여됐다고. 사람을 상대하는 법을 몰랐어요. 그건 어릴 때도 마찬가지였죠. 빛나는 지성이 있었지만 그걸 담고 있는 껍데기는 여러모로 부실해 보였죠. 그래서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버렸어요. 정확히는 팔았죠.
가하란은 눈을 살며시 찌푸렸다.
익히 들어온 얘기다. 골목에서는 수도 없이 일어난 일이기도 하고.
모자란 아이를 팔아버리는 부모.
-연구학회가 어머니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줄리어스란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겠죠. 그래서 전 운명이란 걸 믿어요. 세상은 기괴하거든요. 이치로 돌아가지 않는 비정상적인 집합 요소니까, 운명이라도 믿어야죠.
기계가 말하는 운명론.
엔엔이 들었다면 분명 수염이 흔들릴 정도로 웃었을 것이다.
-아무튼 줄리어스의 부모는 개차반이었어요. 하지만 가하란의 부모는 다른 것 같네요. 그러니 더욱 만나보고 싶어요. 과연 어떤 사람일지.
‘개차반’이란 단어를 카트시가 쓰니까 왠지 안 어울렸다.
그 때문일까. 어이없는 웃음이 나온다.
“아빠가 돌아오면 카트시와 만나게 해줄게. 그리고 아빠는 나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해. 카트시도 만나면 깜짝 놀랄걸?”
-과연 그럴까요? 제 느낌에 가하란보다 뛰어난 인간은 몇 없을 텐데요.
“만나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멀리 있을 아빠를 상상하며 대답할 때였다. 공방을 찾은 손님이 있었다.
종소리를 따라 입구로 간 다음 문을 열었다. 셀베이아가 앞에 있었다.
“저녁 먹으러 가자. 대령님도 기다리고 있어.”
“네! 정리하고 금방 나올게요.”
작업실로 돌아가 주변 정리를 끝내고 카트시에게 인사했다.
“내일 또 봐.”
-그래요. 내일 또 보죠.
좌우로 움직이는 카트시의 눈을 향해 손을 흔든 후 공방을 나섰다.
* * *
으스름달.
이런 날에는 ‘도깨비’가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특무대령 덕에 도시 안에서는 잘 안 나타나겠지만.
엔엔은 공방 문을 열었다.
조용한 창고가 맞아준다. 최근 몇 달간 가하란과 카트시 덕에 시끌벅적했지만, 원래는 이런 맛이었지.
엔엔은 어둠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인형들이 발치를 지나갔다. 손에 뭔가를 하나씩 들고 있다.
창고에 수북이 쌓인 물건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정리하긴 해야 할 텐데…….
“시간은 많으니까.”
작년에도 비슷한 말을 한 것 같지만, 뭐 어쨌든.
작업실로 들어왔다. 카트시의 눈은 유사 정령 옆에 축 늘어져 있었다.
기계도 잠을 자고, 꿈을 꾸는 걸까.
-자는 중이니까 조용히 해주세요.
“잘 때는 보통 말을 안 하죠.”
-그런가요?
엔엔은 작업대로 향했다.
“왔구나.”
정겨운 인형이 누워 있었다. 근데 없던 팔이 떡하니 달려 있었다.
누구의 작품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가하란이 묻더라고요. 왜 이 인형의 팔을 안 붙여주는지. 솔직히 말해서 귀찮은 거죠?
“카트시라면 알 텐데요. 원형을 유지하려는 성질을.”
-알죠.
“그런데도 가하란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그게 재미있으니까요.
“못됐네요.”
마나가 고갈돼 멈춰버린 인형.
엔엔이 인형에 손을 대려 할 때였다.
움직일 수 없는, 움직여선 안 될 인형이 꿈틀거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