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00화 (173/558)

제200화

거친 질감의 검은 외투와 흰색 셔츠. 사용감이 짙은 구두.

가하란은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억해요. 할아버지와 같이 오셨던 분, 맞으시죠?”

“다행이에요. 기억하고 계셔서.”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혹시 절 찾아오신 건가요?”

“네, 맞습니다.”

남자가 무릎을 살짝 숙였다.

“제 이름은 하브입니다. 첼 님의 수행원 중 한 명이죠.”

하브.

이름을 기억하며 되물었다.

“할아버지께선 성도로 떠나시지 않았나요?”

작년 10월 말, 첼은 성도로 돌아가야 한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조만간 또 찾아오마, 그게 할아버지가 남긴 말이었다.

“예. 선생님께선 성도에 계십니다. 전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어 이렇게 둔에 남았지만, 사정이 생겨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브가 품에서 도톰한 천을 꺼냈다. 손바닥 크기였는데, 몇 번 접어놓은 상태였다. 안에 작은 물건이 들어 있는 듯했다.

“이걸.”

하브가 천을 내밀었다. 가하란은 두 손으로 그걸 받았다.

“올란트 님마저 자리를 비우신 터라 제가 가하란 님 곁에 남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정말요? 전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데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봤거든요. 그리고 곁에 계신 분들이 가하란 님을 잘 챙겨주셔서 제가 나설 일도 없었고요.”

“혹시 해야 할 일이라는 게 절 보살피는 거였나요?”

하브가 옅게 웃었다.

“선생님께서 부탁하신 일입니다. 하나뿐인 증손자께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말이죠.”

눈을 깜빡였다. 고마움과 동시에 미안함이 생긴다.

“힘들지 않았어요? 저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

“미래에 제가 모셔야 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쓸까요.”

“네? 저를요?”

“혹시 모를 미래의 일입니다.”

하브가 천을 가리켰다.

“안을 확인해 보시죠.”

겹겹이 싸인 천을 하나씩 들췄다. 안에 들어 있는 건 은색 반지였다.

표면이 거칠었다. 누군가 오래 착용하고 다닌 것 같다.

반지를 들어 올렸다. 무늬도 없는 밋밋한 반지. 이리저리 살피다가 안쪽에 글귀가 있는 걸 발견했다.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믿는다.

본성이 선하다. 마음에 드는 문구였다.

“이거 할아버지께서 끼고 계시던 반지 아닌가요? 그 반지와 닮았는데.”

“맞습니다. 그 반지입니다.”

“이걸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예.”

손안에 든 반지를 살며시 쥐었다. 반지라니. 이런 건 어른들한테나 어울릴 텐데.

괜히 어깨가 으쓱거린다.

“근데 제가 가져도 되는 건가요?”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이라면 분명 사연이 있을 것이다. 반지라면 더더욱 그렇고.

이런 걸 덥석 받아도 되는 걸까?

“그 반지는 선물이자 동시에 숙제입니다.”

숙제?

의미를 알 수 없어 하브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가하란 님. 성도로 가고 싶지 않나요?”

“성도요?”

성도란 말에 귀가 활짝 열렸다. 지금 가면 6월 축제도 볼 수 있고, 성도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가고는 싶어요.”

“그러면 저와 함께 가시죠. 준비는 이미 끝내 놨습니다.”

“바로요?”

“네. 날씨도 풀렸고 여행에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성도에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지금쯤이면 잘 마무리됐을 거고요.”

성도에 생긴 문제가 무엇인지 살짝 궁금해졌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가느냐 마느냐.

가하란은 다시금 공방 안쪽을 바라봤다. 작업실 안에 혼자 있을 카트시를 떠올렸다.

“꼭 가야 하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가하란 님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죠.”

“그러면 나중에 가도 될까요? 지금은 여기서 배워야 할 게 있어요. 그리고, 오랫동안 혼자 있었던 친구도 있고요. 걔랑 같이 있고 싶어요.”

“그렇습니까.”

하브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께는 다음에 꼭 찾아가겠다고 말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하브가 반지를 가리켰다.

“여기 남겠다고 하셨으니 숙제를 내드려야겠군요. 제가 내는 건 아니고, 선생님께서 내시는 거지만.”

“어떤 숙제인가요? 저 잘할 자신 있어요.”

“어려운 건 아닙니다. 그저… 그 반지에 새겨진 문구를 깊게 생각해보는 겁니다.”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믿는다.’ 이 말을요?”

“네.”

가하란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생각만 하면 되는 건가요?”

“그 반지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중에 선생님께서 직접 알려주실 거고요. 그날이 오기 전까지 문구에 대한 걸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어려워요. 어떤 식으로 생각하라는 거죠?”

“그 역시 숙제 중 하나입니다. 방향성, 옳고 그름, 가치. 모든 방면에서 문장을 뜯어보고 고심해 보세요.”

첼 할아버지가 남겨준 숙제.

분명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당장은 어리둥절해도 나중에 숨은 이야기를 들으면 깨닫는 게 생길 테고.

“생각해 볼게요. 할아버지의 생각과 비교해볼 수 있도록.”

“훌륭한 마음가짐입니다.”

하브가 품에서 가느다란 끈을 꺼냈다. 붉은색이 감도는 끈이었다.

“끼고 다니면 좋겠지만, 지금은 손이 작아서 그럴 수 없겠죠. 그러니…….”

하브가 반지 사이에 끈을 집어넣어 목걸이를 만들었다.

“이렇게 몸에 지니고 다니세요. 거추장스러우면 다른 곳에 보관하셔도 됩니다.”

“할아버지가 소중히 여기는 반지잖아요? 항상 차고 다닐게요.”

가하란은 반지를 매만지며 말했다.

하브가 무릎을 폈다. 햇빛이 가려진다. 가하란은 고개를 들어 하브를 올려다봤다.

“가하란 님. 해가 바뀌기 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선생님을 모시고.”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짧은 인사를 건넨 하브가 몸을 반쯤 돌렸을 때였다. 한 가지 잊은 게 있다면서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이 말을 잊을 뻔했군요. 그 반지, 선생님의 아버지께서 갖고 계시던 겁니다.”

증조부의 아버지, 고조부였던가? 어려운 단어라 헷갈리긴 하지만 아마 맞을 것이다.

“정말 소중한 물건이네요. 가보 같은 건가요?”

“음, 가보는 아닐 겁니다. 그걸 가보라 부를 순 없죠.”

반지를 바라보는 하브의 시선이 조금 차가웠다.

왜일까? 할아버지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라면 분명…….

그 순간 깨달은 것이 있었다.

마음을 푸근하게 만드는 것만이 소중한 물건은 아니다. 정신을 일깨우고 경각심을 갖게 하는 물건 역시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혹시 숨겨진 이야기가 무서운 건가요?”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르겠네요.”

하브가 재차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뵐 때까지 건강하세요.”

“네! 아저씨도 행복하세요!”

“…아저씨보다는 형 쪽에 가깝지 않나요?”

가하란은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그런 면이 선생님을 닮았군요. 아무튼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하란은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멀어진 하브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문 옆에 서서 선물받은 반지를 내려다봤다.

반지에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무서운 것보다는 즐거운 얘기면 좋을 텐데.

“가하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턱을 들었다. 엔엔이었다.

“오셨어요?”

“네. 회의가 길지는 않았어요. 근데 왜 밖에 서 있어요?”

“손님이 찾아왔어요.”

“손님?”

귀를 살짝 움직이며 바라보던 엔엔이 공방 문을 열며 말했다.

“제 손님은 아닌가 보네요. 들어가죠.”

엔엔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팔 하나와 눈 하나가 없는 인형이 구석에서 툭 튀어나왔다.

처음 봤을 때는 겁에 질려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제는 한 식구라는 느낌이 든다.

앞에서 빙빙 돌던 인형이 다시 구석으로 사라졌다.

“저 애는 항상 저러고 노는 거예요?”

“네. 저러다가 마나가 부족해지면 저한테 와요. 수줍음이 많은 건지, 아니면 자유로운 건지.”

“마법공학품이 아니라 마법이라고 하셨죠?”

“네.”

마법이라면 배울 수는 없겠네. 자동으로 움직이는 인형. 어둠 속에서 빠끔 고개만 내민 인형에게 손을 흔든 뒤 작업실로 들어갔다.

“무슨 일 때문에 가신 건지, 물어봐도 돼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성도에 일이 생겼어요. 피해 복구를 위해 지원 요청이 왔는데, 거기에 대해 논의했어요.”

하브도 말했다. 성도에 문제가 생겼다고.

“큰 사고가 난 건가요?”

“음, 그렇다고 해둘게요. 자세한 건 말해줄 수 없어요. 아니, 말해주기 싫어요.”

“왜요?”

“가하란이 듣기에는 좀 무거운 이야기라서요.”

“전 괜찮아요.”

“그럴지도 모르죠. 가하란은 다른 어린 인간족에 비하면 성숙하니까. 그래도 말 안 할래요.”

엔엔의 손이 가하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도 인간족 풍습에 많이 물들었나 봐요.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배제하는 걸 보면. 그래도 지금은 모르는 게 나을 거 같아요. 크게 되면 이런 안 좋은 얘기를 질리도록 들을 테니까.”

“…알겠어요.”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엔엔이 공구함과 전용 감각기를 챙겼다.

“다시 나가 봐야 해요. 셀베이아에게 부탁해 놨으니 둘이서 저녁 먹어요.”

“네. 그럴게요.”

엔엔이 가까이 다가왔다. 코로 이마를 툭 친 다음 내일 보자며 공방을 떠났다.

-인간족에게 나이란 족쇄와 같죠. 어릴 땐 어려서 안 된다, 늙어서는 늙어서 안 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좀 웃겨요. 결국 허울에 지나지 않는데.

“이유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지키는 거겠지. 조금 섭섭하지만.”

-제가 엔엔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은 다음 몰래 알려줄까요?

“아니. 그러진 마.”

-이럴 땐 적당히 요령 피워도 되는 거예요.

“거짓말은 안 좋아.”

-가끔은 필요할 때도 있어요.

카트시에게 고개를 저어 보인 다음 책상에 앉았다. 마력선 도안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의미를 되새김질할 때였다.

툭, 하고 무엇인가가 의자 다리를 쳤다. 놀라서 아래를 바라봤다.

그 인형이었다. 팔 한쪽과 눈이 없는 인형.

공방을 돌아다니며 정리를 돕는 다른 인형과 달리, 이 인형은 작업실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여길 왜 온 걸까?

혹시?

“마나가 다 떨어진 거야?”

인형은 대꾸 없이 계속 의자 다리에 몸을 부딪쳤다. 입이 없으니 말할 수도 없겠지.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감싸 인형을 들어 올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묵직했다.

손안에 든 인형이 축 늘어졌다.

-퍼밀리어와 비슷한 형식인가 보네요.

카트시가 다가와 말했다.

“엔엔 님도 그렇게 말했어.”

-활동에 필요한 마나가 없는 모양이에요.

가하란은 인형을 책상에 올려두었다.

부족한 마나와 마나포집 도안.

“이 애한테 마나포집을 적용하면 따로 마나를 주입하지 않아도 혼자 돌아다닐 수 있는 거야?”

-이론상 가능해요. 단순한 회로라 동작에 필요한 마나도 적을 테니.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가하란은 감각기를 손에 끼고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 주변 사물이 형태를 잃고 조금씩 선으로 변해간다.

“완벽하게 이해한 건 아니지만, 어떤 형식으로 반응하는지 알 것 같아. 이걸 이 애한테 옮겨보면 어떨까?”

-마나포집 구조를요? 그게 가능하겠어요?

“일단은.”

-한번 해봐요. 위험 요소는 없으니까요. 회로가 어그러진다고 해서 폭발하거나 그러진 않아요. 단지 작동을 안 할 뿐.

“좋아.”

감각기를 낀 손을 살며시 움켜쥐며, 시그니처를 불러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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