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99화 (172/558)

제199화

기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또 다른 재앙이라고 해야 할까.

밀레나는 하늘을 훑으며 사라지는 거대한 날개를 바라봤다.

홀연히 나타나 대기를 흔들더니 순풍을 남기고 종적을 감췄다.

마법인가?

그럴 리 없다.

마법은 심상세계의 발현. 창공을 덮는 날개는 인간이 품을 수 없는 마법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뭐지?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주저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잘게 찢어진 구름. 날개가 휘젓고 간 하늘이었다.

철그렁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무너진 건물 잔해 너머로 사람이 보였다.

대피하던 사람들이다. 붉은 실에 휩쓸려 죽은 줄 알았는데, 다들 살아 있었다.

그들도 거대한 날개를 봤는지 멍한 얼굴로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성도에 거주 중인 모든 사람이 똑같은 표정으로 맑게 갠 하늘 보고 있을 것이다.

“일단…… 살아남은 건가.”

꽉 조였던 숨구멍이 그제야 풀렸다. 탁한 숨을 내쉬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괴생명체를 갈라버린 정체불명의 남자. 그리고 천공을 휘감고 사라져버린 편익(片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살았네요.”

뒤로 누워버렸다. 딱딱한 돌이 등을 찔렀지만 그래도 좋았다.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았다는 충만감에 실없이 웃음이 나온다.

그래, 뭐가 됐든 살았으면 된 거지.

“너 정말!”

우뚝 솟은 시계탑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눈을 덮었다.

누군가 했더니 율이었다.

율이 울먹이는 눈으로 곁에 주저앉았다. 왜, 라고 묻기도 전에 율이 꽉 안았다.

“죽은 줄 알았어! 군병원 인근 대피소에 갔는데 네가 안 보였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 사람한테 물었더니, 어떤 꼬마애가 그러더라. 네가 이쪽으로 가고 있다고.”

“저기, 율…… 나 어깨가……”

“어깨 뭐! 넌 더 다쳐야 해. 아주 다리를 분질러서 못 돌아다니게 해야 한다고.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율이 어깨를 부여잡더니 사정없이 흔들었다.

진짜 아팠다. 울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은데, 글썽이는 율의 눈을 보고 있자니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의 훈련 때도 끝까지 살아남은 게 나잖아. 내가 왜 죽어.”

“이게 훈련이야? 너 지금 상태가 어떤 줄 알아? 아주 개판이야. 환자가 왜 이런 데를 와서…….”

“환자인 거 알면 좀 놔줘. 진짜 아파.”

“말했지? 넌 더 아파야 한다고.”

씩씩대며 노려보면 율이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진짜 죽은 줄 알았어.”

“내가 왜 죽어. 그리고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그만 좀 울어.”

“사람 속 다 썩이고 그게 할 말이야? 철 좀 들어라, 철 좀! 이래서 애들은 안 된다니까.”

“나이 얘긴 또 왜 나와.”

오른손을 들어 율의 팔뚝을 툭 쳤다.

“……앞으론 얌전히 있을 테니까 그만 다그쳐. 내가 애도 아니고.”

“너 애 맞아. 그냥 애야. 말 더럽게 안 듣는 애.”

율이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어깨는 그렇다 치고, 다른 곳은? 또 다쳤어?”

“아까는 더 다쳐야 한다며.”

“말꼬리 잡을래?”

눈빛이 정말 무섭다. 지금은 얌전히 대답해야 할 것 같다. 밀레나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조금 뻐근할 뿐이야. 크게 다친 곳 없어. 정말이야.”

“진짜지?”

“그렇다니까. 그보다 다른 애들은?”

“현장으로 투입됐어. 그 이상한 것들이 나타나자마자 귀족들을 대피시켰거든.”

율이 귀족 거주지 쪽을 바라봤다.

쑥대밭이 된 거리가 시야에 잡혔다. 붉은 실이 휩쓸고 간 자리. 복구하려면 얼마나 걸릴지, 감도 안 잡힌다.

“다들 무사해?”

“어. 그리고 대피가 빨라서 사상자도 몇 없을 거야.”

“그건 다행이네.”

율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너도 봤어?”

“날개를 말하는 거라면 당연히 봤지.”

“아니, 날개 말고. 사람. 그 붉은색 괴물을 없앤 남자.”

“그게 무슨 소리야?”

밀레나는 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잘못 본 것도 아니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야. 어떤 남자가 괴물을 갈라버렸어.”

“너… 괜찮은 거 맞지?”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 진짜니까. 거병이 그 남자를 하늘로 던졌어. 그리고 쓱……”

손날을 세워 세로로 긋다가 멈칫했다. 율이 한심하게, 그리고 동정을 담아 바라보고 있었다.

“너 머리 다친 거 같아.”

“아니라니까!”

“그 붉은 놈이 건물 옥상쯤에 있었던 거 같아? 아니야. 말도 못 하게 높게 떠 있었다고. 네 말대로 거병이 던져서 거기까지 사람이 간다 치자. 내려올 때는 어떻게 해? 아니, 그 전에 거병이 인간을 던지면 그 인간은 전신 골절로 사망이야.”

“…그래. 내 말이 믿기지 않겠지. 하지만 하늘을 가득 채운 날개보단 현실성 있지 않아?”

율이 입을 벙긋거렸다.

검으로 거대한 괴물을 갈라버린 남자, 하늘을 덮었던 무지막지한 한쪽 날개.

둘 다 말이 안 되는 거니까.

“네가 본 게 정말 사람 맞아?”

“멀어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인간의 형태는 맞았어. 남자였고.”

“그렇다면 저 거병 안에 있는 기사가 뭔가를 알고 있겠네.”

저 멀리, 현장을 떠나는 거병이 보인다. 관리국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나중에 물어봐야겠어.”

율이 거병을 바라보며 말했다.

“걸을 수 있겠어?”

밀레나는 오른쪽 다리를 살며시 들어봤다. 무릎이 시큰했다. 공격에 휘말려 나뒹굴었을 때 다친 모양이다.

긴장이 풀리니 몸 이곳저곳에서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다.

“어깨 좀 빌려줘.”

“아예 업어줄까?”

“그건 싫어.”

씩 웃는 율에게 기대 건물 더미에서 내려갈 때였다.

밝은 빛이 시야 바깥에서 일어났다. 빛을 인지하기 무섭게, 이번에 귀를 때리는 폭음이 뒤따랐다.

연이은 사태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율이 끌어안으며 자세를 낮췄다.

폭발음이 흩어지고 고요가 찾아들었다. 밀레나는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율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율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디서 일어난 폭발일까?

두리번거리다가 강렬한 이질감을 받았다.

높이 솟은 시계탑.

저건 왕성 옆에 있는, 성도에서 가장 크고 높은 시계탑이었다.

황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제국의 상징 중 하나.

시계탑은 멀쩡했다.

근데…… 그 옆에 자리하고 있어야 할 왕성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겠지.

헛웃음을 내며 눈가를 닦았다.

폭발로 인한 분진이 가라앉고, 믿을 수 없는 실체가 완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성도의 중심.

한 번도 함락된 적 없는 제국의 성.

무너져선 안 될, 아니, 흠집조차 나선 안 될 왕성이 아주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율.”

맥없는 목소리가 나왔다.

“어, 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맞아?”

“오히려 내가 묻고 싶네. 지금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거 맞지?”

밀레나는 율을 바라봤다.

“가보자. 나 좀 업어줘.”

율에게 몸을 맡겼다. 신체술을 사용해 엉망이 된 거리를 치고 나가던 율이 한순간 걸음을 멈췄다.

제국의 주요 관료들이 길바닥에 서 있었다.

황제를 보호하는 수호기사대 역시 보인다. 대신들 사이에 황제가 있었다.

밀레나는 시선을 조금 더 뒤쪽으로 옮겼다.

왕성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할 터가 움푹 파여 있었다. 한때 성의 한 축을 이뤘을 돌무더기들이 터 주변에 뿌려져 있었다.

“주변을 경계하라!”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황제가 이동하는 게 보였다.

“말도 안 돼.”

율이 허탈한 목소리를 냈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날이네.”

밀레나는 뺨을 살짝 쳐봤다.

이쯤 되니 의구심이 든다.

꿈이 아닐까?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 상식 저편의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었다.

이 뒷감당은 누가 할 것인가?

차라리 꿈이어야 한다.

그래, 이제 깨자. 깨고 나면 달콤한 차를 마시고 진정하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보이는 건, 분주히 움직이는 관료들과 연기를 뿜어내는 빈터였다.

* * *

왼쪽 눈이 시큰했다.

가하란은 모노클을 빼고 손바닥으로 눈 주변을 살며시 눌렀다.

-그거, 계속 사용해도 괜찮은 건가요?

카트시가 다가와 물었다. 얼굴 옆에 뜬 둥근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선을 계속 들여다보면 아프긴 하지만, 위험하지는 않아. 시간도 조금씩 늘리고 있고.”

-만물의 정보가 선으로 치환되는 기능. 몇 번이고 설명을 들어봤지만 제 이해력으로는 그 기능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네요.

“나도 이게 어떤 건지 정확히 알고 싶지만, 설명해줄 사람이 없어. 정령들 사이에서는 ‘눈이 뜨였다’라고 하는데,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고.”

-정령술사들이 말하는 ‘뜨인 눈’은 안원에 입장할 수 있는 자격을 뜻해요. 가하란처럼 정보가 선으로 바뀌는 건 아니죠.

“그런가?”

-줄리어스도 감각 장치의 도움 없이 우리와 접촉할 순 없었어요. 하지만 가하란은 그게 가능하죠. 기계어도 결국 정보. 가하란의 눈은 모든 정보를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거예요.

“보이긴 해도 그게 뭘 뜻하는지는 몰라. 지금도 카트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고.”

-차차 연구해보죠. 마력선 짜맞춤을 깨달으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마력선 짜맞춤.

가하란은 도안을 내려다봤다. 두 달간 마나포집에 관한 도안을 살피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선만 보일 뿐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는데, 지금은 서로 반응하고 작용하는 영역이 어디인지 파악하게 됐다.

하나하나 배워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줄리어스가 하나씩 설명해주는 거 같아. 어렵지만 조금씩 알아가는 재미가 있어.”

-거기서 재미를 느낀다는 게 가하란의 특장점이에요.

카트시의 안구가 빙글 돌았다.

-근데 엔엔이 안 보이네요?

“무슨 회의가 있다고 들었어. 그래서 그쪽에 가셨고.”

-그래요? 말썽쟁이 칼랑족이 없는 공방. 마음에 드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계속 움직이는 카트시였다. 가하란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픽 웃었다.

“심심해서 그래?”

-제가요?

“응. 엔엔 님 안 계시니까 심심한 거 아니야?”

-뭘 모르시네요. 전 심심하다는 개념을 몰라요.

“거짓말.”

카트시는 대꾸하지 않고 공방 구석으로 갔다. 거기에는 두툼한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는데, 카트시가 원하면 한 장씩 넘어가는 장치가 달려 있었다.

-책 볼 거니까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난 방해한 적 없어.”

-아무튼요!

가하란은 어깨를 으쓱인 다음 다시 모노클을 꼈다.

선의 세계를 훑는 게 점점 더 익숙해진다. 5분 정도 유지하는 건 이제 불편하지 않을 정도다.

도안 안에서 꿈틀대는 선들을 지켜봤다. 이 안에 마나포집의 해답이 들어있다.

마나포집을 이해하게 되면 커넥터 없이도 농밀한 마나를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법등을 거리마다 설치할 수 있고, 무거운 짐을 옮기는 자동 수레도 도시 곳곳에 둘 수 있을 것이다.

편해지는 세상.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여기와 여기가 반응하는 거니까…….”

선들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종소리가 들려왔다. 공방에 손님이 온 것이다.

작업실에서 벗어나 공방 출입구로 갔다. 문을 열기 전 할 말을 정리했다.

죄송해요. 오늘은 엔엔 님께서 자리를 비우셨어요. 다음에 다시 와주시겠어요?

입 안에서 말을 굴리며 문을 열었다.

“마침 나와 줬군요.”

어?

가하란은 눈을 깜빡거리며 눈앞에 선 남자를 바라봤다.

“가하란 님. 절 기억하시나요? 선생님, 아, 첼 님 곁에 있던 사람입니다만.”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