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생긴 건 적당히 풀어놓은 실타래 같았다. 형태가 조금씩 바뀌고 있어서 뭐라고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저건 뭐지?
괴이한 현상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몸체로 보이는 곳에서 붉은색 실들이 뿜어져 나왔다.
“저게 뭐죠?”
“…밀레나 양.”
“네?”
“위험해지면 바로 건물 밖으로 나가요. 휩쓸리지 말고.”
칼리고가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벗어났다.
대체 무슨 일이지?
밀레나는 창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봤다.
기괴한 붉은색 실 덩어리가 위치한 곳. 거리상으로 봤을 때 귀족 거주지 같았다.
군병원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
가닥가닥 흩어진 실들이 점차 굵어지더니 대지를 휩쓸어 버렸다.
한 달 전과 마찬가지로, 위험을 알리는 종소리가 매섭게 울려 퍼졌다.
“밖으로 대피해요!”
병실 문이 활짝 열리며 경비가 소리쳤다. 밀레나는 외투를 챙기고 밖으로 나갔다.
병원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괴생명체를 등지고 도망쳤다. 밀레나는 잠시 멈춰 서서 저 멀리 있는 부유체를 바라봤다.
뻗어져 나온 붉은 실이 채찍처럼 주변을 후려치고 있었다.
건물 잔해가 허공으로 솟구치는 게 보였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붉은 덩어리가 채찍에 휩쓸려 튕겨 나갔는데, 그게 사람이란 걸 알아보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폭발하는 괴물에 이어 하늘을 점거한 괴생물체.
왼쪽 어깨가 아려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시야에 나뒹구는 장창 하나가 보였다. 대피 도중에 경비가 떨어트린 것 같았다.
밀레나는 몸을 숙여 장창을 잡았다.
그러고는 홀린 듯이 사건의 중심지로 걸어갔다.
맞은편에서 겁에 질린 사람들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밀레나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이쪽으로 가세요!”
대피소 방향을 알려주면서 천천히, 하늘에 뜬 붉은 괴생명체를 향해 전진했다.
가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왜 가고 있는지.
머리가 멍했지만 그럼에도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뛰다가 넘어진 아이가 보였다. 일으켜 세워주고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 줬다.
무릎이 까져서 살짝 피가 나오고 있지만 심한 상처는 아니었다.
“걸을 수 있지?”
“…응.”
“좋아. 그러면 이 길을 쭉 따라서 가.”
아이가 길을 한번 바라본 후 밀레나에게 시선을 줬다.
“혼자?”
“왜? 무서워?”
남자아이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 할 수 있어.”
아이가 대피소를 향해 뛰었다. 밀레나는 주변을 살피며 외쳤다.
“여긴 위험해요! 당장 밖으로 나와서 대피하세요!”
건물 안에 있던 몇몇 사람이 뛰어나왔다.
이제 다 대피한 건가?
반대쪽 도로를 바라봤다. 치안관리병이 사람들을 이끌고 이동 중이었다.
다들 맡은바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밀레나는 창을 움켜줬다. 세상을 구하는 건 영웅이지만, 그걸 유지하는 건 우리 같은 사람이지.
“거기 꼬마야! 위험한 데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
밀레나를 발견했는지, 저 멀리 있는 관리병이 외쳤다.
이쯤이면 됐겠지.
더 다가가는 건 위험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피난 대열에 합류하려 할 때였다.
콰가가각!
굉음과 함께 시야가 한순간 검게 변했다.
* * *
머리는 차갑게.
그리고 가슴도 차갑게.
어떠한 순간에도 냉정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게 기술자의 마음가짐이라고 얀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얀스는 냉정보다 열정을 택했다. 이성적으로 말해도 저 새낀 말을 안 들어먹을 테니까!
“야! 내려!”
일단 외쳤다.
격납고 밖으로 한 걸음 내디딘 거병이 행동을 멈췄다.
-저거 안 보여?
비일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거병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
그곳에 붉은 괴생명체가 둥둥 떠 있었다.
“보여, 잘 보여.”
-그렇지?
“근데 네가 왜 가냐고! 그것도 시험기를 끌고!”
딱 봐도 위험했다. 징그러운 촉수가 지면을 긁을 때마다 건물이 와르르 무너지는 게 보였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런 곳으로 가겠다고?
그것도 시범 운영 중인 시험기를 대동하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가려면 너 혼자가! 내 소중한 아이는 내버려 두고!”
-말을 섭섭하게 하네.
“더 심한 말 하기 전에 일단 내려. 너 써전이야! 위기 상황에서 나서야 할 사람은 거병 기사고!”
-지금 당장 투입할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잖아. 이 시험기를 제외하고는 전부 가동 정지 상태고. 오버홀 주기잖아?
“그래도 안 돼!”
-왜!
“위험하니까! 그걸 말해야 알아들어?”
씩씩거리며 거병 앞을 막아섰다.
이 멍청한 친구는 말로 해선 안 들어먹을 것이다.
이번 일은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리 거병이라고 해도 저 기괴한 생명체의 공격을 버텨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설령 막아낸다 해도 그다음이 문제다.
거병 한 기로 대체 뭘 하겠다는 건가?
시험기라 제대로 된 무장도 없었다. 철골을 들고 싸워야 할 판인데, 공중에 있는 괴물을 대체 어떻게 상대하려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너 사고 치면 안 돼. 거병을 무단으로 기동시키면 문책으로 안 끝나. 이번엔 정말 큰일 난다고!”
여긴 성도 한복판이다.
비무장한 거병이라고 한들 그 자체만으로도 병기.
코앞에 왕성이 있는데, 기동 허락이 안 떨어진 거병을 타고 돌입한다?
상황이 어떻든 간에 재판장으로 끌려갈 것이다. 비상사태임을 감안해도 너무 위험하다.
비일을 아니꼽게 여기는 자들이 ‘국가 전복’이란 말도 안 되는 죄명을 붙여 처리할지도 모른다.
-얀스. 네 말이 맞아.
“그래. 이제 좀 진정했어?”
-어.
“그러면…….”
말을 끝맺기도 전에 거병이 움직였다. 얀스는 허탈한 심정으로 머리 위로 움직이는 거병의 다리를 보았다.
“야!”
-다녀올게. 안 망가트리고 잘 돌아올 테니까 걱정 마.
“야 이, 멍청아!”
쿵, 쿵, 쿵.
외장갑조차 허술하게 달린 거병이 사건 중심지를 향해 걸어간다.
얀스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탄원서라도 적어놓자.”
하늘에 뜬 괴물체보다 비일의 미래가 더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 * *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온몸을 때리는 격통에 그저 신음만 삼켜야 했다.
나뒹굴던 몸이 어딘가에 부딪혔다. 어깨 쪽에서 시큰한 통증이 일었다.
밀레나는 잔기침을 토해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바로 앞도 안 보였다. 모래 폭풍 같은 먼지가 사방을 가렸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삐, 하는 이명 뒤에 파리가 날갯짓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호흡을 고르며 놀란 신체를 진정시켰다.
바람이 불어온다. 피어올랐던 먼지가 바람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눈에 들어온 건, 처참한 광경이었다.
도로를 기점으로 양측에 올라가 있던 건물이 죄다 무너져 내렸다. 포장된 도로는 죄다 갈려 나갔고, 거리를 장식한 조형물들은 본래의 형태를 잃고 고철이 돼 흩뿌려졌다.
밀레나는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하늘을 가리는 기다랗고 굵은 실.
저 붉은 실이 대지를 한번 긁었을 뿐인데,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
다리가 와들와들 떨렸다.
가늠할 수 없는 적의 실체가 온몸을 짓눌렀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공포와 허무함이었다.
밀레나는 고개를 왼쪽으로 살며시 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대피소를 향해 이동하던 사람들이다.
적어도 열 명.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른침을 삼켰다. 살아 있을 확률을 지극히 낮았다.
“이게…… 뭐야.”
이마를 타고 뜨뜻한 것이 흘러내렸다.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피. 머리 쪽을 매만졌다. 다행히 출혈은 심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콰앙, 또다시 붉은 실이 주변을 훑었다. 압도적인 파괴력이었다. 건축물이 종이처럼 찢겨 나간다.
밀레나는 하늘에 뜬 괴물체를 바라봤다.
인간이, 지면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이 저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밀려드는 공포감을 가까스로 이겨내며 자리를 옮길 때였다.
또 다른 절망을 발견했다.
상공을 장악한 붉은 생명체는 한 개가 아니었다.
같은 크기의 괴생명체가 두 개.
어쩐지 부피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성도 전역을 장악하려는 건가?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해야 이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부러진 장창이 눈에 들어왔다.
무력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상황에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마법사 클랜은 대응 준비를 하고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들은 마법사뿐이었다.
아니면 위대한 정령술사나.
뛰어난 기사도 하늘에 뜬 상대를 향해 칼질을 할 순 없으니까.
쿵, 쿵, 쿵.
육중한 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다. 이런 소음을 일정하게 내는 거라면…….
밀레나는 무너진 건물 더미 위로 올라갔다.
거병.
그것도 시험기였다. 거병관리국 구석에서 몇 번 기동하는 걸 보긴 했는데,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건가?
밀레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토록 거대해 보이던 전략 병기가 지금은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
괴생명체가 휘두르는 채찍을 저 쇳덩이가 버텨낼 수 있을까?
거병의 방어력으로도 견뎌낼 수 없다면 저걸 어떻게 저지하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왕성이 있었다.
제국의 상징.
여기서 막지 못하면 그곳도 곧 유린당할 것이다.
거병이 멈춰 섰다.
뭘 하려는 걸까?
신체술로 시력을 높였지만, 몸 상태가 엉망이라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로 상황을 살필 때였다.
사람이, 검 한 자루를 든 사람이 거병 쪽으로 걸어갔다. 대화를 나누는지 잠시 서로를 바라본다.
“저건 누구지?”
남자인 건 확실했다. 망토를 두르고 있는데, 망토가 걸레짝처럼 찢어진 상태다.
난전을 치르고 온 전사 같았다.
왜 저기서 저러고 있지?
의문을 품던 순간이었다.
거병의 손 위로 남자가 올라갔다.
아! 후퇴하려는 구나.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거병이 손을 뒤로 뺐다. 남자가 올라탄 손이었다.
“어?”
얼빠진 소리가 입에서 나오는 순간, 거병이 땅을 휩쓸 듯 손을 움직여 남자를 하늘로 던져버렸다.
“뭐 하는 거야!”
어이가 없었다. 뭐지? 기계 오작동인가?
애꿎은 사람 하나가 허무하게 죽는구나 싶었다.
그 순간.
푸른 선이 길게 그어졌다. 붉은 생명체를 중심에 두고 그어진 선이었다.
멀리서도 확연히 구분 가능할 정도로 짙은 색.
하늘에 뜬 괴생명체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떤 소리도 없이 녹아내려 버렸다.
허무할 정도로 깔끔한 정리였다.
밀레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봤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하늘로 던져졌던 남자가 몸을 틀더니 거병 위로 떨어졌다.
기괴한 부유체만큼이나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저 높이에서 떨어지면 신체술이고 뭐고, 피륙으로 이뤄진 인간은 죽어야 한다.
그게 자연의 법칙이고, 물리적인 결과다.
그런데 남자는 모든 현상을 비웃듯이, 고양이처럼 가볍게 거병 위로 안착했다.
같은 인간이 맞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바람이 불어왔다.
볼을 간질이는 살랑바람에서 점점 풍속이 강해지더니, 이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풍압에 몸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최대한 몸을 낮추고 날아가지 않도록 손에 걸리는 걸 꽉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기상 변화였다.
이건 또 뭐지?
이를 악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발견했다.
“……엄마.”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커다란 날개가, 하늘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한쪽 날개가 붉은 생명체를 쓸어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