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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197화 (170/558)

제197화

“좋아요. 왼팔 한번 움직여 볼까요?”

밀레나는 의술사의 말에 따라 왼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어깻죽지에 감아놓은 붕대가 팽팽해지는 게 느껴진다.

“어떤가요?”

“확실히 좋아졌어요.”

의술사가 웃으며 말했다.

“경과가 좋긴 하지만 좀 더 지켜봐야 해요.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상처였어요. 손상된 근육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조심, 또 조심해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의술사가 눈에 모노클을 얹으며 펜을 들었다.

또 그건가. 밀레나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발열이나 발진, 그 외 기타 특이한 증상이 있었나요?”

“아니요. 지난 한 달간 아무 문제 없었어요. 앞으로도 없을 거고요.”

“좋습니다.”

한 달 전, 정체 모를 괴물과의 전투에서 심한 상처를 입었다.

전투 중에는 몰랐으나, 흥분이 가시고 나자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다.

그래도 죽을 부상은 아니어서 내심 안심하고 있었는데, 다른 쪽에서 문제가 생겨버렸다.

괴물은 마수와 닮았다,

그게 문제였다.

인체 오염. 혹은 잠식.

마수에게 공격당한 인간은 피부에서 시작해 몸 전체가 괴멸하게 된다.

물론 성도에서 날뛴 괴물은 마수와 닮았을 뿐, 마수는 아니었다.

그래도 미지의 생물이란 점은 동일했고 2차 감염을 대비한 조치가 이뤄졌다.

밀레나는 지난 한 달 동안 군병원에 붙들려 있었다. 사실상 격리였다. 면회도 불가. 바깥소식은 쪽지로 전해 받았다.

결론적으로 8구역은 무사했다.

그 거대한 폭발 속에서도 8구역에 지어진 싱크탱크는 건재했다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각 싱크탱크의 입구는 거병 외장갑에 쓰이는 광물로 지어졌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8구역에는 이렇다 할 보안 시스템이 없었다. 외곽을 도는 경비도 없었고. 무식하게 튼튼한 입구가 모든 걸 차단하는 철옹성이었던 것이다.

폭발을 일으킨 건 다름 아닌 괴물의 몸, 그 자체였다.

마법사가 스크롤을 준비해 폭발을 유도한 게 아니라, 괴물의 몸이 터져 버렸다고 한다.

그 사실을 율을 통해 알게 됐을 때 머리가 아찔해졌다. 발악하던 괴물이 최후의 순간에 터져 버렸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오늘도 안정적이네요. 신체술 유지에도 문제가 없고.”

밀레나는 눈을 뜨고 의술사를 바라봤다.

“앞으로 얼마나 더 여기에 있어야 하죠?”

“확답을 줄 수가 없어요. 밀레나 양, 알다시피 이번 일은 초유의 사태예요. 불확실한 것들이 너무 많아서 우리도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하는지 곤란해하고 있어요.”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성도에서 테러가 일어났고, 그 테러의 주범이 괴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는데 조심을 기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는데, 한 달간 붙잡혀 있었더니 좀이 쑤신다.

“밀레나 양.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해줘요. 우리가 최대한 신경 써볼 테니.”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의술사가 진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다음 회진 때 보죠.”

의술사가 문을 열고 나섰다. 열린 문틈으로 무장한 군인이 보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감시받는 처지였다. 혹시 괴물로 변하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밀레나는 스카프로 머리를 질끈 매고 책상에 앉았다. 편의를 봐준 덕에 원하는 책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음식을 요구하면 한 시간 내로 왔고, 바깥바람도 짧게나마 쐬는 게 가능했다.

엔첸세.

이 모든 게 이뤄지는 단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만약 가문명이 엔첸세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이었다면?

밀레나는 군병원 지하로 끌려가는 시민을 본 적이 있었다. 같은 부상자였으나 처우는 달랐다.

씁쓸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그토록 시답잖게 느껴지던 귀족의 권위와 자리가 요 며칠 사이 고맙게 느껴진다.

이래서 다들 명성에 목을 매는 걸까.

엄마처럼 자유롭게 산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나저나 딸이 생사를 넘나들었다는 걸 아시려나?”

대륙 어딘가에서 기이한 일을 벌이고 있을 엄마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사람을 만날 수도 없고, 체력 단련은 꿈도 못 꾸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신체술을 사용하며 책을 읽는 것뿐.

좋아하는 소설이었지만 몇 장 넘기자마자 딴생각이 들었다.

밀레나는 책을 덮고 천장을 바라봤다.

한 달 전, 그 긴박했던 상황이 그려진다.

그때의 냄새도, 촉감도, 진득하게 울려 퍼지던 괴물의 소리도 되살아났다.

다시금 그때의 전투를 냉정하게 되살펴 봤다.

짧게 주고받은 합 사이에 수없이 일어나던 생각들.

아쉬운 부분이 너무나도 많은 전투였다.

일단 흥분 상태에 돌입하면 생각이 짧아진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체급 차이가 나는 괴물한테 돌진해서 주도권을 빼앗아 오려 하다니?

돌이켜 보면 정말 미친 짓이었다.

만약 괴물의 흉부가 팔과 마찬가지로 단단해졌다면, 단검은 튕겨 나가고 괴물한테 붙잡혔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죽었겠지.”

이번에는 옳은 선택이었지만 다음에도 이런 행운이 따라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행운의 신은 두 번 웃어주지 않는다.

스콜라의 격언이었다.

밀레나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이렇게 피했으면 어땠을까?

저렇게 반격했으면 좀 더 안전했을까?

얌전히 있으라는 의술사의 조언대로, 정말 살며시 움직였다.

가상의 괴물과 몇 번이고 싸움을 이어 나갔다. 신체술을 유지한 상태라 몇 걸음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땀이 쭉 났다.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을 떼어냈다.

“……역시 싸우지 말고 그 애를 들고 도망치는 게 가장 좋았겠네.”

발목을 다친 상태였으니 검으로 거리 조절을 한 후 아이 쪽으로 냅다 뛰었어야 했다.

제압이 능사가 아님을 다시금 깨닫는다.

압도적인 무력이 있다면 눈앞의 장애물을 잘라내는 게 바른 방법이겠지만,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달뜬 숨을 살포시 내쉬면서 침대에 걸터앉을 때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검진은 끝났는데?

의아해하며 문을 열었다.

“잘 지냈어요?”

문밖에 정말 예상치 못한 손님이 있었다. 밀레나는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 지냈어요.”

“에이, 이런 곳에서 지내는데 어떻게 잘 지내요. 갑갑하죠? 저였으면 좀 내보내 달라고 아주 소리를 질렀을 거예요. 근데 들어가도 될까요? 밖에 서서 얘기하는 것도 괜찮지만.”

밀레나는 뒤로 물러서며 그를, 감찰단장 칼리고를 안으로 들였다.

그제야 손에 든 바구니가 보인다.

꽃다발 하나, 과일 몇 개, 다과상에 올라갈 법한 아기자기한 쿠키와 책. 구석에는 손바닥 크기의 인형도 보였다.

“자, 이거 받으시고.”

엉겁결에 바구니를 받았다.

“밀레나 양의 취향을 잘 몰라서 일단 다 가져와 봤어요. 아, 거기 있는 인형은 제가 만든 거예요. 손재주가 썩 좋지는 않지만 나름 봐줄 만해요.”

“아…… 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맥 빠진 대답이 나왔다.

“몸은 어때요?”

칼리고가 책상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괜찮습니다.”

“그 괴물 놈한테 공격당했다고 들었어요. 상처는 잘 아물었나요?”

“거의 다 나았어요.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 지켜보고 있긴 하지만.”

“상황이라. 걱정이 많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걱정만 하지 말아요. 일이란 게 대개 걱정에서 머물고 실제 일어나지는 않으니까.”

밀레나는 다친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감찰단장. 이분이라면 많은 걸 알고 있으리라.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그 괴물들은 어디서 온 건가요?”

“음, 아직은 대답해줄 수가 없네요. 곧 공식적인 발표가 날 테니 그때까지만 참아줘요.”

“분명 목적이 있어 보였어요. 이성을 잃은 것 같았지만, 8구역으로 몰려가는 걸 보면 목표가 그쪽이었다는 건데…… 주도자가 있는 걸까요?”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근데 그 역시 지금 단계에서는 말할 수 없어요.”

말할 수 없다.

정보에 접근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보통 일이 아니란 뜻이다.

성도 곳곳에서 괴물이 튀어나왔다.

그것도 동시다발적으로.

위험 요소가 성도 한복판까지 들어왔다는 뜻. 관리 소홀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제국의 심장이 요격당한 거니까.

누구일까?

이 대범한 범행을 저지른 자는.

“연합왕국인가요?”

“그쪽은 아니라고 해두죠. 자, 이 질문은 여기까지만 해요. 더는 말해줄 수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연합왕국이 아니라면 내부 소행이라는 뜻인데.

그게 더 위험한 일이었다.

황가? 의회? 아니, 두 곳 모두 성도를 기점으로 하는 권력 집단이다.

제 살 깎아 먹는 행동을 했을 리 없다.

그렇다면 1등 귀족?

그들 역시 성도를 타격할 이유가 없다.

애초에 8구역을 노린 공격이었다. 싱크탱크의 기밀이 탐났으면 조용히 첩자를 보낼 일이지, 폭발을 일으키는 건 이상하다.

무엇을 위한 폭발인가?

지식인들에게 철퇴를 내려친 건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손에 쥔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생각이 많겠죠. 하지만 지금은 고민을 접어두고 몸을 챙겨요.”

칼리고가 바구니에서 사과를 한 알 꺼내 으적으적 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가장 먼저 던졌어야 할 질문이 있음을 떠올렸다.

“단장님.”

“네?”

“근데 여긴 어쩐 일로…….”

“들었거든요. 밀레나 양이 다쳐서 여기에 있다는 걸요. 뭐, 행정처에 확인해야 할 문건이 있어서 왔다가 겸사겸사 여기까지 들렀어요. 가까우니까.”

칼리고가 책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제 어린 친구가 밀레나 양을 꽤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조금 더 신경이 쓰였죠.”

“네? 어린 친구요?”

“누굴 거 같아요?”

빙긋 웃는 칼리고였다.

밀레나는 짧은 고민 끝에 그 애가 누군지 알아냈다.

“가하란이죠?”

“정답! 밀레나 양을 아끼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니 다치지 말고 조심해요. 사람을 구하는 것도 좋지만, 나 자신을 먼저 보호하는 법도 알아야 해요.”

“……그래서 다음부터는 도망부터 생각하려고요.”

“말은 그렇게 해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몸부터 던지겠죠. 사람의 성향이란 게 참 안 바뀌거든요.”

칼리고가 손을 털며 문으로 걸어갔다.

“시간이 금방금방 가요. 벌써 4월이에요. 두 달 후면 성도가 떠들썩해질 축제죠.”

“그때쯤에는 저도 밖에 나갈 수 있겠죠?”

“그래야죠. 아마 곧 나가게 될 겁니다. 다른 환자들도 이렇다 할 증상이 없으니까요. 잠식 문제는 없는 것 같으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찰단장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몸 잘 챙겨요.”

“예, 단장님.”

칼리고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 때였다.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단장이 웃음이 싹 사라진 표정으로 창가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밀레나도 조심스럽게 창가로 걸어갔다.

입이 살짝 벌어졌다.

저게 대체 뭐지?

저 높은 하늘에 기괴한 물체가 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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