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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196화 (169/558)

제196화

“전쟁이라도 일어난 거야, 뭐야?”

율이 멍한 얼굴로 말했다.

“다들 괜찮아?”

떨어져 있던 로운이 다가왔다. 뿌연 먼지가 머리에 내려앉아 있었다.

밀레나는 쥐고 있던 검을 늘어트렸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괴물이 튀어나오더니 8구역 쪽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성도의 싱크탱크가 밀집된 8구역.

그곳에 문제가 생긴다?

제국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이 될 것이다.

“들것 가져와!”

“여기 밑에 사람이 깔려 있어!”

어느 정도 수습됐다고 생각했는데, 연이은 폭발에 다시 엉망이 됐다.

“충격이 여기까지 전해질 정도면…….”

율이 말끝을 흐렸다.

폭발의 진원지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됐을 것이다.

“8구역 쪽이면 싱크탱크 입구만 덩그러니 있는 곳이잖아. 인명 피해는 없으려나?”

“그 입구가 무너졌을지도 몰라. 지하에 사람이 꽤 있을 텐데.”

“큰일이네.”

밀레나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여기 수습부터 하자. 저쪽은 우리가 손댈 수 없을 것 같으니까.”

8구역 문제는 우등 교관과 군대가 해결할 것이다.

‘깜냥에 맞는 일을 해라.’

교육받을 때 수도 없이 들은 말이다. 지금 해야 할 일은 괴물의 뒤를 쫓는 게 아니라 무질서를 통제하고, 부상자를 돌보는 것이다.

율과 로운은 통제관에게 가보겠다며 자리를 옮겼다. 밀레나도 동기들을 따라가려 했다.

“…세요.”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붕괴한 건물 주변이었다.

잘못 들은 건가?

신체술을 끌어올렸다. 피로감에 머리가 아찔해졌지만 버틸 만했다.

예민해진 귀가 끊어져 가는 숨소리를 잡아냈다.

건물 잔해 뒤쪽으로 돌아갔다. 큼지막한 나무 간판 밑에서 살려달라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밀레나는 주변 구조를 살폈다. 무너진 벽돌 더미를 나무 간판이 절묘하게 막아주고 있었다.

몸을 숙여 간판 아래쪽 틈을 바라봤다.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무너진 건물 더미 아래 갇혀 있었다.

“이봐요, 내 말 들려요?”

“네, 네. 들립니다.”

“상태 어때요? 크게 다쳤나요?”

“아니요. 다리가 끼어서 못 움직일 뿐, 크게 다치진 않았어요.”

“다행이네요. 조금만 기다려요. 사람들을 불러와서 꺼내줄 테니까.”

그녀가 제아무리 신체술을 쓴다고 해도 돌무더기를 떠받들고 있는 간판을 치울 순 없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2차 붕괴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 지지대를 세우고 잔해를 치워야 한다.

“잠시만요!”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남자가 붙들었다.

“근처에 딸이, 제 딸이 있습니다.”

아이?

밀레나는 재빨리 인근을 훑었다. 형태를 잃고 무너진 건 주변에 이 건물뿐. 나머진 문틀이 휘거나 지붕이 떨어졌을 뿐이다.

쭉 뻗은 도로 어디에도 여자아이는 없었다.

“건물이 무너질 때 제가 옆으로 밀었어요. 근처에 없나요?”

“찾아볼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천천히 꺼내줘도 괜찮으니 그 애부터…….”

“아이 이름이 뭐죠?”

“엘리입니다.”

안심하라는 말을 건네기 위해 다시 간판 밑을 볼 때였다.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는 고마움과 당혹감, 그 사이를 헤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해해요. 그쪽 눈에는 못 미더워 보이는 어린애로 보일 테니까. 하지만 안심해요.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남자가 살짝 울먹이며 말했다.

“우는 건 나중에 해요. 일단 안에서 크게 움직이지 마요. 그대로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예요.”

밀레나는 반대쪽 건물을 바라봤다. 큰 폭발이 있었다. 본능적으로 가림막을 찾아 움직였을 것이다.

“엘리!”

반대쪽 건물로 걸어가며 이름을 외쳤다. 어딘가에 숨어 있다면 부름에 대답하리라.

몇 번 더 이름을 불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안 좋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붕괴 전에 아이를 밀쳐냈다고 하지만, 혹시 늦었다면?

“엘리!”

끔찍한 상상을 떨쳐내기 위해 다시금 소리를 지를 때였다.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골목 벽에 붙어 있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엘…….”

한시름 놓으며 이름을 부르려 할 때였다.

아이의 상태가 이상했다.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동시에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밀레나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파악!

손가락이 땅을 후벼 팠다.

찰나였다. 한 호흡만 늦었어도 정수리부터 찢겨 나갔을 것이다.

밀레나는 거친 호흡을 내쉬며 검을 뽑아 들었다.

뒤도 안 돌아보고 8구역으로 뛰어가던 괴물들. 이 거리에 더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떨리는 눈으로 눈앞에 떨어진 괴물을 바라봤다.

발목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뼈가 드러나고 피가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중이다.

다쳐서 낙오한 놈인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밀레나는 괴물의 눈을 바라봤다. 아이가 어디 있는지, 저놈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내버려 두고 있었다.

미끼로 쓴 것이다.

“지능이 있는 건가.”

인간을 닮았지만 하는 행동은 한없이 금수에 가까운 괴물들.

그러나 눈앞에서 거리를 재고 있는 괴물은 전투 훈련을 받은 인간처럼 보였다.

튀어나온 턱으로 그르렁거리던 괴물이 갑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나, 난!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 선견자시여, 이건 내가 바라던 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던 괴물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다시 그르렁거리는 괴물과 눈이 맞았다.

밀레나는 깨달았다. 어렴풋하게 감돌던 지혜의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8구역을 향해 무자비하게 달려들던 다른 괴물과 똑같아졌다.

실더라는 선례를 직접 봤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서 믿지 않고 있었다.

인간이 저런 추악한 괴물로 변하다니. 그릴 리 없어.

“정말…… 사람이었어.”

밀레나는 검 끝으로 괴물을 겨누었다. 자세는 잡았지만 머리는 복잡했다.

기동력이 떨어진 괴물이라고는 하나 혼자서 처리할 수 있을까?

로운과 율이 곁에 있다면 한 번의 실수 정도야 무마할 수 있다.

동료가 뒤를 봐줄 테니까.

하지만 혼자일 때는 선택을 잘못하면 그대로 끝이다.

거리에 나뒹구는 시체 한 구로 변하는 것이다.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할 때였다.

저 괴물은 다리를 다쳤다. 무리하게 전투하지 말고 본대가 있는 쪽으로 물러서는 게 옳다.

영웅이 되고 싶지도, 될 필요도 없었다.

자신감을 억누르고 효율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뒤로 반걸음을 물러서며 거리를 둘 때였다.

괴물에서 꽂혀 있던 시선이 저 너머에 있는 아이한테 옮겨졌다.

아.

온 신경을 괴물한테 빼앗겨 잊고 있었다. 저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지금도 입을 막고 울음을 참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저 아이는 분명 죽게 된다.

호흡이 가빠졌다.

구하러 뛰어드는 건 무모한 짓이다. 뒤에 동료가 있으니 물러서서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

모두를 구할 수 있다는 자만을 버리고, 확실하게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살리는 게…….

밀레나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약속은 지켜야지.”

아빠한테 데려다주기로 했으니까.

교관이 봤다면 모자란 판단이라고 욕했을 것이다. 확실하게 처리할 방법을 강구하라고 다그쳤을 것이다.

수석연구원의 말이 귓가를 스쳐 갔다. 부디 몸조심하라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괴물을 바라봤다.

영웅이 될 수도, 될 필요도 없다.

그건 능력에 맞지 않은 꿈이다.

내가 바라는 건 엄마의 등을 쫓아 유능한 거병 기사가 되는 거지, 선망받는 영웅이 되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눈앞에 있는 아이 정도는 지켜야 할 거 아니야.

모두를 구하는 영웅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 저 애만 구할 수 있길!

검을 비스듬히 뉘인 다음 달려들었다.

괴물은 왼쪽 발목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상태. 이동이 부자연스러울 테니 왼쪽을 집요하게 노려야 한다.

휘두르는 손을 검신으로 쳐냈다.

캉, 소리가 귀를 때렸다. 살점이 아니라 쇳덩어리 같다.

개체마다 능력이 다 다른 걸까.

빠르게 검신을 바라봤다. 이가 나가거나 부러지진 않았다. 괴물의 팔을 바라봤다. 다행히 팔 부분만 경화가 이뤄진 것 같다.

괴물이 힐긋, 뒤쪽을 바라본다.

아이한테 시선을 주고 있다. 인질임을 인식시키려는 것처럼.

뒤로 물러서게 해서는 안 된다.

아이가 붙잡히면 손쓸 도리가 없다.

무리해서 앞으로 뛰어나갔다.

신체술을 끌어올리자마자 눈앞이 붉게 변했다. 반동이 온 것이다.

색각 이상. 그래도 그 외에 불편한 점은 없었다.

민 교수에게 감사를.

지독하게 훈련시켜 준 덕에 신체술 유지 시간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 이…… 길리우…….”

괴물이 띄엄띄엄 무언가를 말했다.

집중해서 듣고 있을 시간이 없다.

밀레나는 공기를 입 안 가득 물며 오른발로 지면을 찼다. 바람이 날카롭게 볼을 가르고 지나간다.

저만치 멀리 있던 괴물이 코앞에 있었다.

비스듬히, 검을 그었다. 탕, 소리와 함께 막혔다. 막히는 것까지 예상했던 바다.

검을 놓아버렸다. 괴물의 품으로 파고들며 허리춤에 달아놓은 단검을 뽑았다.

어깨로 녀석을 밀며, 손에 쥔 단검으로 갈비뼈 밑을 노렸다.

콰직!

체중까지 실어 단검을 밀어 넣었다. 단단한 살집 사이로 검이 파고들었고, 괴물에 올라탄 상태로 땅바닥에 쓰러졌다.

“카아아악!”

괴물이 발버둥을 치며 손을 휘저었다. 조끼가 찢겨 나가며 어깨 쪽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밀레나는 고통을 참아내고 신체술을 쥐어 짜냈다. 가슴팍에 꽂아놓은 단검을 뽑아내, 양손에 쥐었다.

괴성을 지르는 괴물의 머리가 바로 앞에 있었다.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는 끔찍한 눈.

온 힘을 다해 괴물의 미간을 단검으로 찍었다.

콰드득,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온다.

하아, 하아, 하아.

꿈틀대던 괴물이 바르르 떨더니 이내 멈춰버렸다. 벌어진 미간 사이로 푸른 핏물이 흘러내렸다.

부풀어 올랐던 괴물의 근육이 서서히 수축하더니, 이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밀레나는 어깨를 감싸 쥐며 일어섰다. 손발이 사정없이 떨렸다.

정말 무모한 전투였다.

체급 차이가 나는데도 근접전을 벌였고, 흉부가 약점이 아닐 수도 있는데 단검으로 노렸다.

인간임을 상정하고 전투를 벌인 것이다.

“…교관님께 혼나겠지.”

실없는 소리가 나왔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니 몸뚱이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비틀거리다가 옆으로 쓰러졌다.

신체술을 오랫동안 사용한 대가가 밀려오고 있었다.

정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

멀거니 하늘을 보고 있는데, 말발굽 소리가 땅을 타고 전해졌다.

조금 떨어진 대로 쪽으로 말을 탄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선두에 있는 건 밀레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특수감찰단 단장 칼리고.

“…이제 해결되겠지.”

8구역 대참사는 곧 처리될 것이다. 영웅이라 불러 마땅한 인물들이 도착했으니까.

밀레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킨 후 골목을 바라봤다.

“엘리, 언니 좀 도와줄래? 혼자서 못 일어날 거 같거든.”

입을 막고 있던 아이가 울먹거리며 뛰어왔다. 이제 끝났다는 생각에 미소가 나온다.

아,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아야지.

밀레나는 저 멀리서 뛰어오는 동기들을 보며 힘겹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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