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뭐, 뭐야? 무슨 일이야?”
휴게실 밖으로 뛰쳐나온 율이 말했다.
“모르겠어. 갑자기 소리가…….”
연구동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대피령이 떨어진 것 같았다.
요란한 종소리와 함께 붉은색으로 마법등이 점멸했다.
“매?”
율이 하늘을 보며 말했다.
“랍파의 매 같아.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어.”
“저 많은 매들이 동시에 떴다는 건…….”
율이 말끝을 흐렸다.
매들의 높고 날카로운 소리가 성도 전체를 꽉 채워 나갔다.
밀레나는 우측에 보이는 시계탑을 바라봤다. 신체술을 사용해 시력을 높이니 시계탑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 보였다.
다른 높은 건물에도 사람들이 올라가 있다.
“랍파들이야.”
시계탑 바로 옆, 봉탑에서 노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 노란 연기. 전시에 준하는 위험이 성도에 닥쳤다는 뜻이다.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거 맞지?”
율도 봉탑을 봤는지 경직된 목소리로 말했다.
“로운 깨워. 밖으로 가야겠어. 무구 챙기고.”
잠에서 깬 로운이 허겁지겁 벨트를 찼다. 밀레나도 두꺼운 조끼와 검, 투척용 단검을 소지한 뒤 건물을 벗어났다.
“어딜 가는 건가!”
도중에 마주친 수석연구원이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밀레나는 봉탑을 가리켰다.
“저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겠죠?”
“알지, 알다마다. 그러니 자네들은 여기에 있어야 하네.”
“도움이 필요할지도 몰라요. 스콜라에는 이미 소집령이 내려졌을 거고요.”
“군이 해결할 일이야. 자네들은 날 따라오게. 자네들 신변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수석연구원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깨달았다.
밀레나를 비롯한 동기들의 소속은 스콜라였으나, 현시점에서 문제가 터지면 책임 소재는 거병관리국에 생긴다.
아스라이 비명이 들려온다. 다수의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밀레나는 수석연구원을 바라봤다.
“이번 일은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위쪽에서 염려하는 일 안 생기도록 조심하고요.”
말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수석연구원이 침음을 흘렸다.
“부디 몸조심하게.”
수석연구원이 몸을 돌렸다.
“가자. 바깥 상황을 살펴야겠어.”
율, 로운과 함께 관리국을 벗어났다. 철책을 넘자마자 보인 건 뿌옇게 솟는 먼지였다.
그리고.
“죽었어.”
로운이 쓰러진 사람을 살피며 말했다. 복부가 갈라져 있었다. 무너진 건물과 깨진 도로를 따라 놓여 있는 시체.
“저기!”
율이 원형 방패를 앞세우며 달려갔다. 네발로 기는 기괴한 생명체가 사람을 공격하는 중이었다.
율이 방패로 공격을 쳐내는 사이, 밀레나는 이동 경로에 단검을 던졌다.
“로운!”
“뒤를 봐줘!”
율과 자리를 바꾸며 로운이 괴물을 향해 달려 나갔다. 왼손에 든 손도끼로 괴물의 어깨를 찍는다.
콰직!
어깻죽지가 한 뼘 정도 잘려 나간 괴물이 뒤로 훌쩍 물러섰다.
“저거…… 그놈 맞지?”
율이 대열을 갖추며 말했다. 밀레나는 자세를 낮추고 으르렁대는 괴물을 바라봤다.
전신에 돋아난 푸른 핏줄. 부풀어 오른 근육. 비죽 솟아오른 어깨뼈와 돌출된 턱.
인간의 모습이 남아 있지만, 저걸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 살인마만큼은 아니야. 우리도 상대할 수 있어.”
밀레나는 검을 움켜쥐었다.
민 교수가 상대했던 살인마, 실더는 스콜라 우등 교관과 산의 전사를 상대로 버티던 괴물이었다.
눈앞에 있는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실더만큼의 능력을 지녔다면, 방금 교전 때 온몸이 찢겨 나갔을 것이다.
“제대로 그었는데 갈비뼈에서 막혔어. 생각보다 단단해.”
로운이 허리춤에서 두 번째 손도끼를 꺼내 들었다. 주변을 살피던 율이 방패를 버리고 나뒹굴던 장창을 잡았다.
“이걸로 견제하는 게 낫겠어. 로운, 파고드는 거 가능해?”
“시선 한 번만 끌어주면.”
밀레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내가 할게. 왼쪽부터.”
“좋아.”
수십, 수백 번 맞춰온 합이었다. 로운과 짝을 이룬 적은 별로 없지만, 동기들 실력이야 엇비슷하니 믿을 수 있다.
로운의 표정이 달라진다. 평소의 유순한 눈빛은 사라지고 냉정함이 깃들었다.
“간다.”
신호를 주고 움직였다.
단도를 던지고 곧바로 돌진!
좌측에 있는 포대를 밟고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경계하던 괴물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숙여!”
완벽한 타이밍에 율이 치고 들어왔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예리한 기운에 지체하지 않고 자세를 낮췄다.
장창이 머리 위쪽을 훑으며 지나갔다.
푹, 창끝이 괴물의 오른쪽 어깨를 꿰뚫는 순간 밀레나는 왼발로 거세게 땅을 찼다.
신체술의 보호를 받는 몸이 튕기듯 앞으로 나아간다.
양손으로 쥔 검으로 괴물의 왼쪽 다리를 그었다.
살점을 파고드는 감각이 검신을 타고 전해졌다. 검을 회수하며 괴물의 옆구리 밑으로 지나갔다.
짧은 순간, 괴물의 눈동자와 눈이 맞았다. 무엇도 읽어낼 수 없는 탁한 눈이었다.
혐오스러운 눈이었다.
“로운!”
목덜미를 낚아채려는 괴물의 손을 피하며 앞으로 굴렀다. 자세를 가다듬는 사이, 로운의 도끼가 괴물의 목을 쳐냈다.
촤아악!
끊어진 목에서 마나 파장과 함께 피가 튀어 올랐다. 곧바로 거리를 벌렸다.
마수의 피에는 독성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좌우로 손을 내저으며 허우적거리던 괴물이 이내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목이 잘리고도 10여 초 동안 움직였다.
징그러운 놈이다.
“피난처로 이동하세요!
경비대의 외침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괴물을 유도하며 시민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저쪽으로 합류하자.”
율이 말했다. 밀레나도 뒤따라갔다.
개별 행동하며 영웅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것 역시 중요했다.
“놈들이 8구역으로 이동한다! 달려드는 놈들만 쳐내고 이동하도록 내버려 둬!”
밀레나는 고개를 쳐들었다.
괴물들이 지붕을 타고 8구역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높은 건물에 올라선 랍파들이 호루라기와 육성을 통해 놈들의 이동 경로를 계속해서 알려주었다.
혼란 속에서도 랍파들의 안내는 정확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멀리 보는 자들.
감탄이 나온다. 고도로 훈련된 병사들처럼 랍파들이 움직였다. 그들만의 체계가 있는 것이다.
“저거 엄청 큰데?”
율이 손가락을 들었다. 시계탑으로 거대한 매가 날갯짓하며 날아가는 게 보였다.
저런 매와 영혼의 짝을 이룬 랍파는 누구일까?
그때였다.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밀레나는 손을 들어 아이의 진로를 막아섰다.
“피난처는 이쪽이 아니야.”
“알아. 난 저놈들을 따라가는 중이거든.”
남자아이가 호기롭게 말했다. 저놈들. 괴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밀레나는 눈을 찌푸렸다.
“장난칠 때 아니야. 얌전히 지시를 따라.”
“장난? 이게 장난으로 보여?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하니까 당장 돌아가. 애처럼 떼쓰지 말고.”
“뭐? 애? 너는 애 아니야? 나랑 비슷해 보이는데.”
입씨름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밀레나는 남자아이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말을 안 들으면 힘으로 제압해 안전한 곳까지 끌고 가리라.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삐이이, 정수리 위쪽에서 뾰족한 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밀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날개를 활짝 편 매가 수직으로 낙하 중이었다. 목표가 무엇인지 고민할 것도 없었다.
뒤로 물러섰다. 허공에 안착한 매가 날개를 크게 휘젓더니, 남자아이의 어깨에 앉았다.
“랍파였어?”
“그래! 언젠가 위대한 랍파가 될 ‘에단’이다!”
혀를 길게 내민 에단이 방해하지 말라며 잽싸게 지붕 위로 올라갔다.
다람쥐 같은 몸놀림이었다. 그리고는 괴물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저렇게 어린 애도 랍파가 되는구나.”
밀레나가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율이 한마디 했다.
“네가 할 소리는 아닐 텐데?”
“내가 뭘?”
율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기, 파난 교관님이야.”
로운이 바라보는 곳에 스콜라 우등 교관, 파난이 보였다. 교관들의 교관으로 유명한 무서운 사람이다.
“가보자. 지시를 받아야 하니까.”
무너진 건물 더미를 지나 교관 쪽으로 걸어갈 때였다. 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엘 언니잖아.”
“아리엘?”
밀레나는 고개를 돌렸다. 병사들을 지휘 중인 여자가 보인다.
“게스할트 장군의…….”
“어, 그분의 딸. 근데 성도에 들어와 있었구나.”
오래전 미엔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티안가는 재건이 불가능해. 게스할트 님 대신 가주가 된 귀부인은 무능력하고, 그 딸은 바깥으로 나돌고 있어. 가문이 휘청거리는 시기에 여행과 사치라니.’
악평뿐이었던 사람.
하지만 먼발치에서 본 아리엘은 병사를 독려하고 군더더기 없는 지휘로 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미엔이 사람을 잘못 본 거 같은데?”
혼잣말을 들었는지 율이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아니야, 아무것도.”
파난 교관과 대화하던 아리엘이 단독 행동을 시작했다. 대열에서 떨어져 어디론가 향했다.
방향을 살피니 8구역 쪽이었다.
괴물들을 따라가는 걸까?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고 생각했지.”
파난 교관이 밀레나를 보자마자 한 말이었다.
“밀레나, 율, 로운.”
“예!”
“상황이 상황인 만큼 거들어야겠다. 곧 졸업생들이 올 거다. 합류해서 주변을 정리해라. 너무 나서지는 말고.”
파난이 묵직한 장창을 어깨에 이며 몸을 돌렸다.
“대열을 유지하며 시민을 보호한다! 후엔, 타스타, 골레어스! 너희는 날 따라와라.”
파난을 비롯한 스콜라의 전사들이 8구역을 향해 움직였다.
“얼마 전 실더도 그렇고, 이 괴물들은 자꾸 어디서 튀어나오는 거야?”
율이 발치에 놓인 괴물의 사체를 보며 말했다. 죽어서 광기를 잃은 괴물은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다.
“이렇게 형태를 남기고 죽는 놈도 있지만, 저렇게 녹아내리는 놈도 있어.”
로운이 코를 가리며 말했다.
상체가 반으로 갈린 괴물이 부글부글 끓더니 죽처럼 변해버렸다. 역한 냄새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전쟁 중에도 성도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고 들었는데.”
율이 다리를 다쳐 절뚝이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밀레나는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다.
참혹하다. 셀 수 없이 많은 시신이 거리에 놓여 있었다. 건물 외벽이 뜯겨 흉물스럽게 변했고, 몇몇 건물은 폭발에 휩쓸린 것처럼 상부가 박살이 나 있었다.
신음 위로 신음이 쌓여간다.
밀레나는 눈을 찌푸리며 8구역으로 뛰어가는 괴물들을 바라봤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멀어져 가는 괴물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였다.
밝은 빛이 저 먼 곳에서 솟아났다.
그리고.
콰아아앙!
몸 전체가 떨리는 진동과 귀를 아리게 하는 소음이 거리를 덮쳤다.
“피해!”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건물이 와르르 무너졌다. 뿌옇게 일어난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곳곳에서 비명이 일어났다.
폭발음이 다시금 공기를 때렸다.
빛무리가 희미해지고, 폭음의 여파가 가라앉은 후에야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난리 났네.”
율이 허탈한 목소리를 냈다.
8구역 쪽에서 산불이 난 것처럼 거대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