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그래도 비일 선배보다는 나은 거야. 어제 들었지? 옆 조정센터에서 비명 나오는 거.”
밀레나는 눈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대체 어떤 강도로 실험을 해야 그런 비명이 나오는 건지. 비일 선배의 건강이 심각하게 걱정될 정도다.
“들었지. 비일 선배, 팔 한짝 정도는 잘리지 않았을까?”
“팔이 잘렸으면 좀 더 얌전하게 소리 질렀겠지. 그러고 보니 민 교수님도 얼굴이 어둡더라.”
“죽을 맛이겠지. 두 분 모두.”
율이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이번 프로젝트가 황제 폐하의 칙명이란 게 사실인가 봐.”
“정치는 사양이야.”
밀레나는 귀를 막으며 앞으로 뛰어갔다. 율이 뒤쫓아 오며 열심히 말했다.
“관리국 3연구소에 황제 측 사람이 왔으니 입김이 닿는 것도 당연하겠지.”
“알고 싶지 않다니까 그러네.”
“네가 아무리 발을 뺀다고 해도 결국에는 마주치게 돼 있잖아. 올해는 ‘실버 룻’도 있어. 밥맛인 애들도 잔뜩 모일 텐데, 그 안에서 입 꾹 닫고 있을 수 있어? 네 성격에?”
실버 룻.
젊은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행사. 3등 귀족 이상만 모이는 자리라 눈치싸움도 대단할 것이다.
“단장님의 조언대로 양쪽에 발을 담가보고 싶긴 한데, 그럴 때마다 속에서 열불이 나. 적당히 좀 하면 안 되나? 너무 유치해. 식상하고.”
“너 정도 되니까 그게 유치하고 식상하게 보이는 거야. 넌 엔첸세니까. 막 3등 귀족으로 올라온 애들한테 그런 말 해봐라. 도끼눈 뜨고 널 째려볼걸? 가진 놈이라 여유 부리는 거라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분명 새겨들어야 할 조언이었다. 그럼에도 반발심부터 생기는 건 성격이 글러 먹은 탓인가?
“내 능력 계발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데, 그런 거 신경 쓰는 게 싫증 날 뿐이야.”
“그 마음은 어느 정도 이해해. 하지만 실버 룻을 기점으로 너도 자리를 제대로 정해야 할 거야. 어른들도 신경 쓰기 시작할 테니까.”
“차라리 엄마 찾아서 여행이나 떠날까. 그게 더 즐거워 보이는데.”
“어머니 계신 곳을 알아?”
“아니. 세상 어딘가에는 계시겠지.”
엄마는 뭘 하고 있을까?
엉뚱한 곳에서 이상한 일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예측 불가한, 한없이 자유로운 사람이니까.
“그래도 실버 룻 때는 돌아오시겠지?”
“아침에 편지를 받았어. 가을쯤에는 성도로 오신다고.”
“실버 룻에 맞춰서 오시겠네. 필렌 님도 자식의 정치 입문은 신경 쓰이시나 봐.”
“그냥 어쩌다가 시기가 맞아서 돌아오시는 거야. 분명해.”
“어떻게 확신해?”
“우리 엄마니까.”
“묘하게 설득력이 있네. 내가 그간 들어온 필렌 님의 일화를 떠올리면 참…….”
말하다 말고 얼굴을 씰룩이는 율이었다. 적당한 단어가 안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 고상한 어휘를 찾느라 고생 중이거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해 먼저 말을 꺼냈다.
“대책 없는 분?”
“무슨 소리야!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필렌 님은 내 우상이니까.”
“정말?”
“정말이야.”
“진실 반, 거짓 반이네.”
“…어머니 만나게 되면 내가 팬이라고 꼭 전해드려.”
멀리 있는 왕성을 바라보며 걷다 보니 어느덧 거병관리국 앞이었다.
싱크탱크가 밀집된 성도 8구역만큼이나 보안이 철저한 곳. 대낮에도 경비병이 철책을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검문대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헤더 트럭 한 대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옆을 지나갔다. 트레일러를 보니 천에 덮인 무엇인가가 실려 있었다.
“왔어?”
개발실 앞에서 로운을 만났다. 성도에 도착하고 약 한 달간은 살이 쪽 빠졌는데, 이제는 적응했는지 다시 포동포동해졌다.
“같은 훈련을 소화해도 얼굴 살이 붙는 건 무슨 재주야?”
“모르겠어. 근데 미엔 못 봤어?”
“민 교수님하고 스콜라에 갔을걸. 브리테랑 이리엘데도 같이.”
“아,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인 후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로운이었다. 2개발실 안으로 들어갔다.
한쪽에서 액상 근육이 수축하며 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밀레나는 오른쪽 팔을 매만졌다. 어제 신경 연결 실험이 떠오른 탓이다.
“저거에 또 연결해야겠지?”
“아마도.”
“액상 근육 버전을 바꾸는 건 좋은데, 그럴 때마다 우리 같은 실험체만 죽어 나가는 거 같아.”
율이 중얼거리자 앞서가던 로운이 고개를 돌렸다.
“실험체가 아니라 연구 보조.”
“그게 그거지.”
“좋게 생각하자. 어쨌든 제국에 도움이 되는 거니까.”
“성실한 귀족 납시셨어.”
개발실 수석연구원이 다가왔다. 연구원에 널버스 볼팅이 들려 있었다.
“준비 끝났으니 바로 시작하지.”
“오자마자 바로요?”
“우리의 시간만큼이나 그대들 시간도 소중하니까. 아끼는 차원에서 미리 준비해뒀네.”
율이 울상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밀레나도 시동 키를 받고 손목에 찼다.
“감각 확장 5단계에서 실험을 이어갈 테니 오늘도 잘 부탁하겠네.”
“예, 기절하지 않도록 최대한 버텨볼게요.”
율이 살아서 보자며 왼쪽으로 걸어갔다. 밀레나도 오른쪽에 설치된 오토마타 앞으로 갔다.
제작 넘버도 모르는 오토마타.
아마 이 실험실에서 수십 년은 고생했으리라.
“오늘은 살살 부탁해.”
오토마타의 외관을 툭툭 친 다음 우측에 마련된 간이 체임버로 들어갔다. 신경망 연결을 제외한 모든 기능이 제거된 체임버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협소한 고문실이다.
연구원들이 들어와 재킷을 입혀줬다. 널버스 볼팅과 함께 연결을 보조하는 장비다. 실전에서는 시동 키만 있으면 기동이 가능하지만, 실험은 보다 세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온갖 장치를 몸에 단다.
목덜미에 차가운 패드가 붙었다. 발목에도 마나 파장이 느껴지는 천이 감겼다.
“탑승자 스트레스 체크 시작합니다.”
지옥문을 여는 마법의 문장이 귀를 파고들었다. 바짝 긴장한 채 대기했다.
오른쪽 다리에 살며시 자극이 왔다. 몸조차 제대로 못 가누는 아기가 힘겹게 손으로 누르는 강도.
간지럽기만 하다. 하지만 안심해서는 안 된다.
이게 시작이니까.
점점 통증이 강해졌다. 압통에서 그치지 않고, 열상과 자상에서나 느낄 법한 통각이 오른쪽 다리를 괴롭혔다.
죽을 맛이지만 참아야 했다.
실전에 들어가면 이보다 더한 격통이 뒤따를 것이다.
물론 감각 확장을 1단계, 최하로 내려버리면 외부 자극 따윈 느낄 수 없다. 대신 기민한 조종 역시 포기해야 한다.
왼쪽에 난 창을 통해 연결된 액상 근육을 살필 수 있었다. 허벅지의 근섬유처럼 팽팽해진 액상 근육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액상 근육이 비틀릴 때마다 오른쪽 허벅지에 가해지는 충격량이 증가했다.
“운동 강도를 높이겠습니다.”
올 것이 왔다.
밀레나는 눈에 힘을 줬다. 자잘한 움직임만 보이던 액상 근육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전력 질주를 마친 허벅지처럼 붉고 두툼하게.
으윽, 입을 비집고 나오는 비명을 안으로 씹어 삼켰다. 허벅지를 쥐어짜고 있었다.
이대로 살점이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의식이 오락가락하고 경련을 제어하기 힘들 정도가 됐다.
거칠어지는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천장에 보이는 홈에 집중했다. 통증을 의식하지 않고 차단하려고 애썼다.
이건 실전이야. 포기하면 죽는 거고. 끝까지 버텨, 버텨, 버텨.
주문처럼 ‘버텨’를 입 안에서 수없이 굴렸다. 밖에서 연구원들이 흥분된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 탁, 하고 몸의 긴장이 풀렸다. 옥죄던 고통도 사라졌다.
맥이 빠지면서 상체가 숙여진다.
이마를 타고 흐른 땀방울이 턱 끝에서 톡 하고 떨어졌다. 밀레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후 앞을 봤다.
수석연구원이 체임버 앞에 서 있었다.
“3차보다 훨씬 낫군. 감응도 좋고 스트레스 징후도 적었네.”
“통증도 익숙해진다고 이제 버틸 만하네요.”
“하하, 고생했네.”
연구원들이 몸에 붙은 장치를 떼어냈다. 후, 하고 길게 숨을 뽑아낸 후 밖으로 나왔다.
가시화 패드 앞에 모여든 연구원들이 바쁘게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물을 마시며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애들은 아직인가?
그때였다. 옆 조정센터에서 우렁찬 비명이 들려왔다. 밀레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조정센터로 갔다.
상체 모듈만 조립해 놓은 거병이 보인다. 체임버 덮개가 열려있는데 그 안에 비일이 타고 있었다.
“사람 죽네!”
선배는 오늘도 악을 쓰며 몸을 비틀고 있었다. 감각 확장 5단계를 전신으로 받아내는 중이리라.
오른쪽 다리만으로도 머리가 핑핑 도는데, 상반신 대부분에 통증이 가해진다니.
나였으면 실험이고 뭐고 기절부터 했을 거야.
“야이, 새끼들아! 차라리 죽여!”
비일이 소리 질렀다.
밀레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연구원들도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자기 할 일에 매진했다.
한참 뒤 응고됐던 액상 근육이 점도를 잃고 물처럼 변했다.
파이프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액상 근육을 바라보다가 체임버 앞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들고 4미터 정도 위에 있는 선배를 바라봤다.
“선배, 살아 계신가요?”
“…묘비명을 생각 중이에요.”
“그렇군요.”
“밀레나. 내가 죽으면 잘 묻어주세요. 햇빛보단 그늘진 곳에.”
농담하는 걸 보면 죽을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피식 웃고 있을 때였다.
“엄살 그만 부리고 다음 준비해.”
밀레나는 뒤를 돌아봤다. 기술공 ‘얀스’가 무뚝뚝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드라이버로 고정한 뒷머리, 살짝 화난 것처럼 미간에 잡혀 있는 세로 선, 검은 멜빵바지와 튼실한 군화.
“안녕하세요.”
밀레나가 먼저 인사했다. 얀스가 아, 하면서 밀레나를 바라본다. 이제야 발견했다는 듯이.
“여기 계셨네요. 저 녀석 때문에 시끄러웠죠?”
“시끄러운 거야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요. 아니, 오히려 시끄러워야 다행이죠. 그래야 선배가 살아 있다는 거니까.”
“쟤는 좀 조용해질 필요가 있어요.”
묵례를 올린 얀스가 사다리를 타고 체임버로 올라갔다. 비일과 무언과 얘기를 주고받는데, 그 모습이 정겨웠다.
“죽겠다.”
율이었다. 반쯤 풀린 눈으로 비척비척 다가와 밀레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좀 쉬자.”
“그래, 쉬어야지.”
흐느적거리는 율을 데리고 휴게실로 갔다. 앉자마자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책상에 엎어진 율은 금세 코를 골았다. 밀레나도 의자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뒤척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맞은편 소파에 로운이 누워 있었다.
기지개를 켜고 차를 내렸다.
오전 자료 정리가 끝나면 다시 실험이 시작되리라.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들고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날씨 좋네.”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파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던 겨울도 이제 보내줄 때가 된 것이다.
차향을 즐기며 하늘에 뜬 구름을 바라볼 때였다.
쿠웅, 불길한 소리가 먼 곳에 들려왔다. 미미하지만 진동도 느껴졌다.
뭐지?
의아해하고 있을 때였다.
다시 한번 쿵!
연이은 폭발음이었다.
사고가 난 건가?
긴장하며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볼 때였다.
“…저건.”
수십 마리의 매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하늘을 점유한 채 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매들.
“랍파의 매들이 왜?”
밀레나는 고개를 쭉 빼고 매들이 날아가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폭발음의 진원지.
8구역이 있는 방향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