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엔엔이 탁자를 톡톡 쳤다.
“시간이 되면 카트시의 본체를 다른 곳으로 옮겨보죠. 당장은 어렵겠지만.”
“다른 곳이요?”
“성도. 모든 물건은 거기로 흘러들어 가니까요.”
가하란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때는 저도 데려가 주세요! 성도에 가보는 게 꿈이거든요.”
“알겠어요. 그때가 오면 같이 가요.”
성도.
두 달 전에 끔찍한 사고가 있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선망의 도시임은 변하지 않았다.
웰턴이 말해준 ‘멜멜 클랜’도 찾아가 보고 싶고, 민 교수와 밀레나도 만나고 싶었다.
성도에만 있다는 거병도 보고 싶고.
“성도도 지금쯤이면 눈이 거의 다 녹았겠죠?”
“그렇겠죠. 3월의 성도는 꽤 따뜻했어요. 6월에 있을 축제 때문에 분주하기도 하고.”
“6월 축제요?”
엔엔이 연한 미소를 지었다. 입가에 털들이 몽글몽글 뭉치는 게 보였다.
“성 안드레 축제. 6월에 제국 성도에서 열리는 축제예요. 가하란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걸요?”
6월 축제는 생소하지만, 안드레 축제는 들어본 기억이 났다.
“성도에서는 매월 행사가 벌어지지만, 대부분은 상위 계층을 중심으로 진행돼요. 하지만 6월 성 안드레 축제만큼은 시민을 위한 시간이죠. 그래서 참여자도 많고 볼거리도 많아요.”
“시민을 위한 축제요?”
“네. 작년에는 황제의 상징인 푸른 사자를 익살스럽게 만들어서 가지고 놀았을 거예요. 중앙 광장에 사자를 세워놓고 거기에 돌을 던지거나, 불만을 적은 종이 뭉치를 던졌죠.”
푸른 사자. 함부로 사용하면 큰일 난다는 문양이었다.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괜찮아요.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황가와 의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요.”
엔엔이 펜을 들었다. 종이에 굼뜨게 생긴 사자와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을 그렸다.
“이런 식으로 노는 거죠. 한 해의 불만과 원망을 모두 쏟아내는 거예요. 마지막에는 조형물을 활활 불태우기도 하고요.”
“우와. 이렇게 큰 걸 태워요?”
그림에 묘사된 사자와 인간을 보며 말했다. 그림이 실제 비율을 반영한 거라면 사자는 5m는 가뿐히 될 것이다.
“얌전히 태우면 다행이죠. 3년 전이었나? 마법사들이 도와서 아예 하늘에서 폭발시켜 버렸어요. 물론 그때는 돼지 인형이었지만. 아무튼 화려한 불꽃이 성도 하늘을 수놓았죠. 그건 꽤 볼만했어요.”
드넓은 밤하늘을 채워가는 찬란한 불꽃들. 상상만으로도 입이 벌어졌다.
“황제 폐하는 이런 걸 다 참아주는 건가요? 이해심이 많나 봐요.”
“그건 좀 복잡하네요. 이해심이라. 성 안드레 축제가 시민을 위한 잔치라고 해도 황가를 풍자하는 건 금지하던 시대가 있었어요. 현 황제는 그런 것조차 없애버렸죠. 시민들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제약을 풀어버린 거예요.”
여기까지만 들으면 여유 넘치는 황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치적인 수단이라는 말도 많았어요.”
엔엔이 그려놓은 사자의 눈을 검게 칠했다.
“황제에 대한 평가는 해마다 바뀌어요. 시민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 현 황제가 정권을 잡았을 때 가장 먼저 시행한 일이에요. 반대도 심했지만 밀어붙였죠. 그래서 각 도시에 학교가 생기고 이동 판사처럼 이동 교사가 생겨 글을 가르치고 있죠.”
가하란은 둔에 있는 학교를 떠올렸다. 일을 시작하는 일곱 살부터 다닐 수 있는 곳이다. 할아버지와 아빠한테 글을 배워 다녀야 할 필요는 못 느꼈지만.
물론 가고 싶다고 해서 다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테리가 말하길 기초 시험을 통과해야 다닐 수 있다고 했다.
“이건 분명 시민을 위한 정책이죠. 신년 연설에서도 시민을 주로 언급했고요. 하지만 뒤로는 권력을 집결시키기 위한 위험한 행동을 수없이 했어요. 이상한 일이죠.”
엔엔이 말을 멈추고 바라봤다.
가하란은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왕은 유능한 신하를 원하지만, 지혜로운 신하는 원치 않는다고.”
“로안, 그 친구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네.”
가하란은 사자 그림에 눈길을 주었다.
“욕심이 커서 더 많은 걸 갖고 싶은 사람이라면 주변이 똑똑해지는 걸 원하지 않을 거예요.”
“정확해요.”
“그런데 황제 폐하는 반대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어요. 왜 그런 걸까요?”
“그건 황제만이 알고 있겠죠. 어쩌면 황제는 제국, 그다음을 보고 있을지도 몰라요.”
“제국 다음이요?”
엔엔이 빙긋 웃었다.
“한번 생각해봐요.”
“어려워요.”
“어려워도 고민해봐요. 그게 재미있는 거니까.”
손끝으로 가하란의 볼을 톡 건드리는 엔엔이었다. 그때 옆에서 얌전히 듣고 있던 카트시가 말을 걸어왔다.
-힌트를 하나 주자면, 연합왕국을 떠올려 봐요. 나타 왕국 때도 그랬지만 거대한 국가는 언젠가 쪼개지기 마련이에요.
힌트를 듣고 머리를 굴려봐도 마땅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았다.
-권력의 이양. 그게 핵심이에요.
“카트시. 그만 말해요. 고민의 즐거움을 뺏는 건 옳지 못해요.”
-그건 동의해요. 엔엔, 처음으로 마음이 맞은 거 같네요?
엔엔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장 풀 수 없는 문제인 것 같으니 기억 구석에 잘 모셔두기로 했다.
가하란은 엔엔이 그린 그림을 손에 들었다.
“나중에 성도에 갈 때 테리 형하고 제니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
“친구들인가요?”
“네.”
“그때가 오면 생각해 볼게요. 근데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어려울 수도 있어요. 카트시는 여전히 숨겨야 할 존재니까.”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6월 축제.
둔 축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겠지?
지금 성도에 있을 밀레나는 6월 축제를 마음껏 즐기리라. 나중에 만나게 된다면 어떤 축제였는지 반드시 물어봐야지.
“아! 엔엔 님. 성도로 편지를 보낼 수 있나요?”
“편지요? 누구한테 보내려고요?”
“민 교수님하고 밀레나 누나한테요. 아, 그리고 율 누나도요.”
“제가 아는 상단이 6월 축제에 맞춰 성도로 출발할 거예요. 거기에 맡기면 4월 말쯤에는 도착하겠죠.”
지금이 3월 6일이니까 약 두 달 뒤에 받을 수 있는 건가?
“받을 때쯤이면 봄이겠네요.”
“그렇겠죠. 지금보다 훨씬 따뜻한 봄이겠죠.”
“아빠한테도 보내고 싶은데 볼로스 어디에 계신지 몰라요. 밀레나 누나는 스콜라에 보내면 받을 텐데.”
가하란은 펜을 들었다.
“근데 스콜라에 마음대로 편지를 보내도 될까요?”
“그건 걱정하지 마요. 부탁해놓을 테니까. 스콜라에 없어도 찾아서 전할 수 있게끔 해놓을 테니 마음껏 써요.”
가하란은 방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적어야 할까?
첫 줄에는 인사가 좋겠지?
안녕이라고 쓰면 좀 이상하려나?
한참 고민하다가 펜을 움직였다.
-누나,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어.
* * *
살며시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어김없이 여섯 시였다. 침대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었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 밖을 보았다. 어스름이 깔린 도로 위로 마차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마법등을 등지고 사라지는 마차를 바라보다가 길게 하품했다. 뜨뜻한 침대로 다시 들어가고 싶지만 아쉽게도 일정이 있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들어와요”라고 말했다.
“오늘 아침은 어제와 달리 꽤 따뜻하네요.”
씻을 물과 수건을 들고 락샤가 들어왔다. 따뜻한 물로 얼굴을 적시고 수건으로 닦아냈다.
“그만 추울 때도 됐으니까요. 락샤, 기침은 좀 어때요? 어제 안 좋아 보이던데.”
“아가씨가 걱정해주신 덕에 이젠 괜찮아요. 환절기에 달고 사는 기침이라 크게 문제 될 것도 없고.”
“그래도 모르니까 의술사 찾아가 봐요. 아니면 예약 잡아줘요?”
“나중에 정말 힘들어지면 그때 말할게요.”
“엄마한테도 매번 그렇게 말하고 한 번도 안 찾아갔다면서요? 몸 관리는 잘해야 해요. 락샤가 아프면 다들 걱정하느라 손에 일이 안 잡힐 테니.”
“설마 그럴까요.”
락샤가 짙은 웃음을 지었다. 오늘따라 락샤의 팔자주름이 더 깊어 보였다.
밀레나는 겉옷을 걸치며 말했다.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요. 락샤는 좀 쉬어도 되니까. 성도에 있는 이 집은 다른 사람이 관리하면 돼요.”
“아쉽게도 전 여기가 편해졌어요. 아가씨도 아시겠지만, 저택에 있는 곳은 놀거리가 별로 없잖아요. 나이를 먹을수록 요란한 게 좋아지더라고요.”
밀레나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긴 해요. 엄마가 외딴곳에 저택을 지어놔서 심심하긴 하죠.”
“블루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좀 과한 느낌이 있어요.”
“엄마는 번잡스러운 거 싫어했으니까요. 그래서 성도에서 최대한 먼 곳에 영토를 받은 걸 테고.”
락샤와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집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식탁에 모여 있었다.
“아가씨, 오셨어요?”
“여기 앉으세요.”
밀레나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얼른 먹어요. 식기 전에.”
식솔뿐만 아니라 일하는 사람까지 한데 모여 아침을 즐기는 건 엄마가 정해놓은 규칙이었다.
어릴 때부터 워낙 당연시하던 일이라, 다른 귀족들이 따로 밥을 먹는 걸 보며 의아했을 정도다.
식사하며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다. 식자재 매입부터 건물 수리까지, 아침을 먹으며 다들 자유롭게 이야기했다.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이 집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아가씨. 새벽에 온 서신입니다.”
아담한 정원을 관리하는 쿤이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받자마자 누가 보낸 건지 알 수 있었다.
편지를 열어 안을 살폈다.
-딸. 엄마는 건강해. 너도 건강 챙기고 있지? 그거면 됐어. 다음에 또 연락할게. 아, 잘하면 가을쯤 성도로 돌아갈 수도 있어. 네가 그때 성도에 있다면 얼굴 한번 보자. 근데 이 편지는 언제쯤 보려나?
마무리 인사는 ‘멋진 엄마가’였다.
“음, 잘 지내고 계시네요.”
“가주님이야 언제나 잘 지내고 계시겠죠.”
다들 껄껄 웃으면서 식사를 이어 나갔다.
밀레나는 편지지를 락샤에게 건넸다. 락샤가 따로 잘 보관해둘 것이다.
“오늘은 늦을 수도 있으니까 괜히 기다리지 마요.”
배웅 나온 락샤에게 말했다. 락샤는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예, 라고 대답했다.
“대답만 그렇게 하지 말고 좀 먼저 자요.”
“예, 아가씨. 그렇게 할게요.”
“…엄마도 못 꺾은 고집을 내가 어떻게 꺾겠어요.”
락샤의 인사를 받으며 거리로 들어섰다. 귀족 거주지를 밝히는 마법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마차를 타고 이동할 수도 있지만, 걷는 게 좋았다.
옆을 지나치던 마차 한 대가 돌연 멈춰 섰다. 안에서 율이 피곤한 표정으로 내렸다.
“피곤한 아침. 절망적인 아침. 자고 싶은 아침.”
“그래. 좋은 아침이야.”
“걷지 말고 같이 타고 가지 그래?”
“너도 그냥 걸어. 신체술 수련할 겸.”
“지독하다, 지독해.”
율이 마차를 보냈다.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했다. 흐릿해지는 그림자를 밟으며 나아갔다.
“어제 실험은 어땠어?”
“인형한테 적용한 수치를 그대로 이어받았는데, 팔이 비틀어지는 줄 알았어.”
율이 왼손을 흔들었다.
“대체 관리국에선 뭘 만드는 걸까? 무슨 거병인지도 모르고 끌려다니니까 영 찝찝해.”
“기능 개발이라고 했잖아. 그 이상을 알아내려면 최고 수준의 보안 등급이 필요한데, 너나 나나 해당 사항은 없지.”
“그래.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스콜라의 명예로운 전통답게.”
율이 투덜거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