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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192화 (165/558)

제192화

형이구나.

반가운 마음에 까치발을 들고 오른쪽에 달린 고리를 잡아당겼다. 엔엔이 만들어준 것으로 당기면 잠금이 풀리고 문이 열린다.

“형!”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외쳤다. 만나고 싶었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소식이 닿지 않았다.

같은 연구단지에 있었을 텐데, 한 번을 마주치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밝게 웃으며 맞아줄 거라 생각했던 형이, 담담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하란이구나.”

한참 늦은 반응이었다.

가하란은 생각했다. 형이 아픈 게 아닐까, 아니면 어제 잠을 못 잔 게 아닐까.

“형,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그보다 공방주님 안에 계셔?”

“엔엔 님? 어, 계셔.”

“그러면 이것 좀 전해줘. 탄드라 교수님께서 보냈다고 하면 아마 아실 거야. 방해하는 거 싫어하시는 분이니까 난 이만 돌아갈게.”

유단이 큼지막한 종이봉투를 건넸다. 가하란은 봉투를 품에 안고 유단을 바라봤다.

“…형.”

“왜?”

“아니, 그냥. 우리 되게 오랜만에 보는 거지, 그렇지?”

“그런가?”

짧고 투박한 대답에 왠지 모르게 움츠러든다. 가하란은 힘내서 미소를 지었다.

“형. 어디에 있어? 나 형하고 놀고 싶은데.”

“미안한데, 놀 시간은 없을 거 같아. 일이 바빠서.”

유단이 회중시계를 꺼냈다. 시간을 살피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할 말 있어?”

“그게…….”

“없으면 다음에 얘기하자. 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서는 유단이었다. 가하란은 부랴부랴 유단을 붙잡았다.

“형! 잠깐만. 내가 만든 빵이 있거든? 맛있는 잼도 있어. 그거 줄게, 잠깐만!”

공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엔엔에게 형이 왔어요, 라고 말한 후 남은 빵과 잼을 챙겼다.

“형?”

서둘러 나왔지만, 공방 앞에 아무도 없었다. 가하란은 두리번거렸다.

형이 숨바꼭질하는 걸까?

찬바람에 손이 시렸다. 빵이 딱딱해지면 맛이 없는데. 빵과 잼을 품에 안은 채 공방 주변을 찾아봤다.

“형! 유단 형?”

그렇게 몇 분을 돌고 나서야 깨달았다. 정말 아무도 없다는 걸.

“가하란. 무슨 일이에요?”

뒤따라 나온 엔엔이 물었다. 가하란은 머뭇거리다가 눈웃음 지었다.

“형이 엄청 바쁜가 봐요. 이거 주려고 했는데…….”

“형? 누굴 말하는 거죠?”

“유단 형이요.”

가하란은 코를 훌쩍인 다음 말했다.

“다음에, 다음에 만나면 줘야겠어요.”

“일단 들어와요. 밖은 너무 추우니까.”

엔엔이 가하란의 등을 살포시 밀었다. 가하란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항상 봐왔던 길이 오늘따라 쓸쓸해 보인다.

* * *

유단은 걸음을 멈추고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몸의 기억이란 건가.”

가하란.

기억 속에서 이 이름을 끌어 올릴 때면 머리가 식고 심장은 두근거렸다. 필요 이상의 흥분과 질시가 몸을 휘감았다.

극단적인 반응이었다. 다스리기 버거울 정도라 급히 자리를 떠났다.

유단은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네가 뭘 원하는지 알아. 하지만 당장 그걸 들어줄 수는 없어.”

달래듯이 말했다.

이 목소리가 ‘유단’에게 닿을지, 아니면 허무하게 흩어질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유단의 의식이 존재하는지, 아니면 헤르모드처럼 망가져 자료 덩어리로 변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인간의 몸은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방대한 자료가 머릿속에 분명 들어 있고, 그걸 불러오는 것도 가능한데 어디에 어떻게 저장돼 있는지 파악할 수가 없다.

기계 안에 있을 때는 이런 불편함이 없었다. 자료에는 정확한 주소가 부여돼 있어 정리와 소거가 매우 간편했다.

의식을 무시하고 불쑥 튀어나오는 기억의 편린들.

제어를 벗어난 기억에 몸이 반응하고, 반응한 몸에 의해 감정이, 의지가 흔들린다.

이런 게 사람이란 건가.

거대한 충동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실수해도 가라앉는다.

그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멍하게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기계에서 벗어난 순간, 시간에 종속돼 버렸다. 시간의 노예가 된 것이다.

육체는 성실하게 늙어가고 약해질 것이다. 이건 항거할 수 없는 법칙이었다.

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으니 내가 먼저 앞서 나가야 했다.

유단은 뒤를 돌아봤다.

엔엔의 공방. 당분간 거리를 둘 것이다. 그곳에 있는 가하란과 마주친다면 몸이 또 발작할 것이다.

다스리고, 또 다스려서 몸의 기억마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 때 가하란을 만나야 한다.

분노가 사라졌다. 잔떨림 역시 멎었다.

유단은 몸을 내려다봤다.

“옛 주인이 그리운 건 알겠지만, 이제는 나와 함께해야지.”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두드린 다음 걸음을 뗐다.

* * *

쓸쓸한 마음을 다잡았다.

유단 형도 사정이 있을 것이다. 웃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놀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나쁘게 생각하면 안 된다.

두 손으로 뺨을 꾹 눌렀다.

다음에 만나면 그때 얘기하면 되니까!

방긋 웃은 후 도안을 붙잡았다. 아빠는 말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한 거라고.

울적할 때일수록 웃어야 한다.

-가하란.

옆으로 다가온 카트시가 말을 걸어왔다.

“왜?”

-그냥 불러봤어요.

가하란은 피식 웃고는 도안에 눈길을 줬다. 마력선의 구조를 살피고 있을 때였다.

“할 말 있는 거지? 그런 거지?”

옆을 보며 말했다. 카트시의 눈이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요. 그런 거 없어요.

“정말?”

-네. 그럼요. 전 거짓말을 모르는 기계니까요.

카트시의 눈동자가 위로 올라간다.

“대놓고 거짓말.”

-티가 나나요?

“엄청.”

두 손을 내밀어 안구를 붙잡았다.

“얼른 말해. 말할 때까지 안 놔줄 거야.”

-…살짝 걱정했어요.

“걱정?”

-아까 가하란의 표정을 봤어요. 줄리어스랑 비슷한 얼굴이었죠. 그, 형이라는 인간 때문에 마음이 상한 건가요?

가하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줄리어스도 그렇게 말하곤 했죠. 그러고 나서 혼자 엄청 투덜댔지만. 가하란, 얘기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줘요. 전 듣는 걸 좋아해요.

가하란은 귀 뒤쪽을 살며시 긁다가 이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형하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그냥 가버렸어.”

-저런. 그래서 그 인간이 미운 건가요?

“아니. 밉지 않아. 그냥…… 아쉬울 뿐이야. 근데 어쩔 수 없어. 형이 바쁘다고 했거든.”

-그렇군요.

카트시의 눈이 좌우로 움직였다. 얼굴 전체를 훑는 눈길이었다. 괜히 부끄러워진다.

-이해했어요. 저는 아직 보안책임자에 대해 모르는 게 많거든요.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닌지.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파악해 놓을게요. 그래야 소통이 원활해질 테니.

“그렇다고 너무 관찰하진 마. 부끄러워.”

-어느 정도 고려해 볼게요. 하지만 관찰을 멈출 순 없어요.

집요하게 다가와 이곳저곳 살피는 카트시였다.

“가하란 그만 놀리고 이리 와요.”

엔엔이 다가와 안구를 툭툭 쳤다.

-뭐죠?

“보안 문제로 상담할 게 있어요. 가하란도 잠깐 와요.”

작업실 중앙에 놓인 테이블로 이동했다. 카트시 본체 옆에서 엔엔이 입을 열었다.

“연결망에 대해 계속 조사해 봤지만 알아낸 게 없어요. 마나의 고유 파장 역시 이렇다 할 정보가 없고요.”

-연결망을 만들어낸 건 줄리어스니까요. 이것의 실체를 파악하려면 어머니의 설명이 필요한데, 지금은 들을 수 없죠. 아니, 듣는다고 해도 아마 이해 못 할 거고요.

엔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지의 통신 회로. 하지만 모른다고 해서 내버려 두는 건 위험해요. 카트시가 그랬죠? 줄리어스가 만든 서른두 대의 유사 정령은 모두 연결망을 사용할 수 있다고.”

-자유롭게 연결하고 끊을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있긴 하죠.

“그게 문제예요. 지난 몇 달간 공방 주변의 마나 파장을 살폈어요. 다행히 외부에서 들어오는 특이한 파장은 없었죠.”

-무얼 걱정하는지 알겠네요. 외부로부터 간섭, 이걸 염려하는군요?

간섭?

가하란은 카트시를 바라봤다. 설명이 필요했다.

-전에도 말했듯이 연결망을 통해 원거리 정보 교환이 가능해요. 엔엔은 지금 ‘교환’의 위험성을 염려하는 거예요. 그렇죠?

“맞아요. 상호 협의하에 교환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강제적으로 정보를 빼내 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우편물을 중간에 탈취하듯이.”

가하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엔엔 님, 그런 게 가능해요?”

“저도 한동안 눈치채지 못했어요.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니까요. 하지만 고유 파장을 이용한다는 것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정된 길을 사용한다고 가정했을 때 그 길을 점유당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가하란은 좁은 길목을 막고 있는 산적을 떠올렸다. 옳지 않은 비유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틀린 표현도 아니리라.

“카트시. 내 말대로 정보가 새어 나가거나 빼앗길 가능성이 있나요?”

-음,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가능성이야 있죠. 연결망은 줄리어스의 작품이에요. 보안책임자가 권한을 쥐고 있고요. 보안책임자가 중간에 간섭해서 정보를 빼 간다면 막기 어려워요.

“보안책임자? 지금은 가하란이잖아요.”

-그게 조금 애매해요. 왜냐하면 가하란은 저만의 보안책임자니까요. 아마 다른 애들은 여전히 줄리어스를 보안책임자로 설정해 놓았을 거예요. 저처럼 살아 있다는 전제하에.

“잠깐만요.”

엔엔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

“보안책임자를 가하란으로 변경한 상태 맞죠?”

-네. 일단은요.

“줄리어스가 죽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변경 가능한 거고요?”

-그건 아니에요. 전 가하란이 마음에 들었기에 제 의지로 바꾼 거예요. 물론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면 의견을 구했겠지만, 지금은 판단의 주체가 저니까요.

“다른 유사 정령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카트시의 안구가 엔엔 쪽으로 틀어졌다.

-우리의 개성이 다르듯 각자의 능력 역시 다르다고 해두죠. 로키가 거짓말을 발견해낸 것처럼 저도 몇 가지 재주가 있어요.

“줄리어스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만들어 냈군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팔짱을 끼는 엔엔이었다.

-엔엔.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겠지만,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가하란이 존재하는 한 이제 줄리어스가 돌아와도 제 안을 들여다보는 건 불가능해요. 물론 정말로 돌아온다면 마음이 흔들리긴 하겠지만.

“난 상관없어. 줄리어스는 카트시의 어머니잖아. 가족한테 돌아가는 건 당연한 거야.”

가하란은 카트시를 보며 말했다.

-역시 가하란은 친절해요. 그래서 좋아하는 거고요.

곁으로 다가온 안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가족. 그 말을 들으니까 그 아이들을 만나고 싶네요. 살아 있다면 언젠가 연결망에서 마주칠 수 있겠죠.

“너무 멀면 연결이 안 된다고 했지? 둔이 아니라 먼 곳에 있는 게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죠. 나타 왕국 시절 줄리어스의 연구실이 있던 곳은 여기가 아니었어요. 근데 전 이곳에 묻혀 있었죠. 다른 애들도 엉뚱한 곳에 있을지도 몰라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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