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91화 (164/558)

제191화

“예지 능력이란 게 만능은 아니잖아요. 일시적인 이상 현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아요?”

추상적이어도 정도가 있지, 도려낸 것처럼 미래가 안 보인다니?

브라인은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했다. 아니, 치부해야만 했다.

어둠에 잠긴 미래.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면 무엇을 논의하든 무의미해질 테니까.

“저도 그렇게 믿고 싶어요. 믿음. 브라인 님은 이 말의 위험성을 알고 계시죠?”

“알죠, 너무나도 잘 알죠.”

브라인은 식은 차를 마셨다.

더럽게 쓰다. 저급한 맛이 난다. 원래 이랬나? 아니면 내 입맛이 맛이 간 걸까.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거죠? 전조는요?”

“인간족의 시간법으로 따지면 1년은 넘은 것 같아요. 전조는 없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미래가 안 보이기 시작했어요.”

“관측되어야 할 미래가 안 보인다는 건, 소실을 의미하는 건가요?”

“그것도 알 수 없어요. 시간에 어떤 문제가 생기는 건지, 아니면 세상이 한순간에 멸망하는 건지.”

“제국 내에서만 발생하는 문제 아닐까요? 제국만 멸망하는 걸지도 몰라요.”

“멸망 이후의 사건도 보인다는 것쯤은 알고 계실 텐데요.”

브라인은 인상을 쓰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연합왕국 쪽도 다녀왔나 보네요.”

“네. 기이한 현상을 감지한 후부터 이곳저곳 돌아다녔어요. 친분이 있는 자들의 미래부터 하나하나 살펴봤죠. 하지만 모두 같았어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모든 게 사라져요.”

“날 찾아온 이유는…….”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바라라의 딸들은 살아남을 테니까요. 브라인 님을 통해 관측 가능한 미래를 발견하면 걱정을 덜었을 텐데, 아니었어요.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다시 한번 해봐요.”

주술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붙잡고 정신을 집중하던 주술사가 가느다란 호흡을 내쉬었다.

“뭔가 보이나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아무것도. 어둠만이 저 너머에 있어요. 아니, 어둠이라 표현하는 것도 제 언어의 한계 때문이에요. 그건……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정말 처음 맞이하는 현상이에요.”

브라인은 책상에 굴러다니는 펜을 보았다.

“기록해야 할 모든 게 사라진다라.”

“관측 가능한 미래를 토대로 예측해본바, 1년 안에 일이 터질 거예요. 내년 봄, 어쩌면 올해 겨울 막바지쯤에.”

“낮잠 한 번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끝나 있을 수도 있겠네요.”

씨족, 도시, 국가, 문화권.

종의 군집체가 사라지고 재구성되는 걸 수없이 관찰하고 기록해왔다.

사멸과 탄생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응당 일어나야 할 순리였다.

하지만 영원한 어둠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이 목숨도 분해돼 땅으로, 흙으로, 바라라의 품으로 돌아갈 거라고 예상했지 불꽃을 꺼트리듯 사라지리라고는 예측 못 했다.

“당신은 뭘 할 생각이죠?”

“저도 세상을 반쯤 등지고 살고 있지만, 바라라의 딸들만큼은 아니에요. 살릴 수 있다면 살리고, 바꿀 수 있다면 바꾸자는 게 제 나름의 방식이죠. 하지만 이번 일은 손쓸 수가 없어요.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파악 못 했으니까요.”

브라인은 빗으로 머리를 긁었다. 이상하게 간지러웠다.

“인간족 수장들에게 협조를 구했나요?”

“아직은 말 안 했어요. 확신이 없었으니까요.”

“이젠 그 확신이란 게 생겼군요.”

주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라의 딸조차 미래가 사라졌어요. 지상의 모든 종에게 위험이 닥친다는 뜻이겠죠. 이건 이권 다툼이 아니에요. 모두의 생존이 걸려 있는 문제죠. 그러니 할 수 있는 것들은 해보려고요.”

“나를 찾아왔으니 그다음은 어디로 갈 거죠?”

“아실 텐데요.”

브라인은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비틀었다.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왕성을 떠올리며.

“황제에게 가겠군요.”

“마침 성도를 찾을 때가 됐어요. 아르드헨, 그 아이를 만나 봐야겠어요. 만약 대비할 수 있는 문제라면 대비해야죠. 전, 식도락을 끝내고 싶지 않거든요.”

주술사가 연한 미소를 지었다.

“브라인 님. 손을 빌려 주시겠어요?”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댔다.

도려낸 것처럼 사라진 미래.

바라던 결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기록자예요. 세상이 사라진다면 사라지는 그 마지막 풍경을 적겠어요. 읽어줄 다음 세대가 없다는 건 조금 슬프지만.”

“기록된 역사가 읽히지 못한다면, 그건 사료로서 가치를 잃어버리는 거잖아요.”

“당신은 인간족에게 너무 물들었네요. 그 가치관으로 날 설득할 순 없어요. 기록은 기록된 그 자체로도 기능을 다하는 거예요. 읽히지 못해 아쉬운 건 어디까지나 내 감상일 뿐이죠.”

주술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땐 모른 척하고 넘어와 주시는 거예요. 연극 안 보셨어요? 보통은 다들 그래요.”

“미안하지만 나는 바라라의 딸이에요. 사건의 지평선을 목도할 수 있다면 난 그걸로 만족할래요.”

“못됐네요, 정말. 요정의 안뜰이 사라져도 괜찮겠어요?”

그건 좀 많이 아쉽고 안타까운 일인데. 잠깐 결심이 흔들렸지만 브라인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난 하던 일을 마저 할게요. 그게 내 업보니까.”

맑은 눈동자로 바라보던 주술사가 느리게 후드를 눌러썼다. 풀어졌던 붕대가 다시 얼굴을 감았다.

“억지 부려서 미안해요. 혹시나 해서 말해본 거예요.”

“내가 거절할 걸 알고 있었죠?”

“미래를 보긴 봤죠. 하지만 미래는 언제나 변하는 법이에요. 강한 의지로 운명을 비트는 자들을 저는 몇 번이고 봐왔으니까요.”

“이번 일도 그런 자들이 해결해 줄까요?”

“모르겠어요. 국가를 넘어선 범세계적 문제로 번진다면, 우리는 그저 다가올 종말을 기다려야겠죠.”

브라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래가 어둠에 가려진 것처럼 안 보인다고 했죠?”

“네, 그래요.”

“멸망의 순간은요?”

“안 보여요. 사실 지금 상태로는 멸망인지, 아니면 다른 현상인지도 알 수 없어요. 모든 장소, 모든 시간에 존재하는 영혼조차 이 사태를 알지 못해요.”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땅 위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세계까지 휘말려 있는 문제. 기록해야 할 게 많아지겠네요.”

“기록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 그게 가능하다면 적어도 생존자가 있다는 거니까.”

주술사가 몸을 돌렸다.

어둠 저편까지 활짝 펴 있던 꽃들이 낙화를 시작했다.

하늘하늘 떨어지다가 땅에 닿기 전에 바스러지는 꽃잎이 곧 다가올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당신 얘기를 들려줘요. 당신 이름으로 만들어놓은 파일 안이 텅텅 비었어요. 기록할 게 필요해요.”

“다음에 만나게 되면 그땐 제 재미없는 옛날얘기를 들려드리죠. 그때가 온다면.”

주술사가 문밖으로 사라졌다.

코를 아리게 만들던 향기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

브라인은 주술사가 앉아 있던 의자를 바라보았다.

미래가 사라졌다. 그게 자연재해 때문인지, 신의 진노가 문제인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원인인지조차 알 수 없다.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회백색 캐비닛이 눈앞으로 왔다. 열 일이 없는, 열 일이 없어야 하는 캐비닛.

두 번째 칸을 열어 파일을 꺼냈다. 제국의 굵직한 사건을 적어놓은 파일이다.

브라인은 펜을 들고 마지막 장을 들췄다.

“마지막 기록일 수도 있나.”

펜촉을 잉크로 살짝 적시고 종이에 댔다.

* * *

“잘 먹었어요.”

엔엔이 손에 묻은 빵부스러기를 혀로 살짝 핥았다.

-항상 생각해요. 이건 정말 불공평한 일이라고. 어째서 전 맛을 볼 수가 없는 거죠? 이건 명백한 차별이에요.

카트시가 안구를 움직이며 말했다.

“불가능한 걸 차별이라 분류하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

엔엔이 잼이 든 병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누가 봐도 놀리는 거였다.

가하란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바구니를 정리했다. 빵 모양이 엉성해 내심 걱정했지만 다들 호평해줬다.

다음에는 뭘 만들까, 라는 생각과 동시에 아빠한테도 만들어 주고 싶다는 마음이 샘솟았다.

-엔엔은 조만간 털이 다 빠질 거예요. 성질이 못된 칼랑족은 털이 왕창 빠진다는 속설이 있어요.

“카트시. 미안하지만 이 털은 그리 쉽게 빠지지 않아요. 잘못된 정보 같으니까 얼른 수정해요.”

-두고 보면 알겠죠.

오늘도 티격태격. 3개월이란 시간 동안 둘 사이가 가까워졌다.

가끔 진심을 다해 말싸움을 벌이기도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그마저도 친해 보인다.

-가하란. 왜 그런 눈으로 보죠?

카트시의 눈이 이쪽을 향했다.

“좋아서.”

-뭐가 좋아요?

“친하게 지내는 거.”

-친하게? 제가요? 이 엔엔하고요? 설마요. 그럴 리가요. 명백한 오류예요. 정정을 요구하겠어요.

안구가 불쑥 다가왔다. 가하란은 옅게 웃으며 다가온 눈을 손으로 밀어냈다.

“가하란. 나는 카트시랑 친한 게 아니에요. 그냥 어쩔 수 없이 말 상대가 돼주는 것뿐이죠.”

가하란은 엔엔을 바라봤다.

“안소니 아저씨도 매일 옆 가게 아저씨랑 싸우듯이 말하는데, 두 사람은 가장 친한 친구예요. 엔엔 님하고 카트시, 둘 다 친한 거 맞아요.”

서로를 응시하던 엔엔과 카트시가 동시에 코웃음을 쳤다.

맞는데 왜 아니라고 할까.

가하란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작업실 한쪽에 마련된 책상으로 걸어갔다.

엔엔이 두 달 전에 만들어준 자리였다.

공방 안의 작은 공방.

모노클을 오른쪽 눈에 얹었다. 모노클을 사용하면 선의 세계를 들여다봐도 눈이 덜 아팠다.

-오늘도 살피는 건가요?

카트시의 안구가 옆에서 불쑥 솟아났다. 공방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도록 연장한 덕이다.

“응.”

-이해되나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래도 보는 것 자체가 재미있어.”

여덟 장의 도안.

카트시는 이게 ‘마나포집’의 모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카트시는 이런 걸 어떻게 생각해낸 거야?”

-저 혼자 연구한 건 아니에요. 공동의 성과죠. 물론 제안한 건 저였지만.

엔엔도 곁으로 다가왔다.

“시그니처로 마력선을 옮겨서 도안으로 만들었지만, 구조의 의미를 파악하기 전까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이다음부터는 가하란의 도움이 필요해요. 제가 볼 수 없는 것들을 가하란은 보니까요.”

엔엔이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자리로 돌아갔다. 가하란은 마력선 도안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줄리어스는 말했다.

점 하나에 도서관에 존재하는 모든 책의 정보를 담아냈다고.

오밀조밀 짜인 선 안에는 상식을 뛰어넘는 이야기가 스며 있을 것이다.

-마력선 짜맞춤을 근간으로 해서 만들어낸 거라, 저도 설명해줄 수가 없어요. 가하란이 짜맞춤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이것 역시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예요.

“줄리어스는 정말 대단해. 어떻게 그런 걸 만들어 냈을까?”

-어머니는 정말 대단했죠. 하지만 가하란도 어머니 못지않은 눈을 가지고 있어요. 보조 장치 없이 저와 대화할 수 있었던 그 힘. 그건 이해를 뛰어넘는 신비로운 힘이에요.

카트시의 격려를 들으며 도안을 뒤적거릴 때였다.

딸랑, 종소리가 들려왔다. 공방에 손님이 왔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가하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잰걸음으로 작업실을 벗어났다. 잡동사니가 잔뜩 쌓인 창고 벽면을 따라 움직여 문 앞으로 갔다.

“누구시죠?”

엔엔이 알려준 대로 일단 상대방 이름을 물었다.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단입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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