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어디서 나는 향기지?
코가 이상해진 건 아니었다.
분명 향긋한 꽃냄새였다.
셀베이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대령님이 마시는 차에서 나는 건가?
의아해하며 멀리서 걸어오는 손님을 바라봤다. 브라인의 허락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
보통 손님은 아니었다.
“차라도 준비할까요?”
조용히 질문했다. 브라인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친구라.”
“대령님의 컬렉션이면 괜찮지 않나요? 항상 아껴 드시는 그거요.”
“그거로도 모자라.”
셀베이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브라인의 차 컬렉션은 귀중품에 가까웠다. 손바닥 위에 올라가는 소량의 찻잎이 금화 단위에서 거래되는 정도?
그런 고가품으로도 부족하다니.
“너는 저 친구를 처음 보겠네.”
“네. 처음 뵙는 분이네요.”
눈을 갸름하게 떴다.
문을 허락 없이 열었다고 한들 접근하려면 대령의 허락이 필요했다.
“안 데려오실 건가요?”
“자기가 오고 싶으면 오겠지.”
“그게 가능할 리가…….”
말 도중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풍경이 바뀌었다. 어두침침한 브라인의 심상세계가 꽃으로 가득 찼다.
만개한 꽃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캐비닛에도 꽃이 피어났다. 꽃을 단 캐비닛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걸 지켜보다가 손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님이 한 걸음 뗄 때마다 주변에 다양한 꽃이 피어났다. 세상을 꽃으로 물들이는 사람이었다.
“변함없네.”
브라인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셀베이아는 허리를 숙여 발치에 핀 꽃을 하나 꺾었다.
“대령님. 진짜 꽃이에요.”
“진짜? 뭐, 진짜라면 진짜겠지. 초월적인 실재도 진짜 취급해 준다면 말이야.”
손아귀에 들어온 꽃이 가루로 변해 흩어졌다. 그사이 손님이 곁으로 다가왔다.
허락 없이 대령의 사적 공간을 침범한 것이다.
날고 긴다는 마법사들도 할 수 없는 행위였다.
누구일까?
“오랜만……이라는 인사는 물리겠죠?”
후드를 벗으며 말하는 여자였다.
셀베이아는 살짝 놀랐지만 얼굴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여자는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붕대 사이로 드러난 눈과 살짝 보이는 코, 입술은 인간과 흡사했으나 왠지 모르게 달라 보였다.
여자가 미소 지으며 눈인사를 보내왔다. 시선이 맞았다. 셀베이아는 아, 하고 탄성을 냈다.
아름다운 초록빛이었다. 사람의 눈이 저렇게 깊고 명료한 초록색을 띨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 인간이 아닌 건가?
“전에 봤던 그분은 영혼세계에 들어가셨나 보네요.”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인간은 우리만큼 오래 살지 못해요. 잠깐 머물렀다가 떠나는, 매정한 자들이죠.”
여자와 브라인의 대화를 들으며 ‘전에 봤던 그분’이 누구인지 알게 됐다.
내가 접수원을 맡기 전에 대령님 곁을 지키던 사람이겠지, 셀베이아는 속으로 생각하며 여자를 살폈다.
일단 인간이 아니라는 건 확실해졌다. 대령님만큼이나 오래 살아온 자.
누구일까. 고민하던 찰나 오래된 자료에서 본 글귀가 떠올랐다.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초록색 눈을 가진 오크족 주술사.
설마 이분이?
“내가 누군지 알아챘나 보네요.”
“오크족 주술사, 맞으신가요?”
“인간족은 보통 그렇게 부르죠. 반가워요. 바라라의 딸 곁을 지키느라 고생이 많네요.”
왼손을 내밀며 말하는 주술사였다. 셀베이아는 물끄러미 그 손을 보았다.
왼손? 무슨 의미지?
“아. 오른손이었죠. 악수로 인사할 때 종종 헷갈려요. 시대마다 좀 다르기도 하고.”
다시 오른손을 내미는 주술사였다. 셀베이아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손을 잡았다.
“예언을 바라나요?”
예언.
감미로운 단어였다. 오크족 주술사의 예언은 반드시 실현된다고 할 정도로 정확도가 높다고 들었다.
셀베이아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재미 삼아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요.”
“아니요! 전 정말 괜찮아요. 정말로.”
주술사가 싱긋 웃었다.
“좋은 자세예요. 예언 따윈 정말 쓸모없는 거거든요.”
양손을 앞으로 모으며 가만히 기다리는 주술사였다.
아참!
셀베이아는 정신을 차리고 의자를 가져왔다.
“고마워요. 여기 있는 물건을 내가 멋대로 만지면 바라라의 딸께서 싫어하시거든요.”
“대령님이 좀 예민하시긴 하죠.”
그 말에 주술사가 눈웃음 짓는다.
“셀베이아 씨는 나와 잘 맞는 것 같네요.”
“그런가요?”
대꾸하고 나서 알아챘다.
이름을 말한 적이 없는데, 주술사가 알고 있었다. 이것도 예지력의 일종인가?
“브라인 님. 저 마실 것 좀 주시겠어요?”
“근 100년 만에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차 달라는 건가요?”
“네. 안 되나요?”
대령이 주술사를 째려봤다. 셀베이아는 가운데 서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둘을 살폈다.
사이가 안 좋은 걸까? 싸움이 나면 어쩌지? 만약 다투게 된다면 난 뭘 해야 하지?
캐비닛과 거대해진 꽃들이 한바탕 난리를 치는 기괴한 상상을 할 때였다.
대령이 푸하, 웃으면서 이쪽을 바라본다.
“차 좀 부탁할게.”
“…안 싸우시는 거죠?”
“왜? 싸웠으면 해?”
“아니요!”
셀베이아는 차 세트가 담긴 캐비닛을 불렀다. 차를 준비하며 계속 뒤를 돌아봤다.
안부라도 물을 줄 알았는데, 둘 다 침묵하고 있었다. 주술사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브라인을 보고 있었고, 대령은 딴 곳을 보며 빗을 매만졌다.
“여기요.”
찻잔을 내려놓고 물러섰다.
“말씀 나누세요.”
“옆에 있어도 되는데.”
주술사가 찻잔을 들며 말했다.
“아니에요. 전 나가 볼게요.”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눌지,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뒷감당할 자신이 없어 피하기로 했다.
세상에는 몰라야 편히 잘 수 있는 것들이 많으니까.
기록보관서를 나온 다음 문을 닫았다. 진하게 풍겨오던 꽃향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혹시나 해서 옷소매에 코를 댔다.
꽃냄새가 전혀 배어 있지 않았다. 만개한 꽃들이 꿈처럼 느껴진다.
“오크족 주술사.”
신비로운 눈을 떠올리며 낮게 되뇌었다. 상념에 붙들린 것도 잠시, 셀베이아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저쪽 일은 저쪽 일.
신경 쓰지 말고 눈앞에 닥친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죄송합니다만, 오늘 예약 건은 모두 취소입니다.”
미안함을 담아 미소를 지었다.
손님들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항의해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기록보관서의 주인이 문을 걸어 잠갔는데.
“불만 사항이 있으시다면 모두 남겨주세요. 아, 직책과 성명도 같이요. 제가 책임지고 특무대령님께 전할게요.”
성질을 내던 군인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다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오세요.”
셀베이아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 *
“떫은맛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그 입에 맞는 차를 찾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그냥 즐겨요.”
브라인은 차를 홀짝인 다음 주술사를 바라봤다.
우연히 마주친 것도 아니고, 이렇게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다.
“요즘 그거 알아요? 알파치란 이름이 여기저기 쓰이고 있다는 거. 당신 행세를 하며 미식가인 척하는 인간이 꽤 많아요.”
“어쩔 수 없죠. 브랜드처럼 변해버린 이름이니까요.”
“자비로우셔라.”
브라인은 주술사의 초록색 눈을 들여다보았다.
“당신이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저도 브라인 님을 찾아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 완벽한 예지안으로도 못 본 거예요?”
“본다고 다 보이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저에 관한 건 되도록 안 보기도 하고.”
주술사가 붕대에 손을 댔다.
“여긴 브라인 님뿐이죠?”
“네.”
“그럼 이걸 풀어도 괜찮겠네요?”
“답답하실 텐데 푸시죠.”
고마워요, 주술사가 대답하며 붕대를 쓸어올렸다. 마나 파장이 희미하게 풍겨온다. 얼굴을 감싼 붕대가 스르륵 말리더니 후드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밀조밀한 눈코입.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생김새다. 솔직히 인간족 사이에 던져놓으면 누가 오크족이고 누가 인간족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생김새로만 구별했을 때지만.
“그 저주는 여전해요?”
브라인은 주술사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네. 여전하죠. 그게 우리가 짊어진 업보니까요.”
“인간의 미적 기준으로 봤을 때 그냥 예쁘장한 얼굴인데, 대체 무엇이 인간을 미치게 만드는 걸까요?”
“저도 그건 모르겠어요. 선대께 이 힘을 이어받았을 때 경고받았을 뿐.”
붕대로 얼굴을 감고 다니는 오크족 주술사.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기에 인간들 사이에서는 별별 소문이 다 돌고 있었다.
나라를 휘청이게 할 미모다, 보면 며칠은 공포에 떨게 될 흉상이다, 눈만 둥둥 떠 있는 괴상한 모습일 거다 등등.
소문은 모두 틀렸다.
생김새에 문제는 없었다.
단지, 인간족이 저 얼굴을 보면 얼이 빠진다는 게 문제지.
“나중에 심심해지면 제국 황제를 미치게 해봐요.”
“업을 더 쌓으라고요? 그러긴 싫어요.”
빙긋 미소 짓던 주술사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입에 맺혀 있던 웃음은 차 마시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브라인도 장난기를 날려 보내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내가 그렇게 찾아다닐 때는 안 보이다가, 이렇게 나타난 이유가 있을 텐데요.”
“우선 브라인 님을 피해 다닌 건 아니에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
“그 말에 더 상처받게 되네요.”
“상처받으실 분이 아니실 텐데.”
“……그렇다 치고, 왜 온 거죠?”
주술사가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브라인은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잡아 주시겠어요?”
“꺼림칙한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의수에서 손을 빼냈다. 뭉툭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언젠가 한번 이 손을 잡아보고 싶었어요. 생각보다 푹신푹신하네요.”
“남의 손 감평하려고 여기까지 왔어요?”
주술사가 고개를 젓더니, 살며시 눈을 감았다.
꽃향기가 더욱 진해졌다. 심상세계를 뒤흔드는 파장이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미래를 읽고 있는 것이다.
눈을 뜬 주술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니,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참담했다.
“내가 곧 죽기라도 하나요?”
“아니요. 바라라의 딸인 당신의 죽음이 보였다면 분명 놀랐겠지만, 이렇게 절망적이진 않았겠죠.”
절망적.
주술사 입에서 튀어나온 부정적인 단어. 최근 벌어진 일들은 역시 징조였던 걸까?
“검은 장막에 모든 게 가려졌어요.”
“그게 무슨 뜻이죠?”
주술사가 손을 놓으며 말했다.
“어두워요. 미래가, 보이지 않아요.”
“내 미래가 그렇게 어두워요? 말년에 뭐 큰 문제라도 터지나.”
애써 농담을 섞어 말했다.
주술사가 두 손을 차분히 책상 위에 올렸다.
“제 눈은 먼 곳을 보죠. 어떤 인물의 마지막을 보기도 하고, 천년 나무가 겪을 풍파도 넌지시 알게 되죠. 미래는 무한해서 볼 때마다 보이는 게 달라지긴 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에요.”
“안 보인다는 의미는…….”
“은유 같은 게 아니에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모두의 미래가 보이지 않아요. 마치 누군가 도려낸 것처럼.”
브라인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주술사를 바라보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