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89화 (162/558)

제189화

“3월엔 잘 익은 토끼 고기지.”

차를 즐기던 브라인이 한마디 했다.

“그 말, 윤리적으로 괜찮은 거예요?”

셀베이아는 캐비닛 정리를 잠시 멈춘 채 브라인을 바라봤다.

“뭐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는 브라인이었다. 셀베이아는 트집을 잡으려다가 그만뒀다.

말하느니 앓고 말지.

“꼬마는?”

“엔엔 님 공방에 있겠죠?”

“석 달째 출근 도장을 찍네. 둘이서 뭔가 꾸미고 있는 게 확실한데.”

“뭘 꾸미겠어요. 이상한 의심 그만하시고 이거나 보세요.”

셀베이아는 종류별로 모은 신문을 브라인 앞에 내려두었다.

“눈발이 그치니 신문이 오는군. 좋은 일이야.”

“근데 전면 기사는 다 비슷해요. 그 사건을 다루고 있어요. 두 달 전 일인데.”

“성도에서 살인귀가 난리를 쳤잖아? 몇 달 동안 계속 우려먹어도 식상하지 않을 거야.”

살인귀.

셀베이아는 신문에 묘사된 1월 성도의 참혹한 현장을 떠올렸다.

문장일 뿐이었으나, 어찌나 세세히 적어놨는지 당시의 풍경과 냄새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눈을 찌푸린 채 말했다.

“뭐였을까요? 실더란 인간은 왜 그렇게 된 걸까요?”

“나도 궁금해. 성도에 있는 머나먼 이웃사촌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움직이는 게 귀찮아. 나중에 정기 교류 때 들어봐야지.”

“겨울에는 정말 꼼짝도 안 하시네요.”

“새삼스럽게 뭘. 원래 토끼들은 그래.”

셀베이아는 눈 사이를 좁히며 브라인을 봤다.

“근데도 토끼 고기를 드시겠다고요?”

“농담이야, 농담. 그리고 내 외형이 그 귀여운 동물과 닮았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걸 나와 동일시하면 곤란해.”

“알아요. 그래도 선입견이란 게 있어서.”

“너희도 한때는 식인 문화가 있었어.”

셀베이아는 얼른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그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가하란한테도 절대 하지 마세요.”

“걔가 이런 거에 충격을 받겠어? 오히려 더 좋아할걸.”

“애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직 어려요.”

쿵, 캐비닛 문을 닫았다.

자료가 쌓이기만 하는 공간이라 매일 정리해도 끝이 없다. 원흉인 대령은 자료만 계속 들여놓을 뿐 정리할 마음이 없어 보이니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여기도 언젠가는 가득 찰 날이 오겠죠?”

셀베이아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캐비닛을 보며 말했다.

“마음의 한계라. 언젠가는 가득 찰 날이 오겠지만, 그 전에 내가 죽지 않을까?”

“대령님도 죽음을 생각하시나요?”

“살아 있는 지성체는 모두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나? 그렇기에 신을 믿는 거고.”

“위험한 얘기가 될 것 같으니까 여기서 끝낼게요.”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일어설 때였다. 기록보관서 문이 열렸다.

허락 없이 저 문을 열 수 있는 건 단 두 명뿐이다.

저 멀리 가하란이 보인다. 손에는 커다란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브라인이 힐긋 보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거리가 좁혀지며 순식간에 가하란이 앞으로 왔다.

“먹을 거네?”

브라인이 바구니를 보며 말했다. 셀베이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만 그 편한 능력을 쓰지 말고, 다른 손님들한테도 제공해줘요. 요즘 들어 불만 사항이 늘어났어요.”

“아쉬운 놈들이 수고하는 거지. 애초에 난 정보를 제공할 의무 따윈 없어. 그냥 제국이 편의를 봐주니까 도의적인 차원에서 협약을 맺은 거지. 수틀리면 그냥 문 닫고 저 벌판에 집 하나 지어서 살면 돼.”

셀베이아는 살짝 비웃음을 지었다.

“따뜻한 온수 목욕을 포기할 수 있다고요?”

“……어.”

“안락한 시내 환경을 버릴 수 있다고요?”

“……아마도?”

“요정의 안뜰에서 오는 디저트는요?”

브라인이 코를 씰룩였다.

“그건 포기 못 하지. 밀리언이 살아 있는 한 얌전히 있어야겠네.”

대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하란에게 다가갔다.

“뭐냐?”

가하란이 바구니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밀리언 아저씨랑 빵을 만들어 봤어요.”

“공방으로 간 거 아니었어?”

“네. 오늘은 안뜰부터 갔어요.”

바구니 뚜껑이 열렸다.

셀베이아도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작은 병에 담긴 잼과 엉성한 모양의 빵이 보였다. 노란 소스가 올라간 샐러드도 구석에 있었다.

브라인이 빵을 쥐었다.

“이런 걸 돈 받고 팔면 가게가 망하겠지?”

“먹기 싫으면 저 주세요.”

셀베이아가 손을 뻗었다. 검은 의수에 꽂힌 빵을 빼앗으려 했지만, 브라인이 코웃음 치며 피했다.

“누가 먹기 싫다고 했나.”

가하란이 잼을 꺼냈다.

“겨울에 자라는 딸기로 만든 잼이에요. 신기하죠? 겨울에도 딸기가 자라고.”

“귀한 품종이지. 맛도 좋고.”

가하란이 빵에 잼을 발라 셀베이아에게 주었다.

“모양은 이래도 맛있어요. 룽네 아줌마도 칭찬해 줬거든요.”

“그래?”

털털한 웃음 짓는 룽네를 떠올리며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새콤한 맛이 먼저 치고 올라오고, 그 뒤에 빵의 고소한 풍미가 따라왔다.

빵 겉면의 식감은 좋았다. 폭신폭신. 하지만 안쪽은 약간 덜 익은 감이 있었다.

“덜 익었네.”

브라인이 말을 툭 내뱉었다. 셀베이아는 곁눈질을 주었다.

“발전을 바란다면 덮어두고 칭찬하는 건 옳지 않아. 꼬마도 그걸 원할 테고.”

“좋은 말도 해줄 수 있잖아요. 꼬여도 너무 꼬이셨어.”

“원래 부정적인 말을 앞에 깔아두고 마무리를 긍정적으로 끝맺음 하는 게 언어의 기술이야.”

브라인이 빙긋 웃으며 가하란을 바라봤다.

“덜 익었다, 꼬마야.”

으휴, 저 못된 심보.

결국 칭찬 한마디 없이 빵만 야금야금 먹는 브라인이었다. 셀베이아는 가하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다음에는 대령님 건 준비하지 마.”

“아니에요. 말씀은 저렇게 하셔도 계속 드시잖아요. 대령님은 맛없으면 아예 입도 안 대시는데.”

가하란이 작게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영양분을 채워야 하는 밥은 조금 엉성해도 군말 없이 잘 먹지만, 간식만큼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깐깐한 게 대령이었다.

툴툴거리면서도 바구니에 든 빵을 계속 빼 먹는 걸 보면 입에 잘 맞는 모양이다.

“덕분에 잘 먹었어.”

“다음에는 다른 거 만들어 볼게요. 아저씨가 시간 날 때마다 알려 주신다고 했어요.”

“기대할게.”

헤헤 웃으면서 바구니를 정리하는 가하란이었다.

“빵 남았어.”

브라인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입가에는 빵 부스러기가, 길게 뻗은 콧수염에는 잼이 달라붙어 있다.

셀베이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수건으로 대령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애예요?”

“먹고 닦으면 돼. 그보다 빵 남았다니까.”

가하란이 바구니를 뒤로 감췄다.

“이건 엔엔 님 드려야 해요.”

“가하란. 그 깐족거리는 늑대를 챙길 바엔 날 위해 그 빵을 남기는 게 어때?”

“죄송하지만, 그건 안 돼요.”

“섭섭하다, 섭섭해. 내가 너한테 해준 게 몇 개인데.”

셀베이아는 대령의 앞을 가로막은 다음 가하란에게 말했다.

“얼른 가봐. 빵도 굳기 전에 먹어야 맛있으니까.”

“네!”

돌아서는 가하란을 브라인이 붙들었다.

“꼬마야. 산페르 님 소식은?”

“모르겠어요.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고, 나타나지도 않으세요.”

“저번 이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네. 이번에는 이유도 말씀 안 해주시고 사라지셨어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브라인이 가보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멀어지는 가하란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대령님. 산페르 님이라면…….”

“징조 같으신 분인데. 조용히 계시다가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면 항상 일이 터지곤 했어. 이번에도 뭔가 있는 거 같은데, 통 말씀을 안 해주시네.”

“안 좋은 상황인가요?”

브라인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하품했다.

“모르지. 무탈하게 지나갈 때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일이 터진다면… 나야 상관없지만 지상의 다른 종한테는 큰일이 닥칠 거야.”

대령이 ‘큰일’이라고 표현할 정도면 인간의 노력으로 막을 수 없는 재해일 것이다.

“큰일이 나기 전에 여기 정리를 끝내야겠네요.”

셀베이아는 밖에 놓아야 할 자료를 들고 일어섰다.

“내일 당장 세상이 멸망한다면, 넌 뭘 하고 싶니?”

브라인이 물었다. 셀베이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웃으며 말했다.

“대령님 식사나 챙기죠, 뭐.”

“그걸로 되겠어?”

“딱히 할 게 없으니까요. 이곳을 담당하고 정리하는 거. 그거 외엔 저한테 남는 게 없어요. 대령님이 가장 잘 아시잖아요.”

“알지. 알긴 아는데 그래도 최후의 순간까지 내 곁에서 일하는 건 아쉽잖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다른 일을 하고 싶다면 언제든 말해. 자리를 알아봐 줄 테니까.”

브라인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오래된 회색 캐비닛이 쿵쿵거리며 다가와 속에 든 내용물을 보여줬다.

빛바랜 금화가 잔뜩 쌓여 있었다.

“독립하고 싶다면 자금 정도야 대줄 수 있어. 급여 없이 내 곁에서 15년 넘게 일해 왔으니까.”

“무슨 심경의 변화예요?”

“그냥.”

셀베이아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브라인에게 다가섰다.

“대령님.”

“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그런 거죠?”

“모른다니까 그러네.”

“근데 왜 이러세요?”

“모르지만, 느낌이란 게 있거든. 사방에서 밀려드는 정보를 살펴본바, 기이한 일을 꾸미는 놈이 있어. 근데 그게 뭔지 아직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지.”

“사령관님께 말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브라인이 눈을 씰룩였다.

“개인적으로 몇몇 놈은 도와줄 수 있지만, 인간사 전체에 끼어들 마음은 없어. 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이겨내든지, 멸망해야 해. 그게 기록자로서 내가 지켜야 할 방침이니까.”

“……냉정하시네요.”

“알고 있으면서.”

“네, 알고 있죠.”

셀베이아는 책상에 놓인 빗을 들고 브라인의 머리 뒤쪽과 목덜미를 빗겨주었다.

“대령님은 외롭지 않으세요?”

“너도 내 나이 돼봐. 이 할머니는 외롭다는 게 뭔지 잊어버렸어.”

“거짓말.”

“잘 아네.”

셀베이아는 빗을 내려놓고 옅게 웃었다.

“세상이 끝나는 그날에도 옆에서 잔소리해 드릴게요. 그러면 덜 외롭겠죠?”

“됐다, 됐어. 그럴 바엔 고독이 낫지.”

자료를 챙겨 나가려는데, 책상에 놓인 신문이 눈에 밟혔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성도 살인 사건. 저 사건 역시 대령님이 걱정하는 징조의 일부분일까?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아니, 일이 벌어지는 그 순간까지 모를 것이다.

정말로 큰일이란 결국 그런 거니까.

“셀베이아.”

발길을 붙잡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브라인이 살짝 놀란 눈으로 저 멀리 있는 문을 바라봤다.

“왜 그러세요?”

“오늘 예약자가 몇 명 있지?”

“오후에 찾아올 손님은 다섯 명이에요.”

“다 돌려보내.”

셀베이아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대령님. 귀찮으시더라도 오늘 오는 손님은…….”

“더 중요한 손님이 왔어. 내일 해결해 준다고 말하고 다 돌려보내.”

더 중요한 손님?

그때였다. 닫힌 문이 슬며시 열렸다. 가하란과 엔엔. 둘을 제외하곤 저 문을 멋대로 열 사람이 없을 텐데?

문 안으로 들어온 사람을 바라봤다.

후드를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은 안 보였지만, 체형은 여자였다.

누구지?

순간 어둠과 캐비닛으로 가득 찬 기록보관서에 꽃향기가 감돌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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