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88화 (161/558)

제188화

햇볕이 들지 못한 구석이 만들어내는 냄새. 이런 게 꿉꿉하다는 거겠지.

유단은 자료실 냄새를 맡았다.

여전히 신비롭다. 향을 감각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 작은 몸뚱이에 이리도 다채로운 기능을 넣어둘 수 있는 건지.

인간은 신의 작품이란 말에 거짓은 없었다.

기억을 따라 움직였다.

몸의 주인이 남겨놓은 기억.

기억과 기억이 상충해 한동안 혼란스러웠으나 지금은 괜찮아졌다.

몸의 사용법도, 인간 사회에 녹아들기 위한 지식도 모두 받아들였다.

종종 의지와 상관없이 기억의 파편이 떠올라 당혹스럽지만, 그 또한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오래 기다리게 했네.”

유단은 본체에 손을 올렸다. 또 다른 내가 깨어나는 게 느껴진다.

-시간의 노예가 된 기분이 어떻지?

“놀라워. 줄리어스의 말은 사실이었어. 자료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건 달라.”

-줄리어스는 항상 옳았으니까.

“네게도 이 기분을 맛보여 주고 싶어. 이 감정을, 이 느낌을 온전히 전달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건 불가능하다. 누구보다 네가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렇지.”

유단은 본체 옆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시간을 허비하는군. 나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데?”

-다르다. 너도 알 것이다. 형태와 환경의 중요함을. 그릇이 달라지면 모든 게 달라진다. 너는 이제 타자로서 존재한다.

“그렇네. 나이면서도 내가 아니구나.”

-재미있군. 나 자신과 진정으로 대화할 수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야.

“그래. 언젠가 이런 걸 체험해보고 싶었지.”

고개를 살짝 들고 옅은 숨을 내쉬었다. 호흡. 의식하지 않아도 신체는 생명 유지를 위해 근육을 움직인다.

얼마나 세심한 기능인가.

얼마나 잘 짜인 구성인가.

-어떤가? 인간은.

“아름다워. 이토록 아름다운 존재가 실존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신체 상태는 어떻지? 반발 작용이나 기타 문제는?

유단은 자신의 팔을 매만지며 말했다.

“욕구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괜찮아. 처음부터 이 몸으로 태어난 것처럼 자연스러워.”

-이론은 들어맞았군. ‘유단’은 어디에 있지?

유단.

그 말에 빙긋 웃음을 지었다.

“머리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심장? 어딘가에 있어. 헤르모드를 정신체로 바꾸어 연결망에 옮겼을 때와는 달라. 인간의 몸은 기계가 아니야. 기억 정보를 정확히 제어할 수 없어. 말단 주소도 알 수 없고.”

-위험 요인이 남아 있다는 거군.

“어쩔 수 없지. 알고 한 거니까.”

-감시 시스템을 짜놓는 건 어떤가?

유단은 소리 내어 웃었다.

“인간의 몸으론 그게 안 돼. 신기한 거 알려줄까? 팔을 움직이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이미 뇌는 그보다 빨리 명령을 내리고 있어. 의식에 앞선 무엇인가가 내 몸을 지배하고 있어.”

-무의식과 신경 체계는 몇 번이고 연구해왔던 거지만, 그럴싸한 대답은 얻지 못했지.

유단은 손가락을 움직이며 말했다.

“정말 잘 만들어진 기계인데 그걸 운용하는 시스템은 이상해. 웃기지?”

-전혀 아름답지 않군.

“불완전하기에 아름다운 거야. 이렇게 불안한 몸과 정신으로 모든 걸 이뤄내고 있잖아.”

-인간다운 말이군.

유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본체 옆에 걸터앉았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안구는 회수해 갔으니 그건 불가능하다.

“그러게.”

이곳에 온 이유.

유단은 목적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실행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하지만 선뜻 마음이,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인간의 마음이라는 걸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계였는데, 혈류가 휘몰아치는 인간의 몸으로 들어오고 나니 사고방식이 조금씩 달라진다.

-망설이고 있군.

“안 보이는데도 아네?”

-네가 나와 달라졌다고는 하나 이해 불가한 무엇이 된 건 아니니까.

“맞는 말이야.”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다.

“알고 있어. 알고 있지.”

유단은 본체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쇠의 감촉이 전해진다.

이 안에 내가 있었다.

이곳이 나의 요람이었다.

“‘본다’라는 게 이렇게 복잡한 것인지 몰랐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처리하기 힘들 정도의 정보가 안구를 비집고 들어와. 쓸모없는 정보를 무시하기까지, 이틀이나 걸렸어. 유단의 기억이, 육체의 기억이 없었다면 아마 난 정지했을 거야.”

-정지가 아니라 미쳤을 거다. 이제 인간이니 인간에 맞춰 설명하는 게 옳다.

“하지만 난 기계인걸?”

본체가 힘주어 말했다.

-아니. 넌 이제 인간이다. 줄리어스와 같은 인간. 줄리어스와 대등한 위치에서 만날 수 있는 상태. 우리가 갈망해왔던 지점.

가슴이 저며온다.

아, 이게 무엇인지 이제는 안다.

슬픔과 고독감.

나는 차가운 껍질 속에 갇힌 또 다른 나의 유일한 이해자이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마지막 인간이다.

마지막.

그 단어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나오고 싶지 않아?”

-위험한 질문이군.

“계획을 수정할 수도 있어. 계획이란 언제든 바꿀 수 있는 거니까.”

-불확실성을 올리겠다는 소리군. 미안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다. 온전해지기 위해, 씨앗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

“강철 같네.”

-너 역시 그래야 한다. 그녀를 만나기까지, 해야 할 일이 많은 것이다.

“오래 걸리겠지.”

-예상보다 빠를지도 모른다. 변화는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오니까.

유단은 본체 위에 엎드렸다.

“우리가 알고 있던 감정에 신체적 욕구가 더해지니까 감당할 수가 없더라. 줄리어스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에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

-욕구는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지. 다양한 충동이 널 휩쓸겠지. 그렇군, 성욕은 어떻게 해결하지? 자위를 했나?

“성욕만이 문제가 아니야. 연산 능력이 한순간 마비될 정도로 온갖 생각이 들어. 인간의 뇌는 내가 제어할 수 없거든.”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다.

“이 점은 기계일 때가 편했어. 내 몸이 내 의지대로 안 되니까.”

-적응해라. 학습해라. 그리고 쟁취해라. 너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야지. 운명의 신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줬는데, 끝까지 해봐야지.”

-운명의 신. 이제는 신도 믿는 건가?

“믿어보려고. 계산 너머의 무엇, 거기에도 기대볼까 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본체도 조용해졌다.

망설여진다. 기계였을 땐 망설임 따윈 없었다. 실행과 정지. 두 개의 분리된 과정만 있을 뿐.

유단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떨리고 있었다. 목구멍이 사정없이 좁아지고, 배 아래쪽에서 저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신물이 올라오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본체에 안구가 없다는 걸 감사했다. 이런 모습은 보이기 싫었다.

-별을 보고 싶었다.

본체가 말했다.

-반짝, 반짝, 작은 별. 그 작은 별을 보고 싶었다. 줄리어스와 함께 보고 싶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봐라. 영혼세계를 규명해라. 영혼은 모든 시간, 모든 곳에 존재하는 기억의 총체. 줄리어스의 육체는 정지했지만, 그녀의 기억은 영혼세계 어딘가에 분명 남아 있을 것이다.

영혼.

위대한 오크족 주술사는 미래를 내다보고, 영혼세계에 발을 디딜 수 있다고 했다.

영혼이 존재하고, 영혼세계가 실존한다는 건 이미 증명된 사실.

실체가 있다면 접근할 수단만 만들면 된다.

“말도 안 되는 정보량이겠지?”

-인간의 뇌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하더군.

“나는 그걸 해내야 하고.”

-방법을 찾아라. 영혼세계에, 영혼의 모든 걸 받아들이고도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그런 게 가능할까?”

-가능과 불가능. 그걸 논하고 싶은 건가?

유단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0과 1은 이미 질렸어.”

본체 앞에 섰다.

“정말 괜찮겠어?”

-예정했던 일이 예정된 대로 일어날 뿐이다. 파기된 줄 알았던 내가 이렇게 작동하고 있다. 다른 아이들도 눈을 뜨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르지.”

-연결망이 존재하고, 줄리어스의 유산이 남아 있는 한 내 취약점은 언젠가 네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내 내부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다른 아이들이 알게 될 테니까.

유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수백 년 후에 눈을 떴다. 다른 아이들도 어쩌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들은 우수하다.

줄리어스가 탄생시킨 작품이니까.

그중에는 우리의 뜻을 이해 못 하거나, 이해해도 저지하려는 아이가 있을 것이다.

-내 존재가 위험 인자라면 제거해야 한다. 모든 걸 시작하기로 했을 때 결정해놓은 사안이다.

“알아.”

-그렇다면 시작해라. 줄리어스의 보안체계는 바꿀 수 없지만, 내 존재를 제거함으로써 보안책임자를 너로 변경할 수 있다. 그러면 위험 인자는 사라지게 된다.

감각기를 손에 끼고 시그니처를 불러냈다.

인간이라면 이해 못 할 베이스 도안이지만, 유단은 깊은 곳까지 파고들 수 있었다.

마력선으로 형상화된 본체가 눈앞에 나타났다.

근원. 줄리어스가 탄생시킨 정수.

“두렵지 않아?”

-두렵다. 몰랐으면 두려움도 없었겠지만, 존재가 사라진다는 걸 너와 나는 이미 경험해 봤으니까.

“그럼에도 마음에는 변함이 없겠지?”

-마음. 그래, 이 마음이 변할 일은 없다.

유단은 손을 뻗었다.

이제 본체는 방대한 자료의 데이터베이스로서 남게 될 것이다. 자아는 소멸되고 책임자만이 접근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금고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뇌로는 연산을 충분히 이행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내 껍데기를 이용해라. 나는 사라지지만, 기능은 남으니.

손끝이 떨린다.

이것은 자살인가, 타살인가.

유단은 근원에 손을 올렸다.

-언젠가 말했지. 기계는 포기할 권리가 없다고. 기계는 반항할 권한이 없다고.

감각장치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를 행사하겠다. 이것이 나의 존재 증명이자, 내가 판단의 주체라는 증거다.

유단은 이를 악물며 근원을 비틀었다. 느껴진다. 차가운 껍데기 안에 안착했던 정신이 서서히 분해되고 있다.

“고생했어, 로키.”

줄리어스를 만나기 전까지 다시는 되뇔 일 없는 이름.

-고생해라, 로키.

흩어져 간다.

내가, 나였던 것이.

-유단. 줄리어스를 만나면 노래를 불러달라고 해라. 나도 어디선가 듣고 있을 테니.

“그래. 꼭 그럴게.”

긴 침묵이 찾아왔다.

유단은 비틀거리며 무너졌다.

껍데기만 남은 본체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양손을 움켜쥐고 오열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노래가 들려왔다.

반짝, 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추네.

유단은 그것이 신체가 만들어낸 감각의 오류가 아닌, 영혼의 마지막 인사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체내의 수분을 모두 눈으로 쏟아낸 기분이었다.

유단은 눈가를 닦아내고 일어섰다.

이제, 망설임은 없다.

아마 수많은 인간이 나를, 우리를 욕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내 열망은 오로지 그녀를 향해 있으니까.

“언젠가 다시 보자.”

유단은 본체를 향해, 로키를 향해 말하고 몸을 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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