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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187화 (160/558)

제187화

커피는 볶는 방법에 따라 향과 맛이 달라진다고 한다. 생산지에 따라서도 다르다고 하는데,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고.

“좀 쓴가?”

탄드라는 입 안에 남은 쓴맛에 인상을 찌푸렸다. 물을 더 넣는 게 낫겠어. 아는 교수가 권해준 방법은 취향에 맞지 않았다.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언제나 그랬듯 말끔하게 정리된 선반이 반겨줄 줄 알았는데…….

엎어진 파일, 삐뚤어진 채 구석에 박혀 있는 카트, 정리가 안 된 서류들.

눈을 살짝 찌푸렸다. 어제 담당 연구원이 누구였지?

유단이란 걸 떠올리자마자 탄드라는 걱정부터 했다. 유단은 게으른 연구원이 아니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책임과 성실이 무엇인지 아는 아이였다. 유단이라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정리를 못 했을 것이다.

탄드라는 바닥에 떨어진 파일을 주웠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정리도 마저 못 하고 연구실을 떠난 걸까.

그때 불현듯 생각난 것이 있어 커피를 내려두고 자료실로 향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문고리를 잡고 잡아당겼다.

덜커덩거리며 내부가 살짝 보였다. 문이 완전히 열리지는 않았는데, 잠금쇠 때문이었다.

열쇠가 안 잠겨 있는 상태.

안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잠금쇠는 왜 내려왔지? 유단이 잠근 건 아닐 테고, 충격으로 내려온 건가?

“유단? 안에 있나요? 있으면 대답해요.”

열린 문틈으로 안쪽을 살피며 말할 때였다. 어둠에 적응한 눈이 희미한 형체를 잡아냈다.

그건 신발이었다.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유단!”

정리되지 않은 연구실이 무얼 의미하는지, 안 좋은 예감이 들어맞았다.

탄드라는 다른 연구실 교수의 도움을 받아 문짝을 뜯어냈다. 다들 유단을 아끼고 있는 터라 손을 빌려주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유단, 유단.”

퀜 교수가 유단을 끌어안으며 볼을 살짝 쳤다. 반응이 없었다.

“군병원으로 옮길 테니 여기 상황 좀 봐두시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할 테니.”

퀜 교수가 유단을 둘러업은 채 자료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탄드라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기 위해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그 아이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유등을 켠 다음 주변을 훑었다.

연구 목적으로 받아 간 안구가, 오래된 유사 정령에 연결돼 있었다. 유사 정령이 설치된 선반 밑에 양피지 하나가 보였다.

탄드라는 몸을 숙여 양피지를 잡았다.

“이건…….”

검붉은 색으로 그을려 있었다. 불에 탄 것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마나와 관련된 사고 같았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착실하다고는 하나 아직은 아이. 좀 더 주의하라고 경고했어야 했다. 시그니처를 완벽하게 다루는 모습에 안심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어른인 내가 신경 썼어야 하는데.

자책감이 먼저 들었다.

양피지를 챙긴 다음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작동도 안 하는 유사 정령에 왜 관심을 보였을까.

아니지. 오히려 작동하지 않는 기계기에 안심하고 만졌을 것이다.

탄드라는 씁쓸한 눈으로 유사 정령을 바라본 후 몸을 돌렸다.

군병원까지 가는 동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병실 문을 여는 순간에는 단 하나만을 생각했다.

부디 무사하길.

“왔습니까?”

퀜 교수가 웃으며 반겨주었다.

미소를 보자마자 안도감이 들었다.

“큰 문제는 없나요?”

“의술사가 살폈습니다. 다행히 이상은 없다는군요. 모노클로 확인한바 마나가 살짝 과하게 모인 상태였지만, 위험한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역시나 마나 문제였군요.”

탄드라는 수거한 양피지를 퀜 교수에게 보여줬다. 퀜이 수염을 매만지며 양피지를 살폈다.

“꼬임이었을까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어릴 땐 다들 이런 실수를 범하곤 하죠.”

“잊고 있었어요. 열한 살이라는 걸.”

“연구단지 내에서 성인 대접을 해줬으니까요. 하하, 깨어나면 따끔하게 혼을 내줘야겠습니다.”

“그건 제가 할게요. 덴스 교수가 저한테 유단을 맡겼으니까요.”

퀜이 눈웃음 지으며 양피지를 돌려줬다.

“자료실에 보관한 유사 정령에 안구가 연결돼 있었어요.”

“거기에 있는 거라면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유사 정령 아닙니까?”

“예. 그래서 조금 안일하게 손을 댄 것 같아요.”

“그렇군요.”

소식을 들었는지 연구단지 사람들이 한 명씩 얼굴을 비췄다.

친분이 없는 교수가 찾아와 유단의 안부를 물었을 때는 솔직히 놀랐다.

“마당발이었구나. 연구실 정리하면서 틈틈이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탄드라는 누워 있는 유단을 보며 말했다.

시간을 잘게 쪼개 바쁘게 움직였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유단은 항상 분주했다. 쉬는 걸 보지 못했다.

마치 쫓기고 있는 것처럼.

다 좋아 보이던 모습들이, 지금 생각하면 돌봐줬어야 할 불안한 징조들 같았다.

항상 웃음만 짓던 아이.

한 번쯤 물어봤어야 하지 않았을까? 유단, 넌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나지 않냐고.

아이라면 응당 보였어야 할 약한 모습을 유단에게선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노력이라 치장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처절한 무엇인가를 겪고 있었던 게 아닐까?

“네 이야기를 좀 더 들어봤어야 했는데.”

탄드라는 책을 펼치며 유단의 곁을 지켰다. 페이지를 몇 장 넘기고 얼굴을 확인하고 다시 책을 들추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창밖을 보니 어스름이 내려앉았다.

책을 덮었다. 의술사의 말대로라면 오늘 내로 의식을 되찾아야 할 텐데.

물끄러미 유단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신음하며 몸을 뒤트는 유단이었다. 서둘러 의술사를 호출했다. 모노클을 끼고 나타난 의술사가 유단의 전신을 훑으며 말했다.

“과하게 모였던 마나가 흩어지고 있습니다. 반발 작용 때문에 압통을 느끼겠지만 괜찮을 겁니다.”

의술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단이 눈을 떴다.

멍한 눈으로 주변을 바라본다.

“유단.”

곁으로 다가가 눈의 움직임을 살폈다. 눈동자의 움직임은 영혼의 상태를 대변한다.

허공을 훑던 눈동자가 안정적으로 움직이며 탄드라를 바라봤다.

“교수님.”

그 한 마디에 긴장감이 탁 풀렸다. 의술사가 웃으며 다가왔다.

“주변인은 알아보는 것 같구나. 이름이 뭔지 말해볼 수 있겠니?”

이름이란 단어를 작게 되뇌며 잠깐 침묵하는 유단이었다.

설마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건가?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고 느낄 때였다.

“……유단이요. 유단입니다.”

“자기 인식에도 문제가 없네요. 유단, 팔과 다리를 움직여 보겠니?”

유단이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살짝 떨리고 더디지만, 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신경 기능에도 문제가 없는 것 같군요.”

“한시름 덜었네요.”

탄드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을 시켜 돌보게 할 테니 교수님도 이만 들어가 보시죠.”

탄드라는 의술사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조금 더 머물다가 가겠습니다.”

“그래 주시는 편이 환자한테는 더 나을 테니 만류하지는 않겠습니다.”

의술사가 시간을 확인한 후 병실을 나섰다.

“교수님.”

“아무 말 말고 눈 감고 있어요. 아니면 어디 불편한 곳이 있는 건가요?”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제가 살아 있는 게 맞나요?”

엉뚱한 질문에 웃음이 나왔다.

“살아 있죠. 왜요? 죽은 거 같아요?”

유단이 눈동자를 서서히 굴렸다. 병실 벽을 바라보고, 덮고 있는 이불을 훑고, 마지막으로 창문 밖을 응시했다.

“이게 살아 있다는 거군요.”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양이네요.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걸 보면.”

탄드라는 이불을 끌어 올려 유단의 몸을 덮어줬다.

“자요.”

“잠이 안 옵니다.”

말하던 유단이 잔기침을 시작했다. 탄드라는 유단을 일으킨 다음 물을 건넸다.

잔을 들고 물끄러미 컵을 보던 유단이 아주 조심스럽게 물을 마셨다.

한 모금, 또 한 모금.

신성한 물이라도 되는 듯 신중하게 마신다.

“시원하네요, 정말로.”

굳었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폈다.

탄드라는 작게 입을 벌렸다. 그간 봐왔던 유단의 웃음과는 조금 달랐다.

순진해 보인다. 조금 엉성한 감도 있다. 오늘에서야 유단의 참모습을 본 듯한 느낌이다.

“그렇게 시원해요?”

“네. 시원합니다.”

유단이 창밖을 계속 바라보며 말했다.

“밖에 뭐라도 있나요?”

“어둠이 있습니다. 하늘이 있고요. 건물의 불빛도 보입니다.”

“그건 당연한 거죠.”

“예, 당연한 것입니다.”

유단이 탄드라를 똑바로 바라봤다.

“교수님. 밖을 보고 싶습니다.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도와달라는 말이 꽤 기쁘게 들렸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텐데요.”

“안 될까요?”

탄드라는 슬며시 웃으면서 유단을 부축했다. 침대 밑으로 다리를 내리는데 제대로 걷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불편한 점이 있거나 몸이 이상하면 바로 말해요.”

“그런 건 아닙니다. 조금 생소해서요.”

생소하다?

뜻을 묻기 위해 유단을 바라봤다. 유단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정신이 없어서 말이 헛나온 것 같다. 유단을 데리고 창가로 걸어갔다.

닫아놓은 창문을 열려 하는데, 유단이 입을 열었다.

“제가 해도 될까요?”

“창문 여는 게 그렇게 하고 싶어요?”

“네, 교수님.”

“그래요.”

창틀에 손을 올려 몸을 지탱한 유단이 천천히 창문을 밀었다. 부드럽게 열린 창문 사이로 찬바람이 흘러들어왔다.

겨울의 찬 공기가 금방 병실을 채워 나갔다.

“춥네요.”

유단이 말했다.

“겨울이니까 추워야죠. 작년보다 더 추운 게 문제지만.”

“눈이 보여요.”

유단이 길가에 쌓인 눈을 바라본다.

어린애가 처음 눈을 본 듯한 어투였다. 탄드라는 손을 뻗어 유단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됐죠?”

“예, 교수님.”

느긋하게 호흡하며 허리에 힘을 주는 유단이었다. 흔들거리던 몸이 금방 중심을 잡았다.

다리를 내려다보고 손을 내려다보고. 그렇게 자신의 몸을 훑던 유단이 사뿐히 걸어 침대로 들어갔다.

이불을 덮어주고 일어서려 하는데 유단의 눈가가 시선을 잡았다.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서웠던 거겠지.

사내아이인 만큼 이런 건 무시해주는 게 나을 것이다.

“쉬어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탄드라는 옅게 웃으며 병실을 나섰다.

* * *

“정말 괜찮겠어요?”

“네, 교수님. 정말 괜찮습니다.”

유단은 양손을 앞으로 모은 채 웃었다. 탄드라가 위아래로 살짝 훑은 다음 말했다.

“복귀는 환영할게요. 유단만큼 꼼꼼하게 일해주는 연구원도 없으니까.”

“실수 없이 잘하겠습니다.”

“실수야 누구나 저지르는 법이니 크게 걱정하지 마요. 하지만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마요. 난해한 게 있으면 우리가 도와줄 테니 꼭 말하고.”

“네, 교수님.”

“그래요. 가서 일 봐요.”

유단은 한 걸음 물러서며 인사한 다음 몸을 돌렸다. 파일을 정리하고 교수의 스케줄을 점검한 뒤 연구실을 나왔다.

“돌아왔구나. 몸은 좀 어떠냐?”

퀜 교수였다.

“교수님 덕분에 멀쩡합니다.”

“내 덕은. 탄드라 교수가 일찍 발견한 덕이지. 나중에 시간 내서 옆 동 교수들한테도 인사드려라. 다들 널 걱정하느라 미간에 골이 잡혔을 테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수고해라, 라고 말하며 지나치던 퀜 교수가 걸음을 멈췄다.

“근데 말투가 좀 딱딱해졌구나.”

“…이게 제 본래 어투입니다. 불편하셨다면 다시 예전처럼…….”

“아니다. 오히려 이게 나아. 그전에는 뭐라고 해야 하나, 너무 착해 보였거든. 물론 네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내가 속물이라 그런 게 이상하게 느껴진 거니까.”

“그렇습니까?”

퀜 교수가 방긋 웃었다.

“사람이라면 항상 웃을 수는 없는 법이지. 유단,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게 좋단다. 음, 아주 좋아.”

“사람이라면…….”

“그래. 사람이라면.”

퀜 교수가 떠났다.

유단은 오른손으로 자신을 얼굴을 매만진 후 몸을 돌려 자료실로 들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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