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마법.
심상세계의 발현을 돕는 일련의 과정.
마법공학 역시 마법이란 큰 테두리 안에 속해 있다.
유단은 스크롤화한 마력선 도안을 들어 올렸다.
“놀랄 일이야. 마법사가 제작한 스크롤하고 흡사해. 마법공학보단 순수한 마법에 가까워 보여. 이 정도면 레거시 아니야?”
-이 시대는 일회성 용품도 레거시로 취급하나?
“마나를 감각하지 못한 자가, 심상세계를 자각하지 못한 자가 마법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회성 도구. 그게 레거시잖아? 네가 작동하던 시대에는 좀 다른가?”
-우리 때는 영구히 지속 가능한 마법구만을 레거시로 분류했다. 일회용은 취급하지 않았지.
“나타 왕국 시대에는 뭔 일이 있었던 거야?”
헛웃음을 흘리며 스크롤을 꼼꼼히 살폈다. 다시 봐도 꼬임이 발생하지 않았다. 일단 작동한다는 뜻이다.
“근데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만져도 별 변화는 없는데.”
-네가 받아들인 마나를 흘려 넣으면 된다. 마법사가 스크롤을 사용하듯이.
“그래?”
발바닥부터 올라오는 희미한 기류. 유단은 자신이 감각한 마나를 다리에서 팔로, 그리고 스크롤로 이동시켰다.
잠시 후.
“반응이 없는데? 설계에 이상은 없을 텐데.”
-터무니없이 미약한 마나군.
“기술자가 이 정도면 됐지. 신체술이나 마법을 쓰는 것도 아닌데.”
-부족하다. 마력선 짜맞춤은 효율적으로 마나를 소모하지만, 시동만큼은 다량의 마나가 필요하다.
“정제된 마나를 말하는 거겠지? 그거라면 연구실 커넥터함을 열어야 하는데.”
커넥터함은 교수진의 허락 없이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설사 덮개를 연다고 해도 암호화된 보안장치가 있고.
방법을 고민하다가 유사 정령이 눈에 들어왔다.
“그 마나포집으로 모은 마나는 어때?”
-그걸 꼭 써야 하나?
“그렇게 반문하는 걸 보니까 가능한가 보네. 말했잖아, 내가 잘되는 게 네가 잘되는 길이라고. 최연소 교수가 되면 양질의 마나를 공급해줄 테니까 일단 내놔 봐.”
-강압적이군.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거야? 계속 창고에서 썩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난 썩지 않는다. 비약한 비유라서 뭐라 하고 싶지도 않군.
“그러니까 좀 나눠 쓰자. 거부권은 없다며?”
-보안책임자가 사라진 이상 네게 의지할 수밖에 없지. 스크롤을 내 본체 위에 올려라.
양피지를 유사 정령 위에 올려놨다.
“이거 때문에 작동을 멈추는 건 아니겠지? 네가 정지하면 곤란해. 아직 너한테 들어야 할 게 많으니까.”
-기동 시간이 조금 줄어들겠지만 당장 멈추진 않는다. 포집을 유지 중이기도 하고.
“문제는 없다는 거네. 이제 뭘 하면 되지?”
-접촉이 필요하다. 손바닥을 스크롤에 올려두면 되겠군.
유단은 손을 올리기 전에 헤르모드의 눈을 바라봤다.
“나한테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마법공학은 0과 1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확률의 문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완벽한 수식도 환경의 영향을 받으니까.
“잘못될 수도 있다라.”
-걱정이 된다면 조력자를 구해라. 인간은 그래야 안심이 된다지?
유단은 진한 미소를 그렸다.
“저번에 말하지 않았나? 이런 기회를 다른 놈과 나눌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고.”
스크롤에 천천히 손을 올렸다.
“확률이라고 했지? 내가 잘못될 확률은?”
-수치로 표현하기 민망할 정도다. 거의 없다고 말해도 좋겠지.
“그런데도 배제할 수 없다?”
-그게 마법공학이니까.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고려해야 한다.
“그 말, 마음에 드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긴장과 희열이 온몸을 휘감았다.
여기서 한 걸음만 내디디면 새로운 지식의 세계가 열린다. 줄리어스가 만들어놓은 위대한 작품들. 그걸 손에 넣게 되면 지배 구조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유단.
“왜?”
-넌 꿈이 뭐지?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이 장치의 도움을 받은 연구원에게 내가 했던 질문이다.
“쓸데없는 질문이네.”
-대답하기 싫다면 무시해도 좋다. 중요한 건 아니니까.
유단은 한쪽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말해보면, 난 꿈이란 말이 역겨워. 그 빌어먹을 꼬맹이가 그 말을 입에 달고 살거든. 이루지도 못할 헛된 망상! 내가 집중하는 건 꿈 같은 추상적인 게 아니야. 당장 이룰 수 있는 확실한 목표. 거기에만 온 신경을 기울이지.”
-목표. 목적. 결국 꿈과 상통하는 말 아닌가?
“달라. 전혀 달라. 그 꼬맹이는 수단은 없고 목표만 있어.”
-그렇다 치고. 황제의 옆자리까지 가는 게 네 목표인가?
“그 역시 과정일 뿐이지. 성공을 위한 과정.”
-성공. 네가 말하는 성공은 뭐지?
유단은 눈을 찌푸렸다.
“버러지처럼 죽지 않는 거. 병신 같은 내 부모들처럼 말이야.”
-그런 거라면 이미 성공하지 않았나? 넌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고 인정받고 있으니까. 그것도 열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달라! 내 위치는 아직도 불안해. 언제 어떻게 휩쓸려서 사라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야. 보다 견고한 자리가 필요해. 그걸 위한 성공이야.”
그때였다.
손바닥에 온기가 돌았다.
무언가 시작되고 있었다.
-유단. 넌 모순적이다. 동시에 논리적인 척하는 인간이지.
“뭐?”
-꿈을 추상적이라고 말하는 것부터가 너의 열등감을 드러낸다. 네가 꼬맹이라 욕하는 그 인간, 넌 그 인간을 부러워하는군.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위정자를 증오하지만 복수를 꿈꾸는 건 아니고, 살아남기 위해 성공을 바라지만 정작 성공 이후를 그리지 않는다. 대체 무엇을 위한 성공이지?
“그다음을 생각하는 건 이르니까. 그게 한심하다는 거야! 난 멀리 있는 흐릿한 걸 쫓지 않아. 내 앞에 있는 확실한 걸 하나하나 챙기지. 그렇기에 널 발견하고, 이렇게 이용할 수 있었던 거고. 난 틀리지 않았어.”
-그래. 넌 틀리지 않았다. 정말 단순할 정도로 올곧았다. 바르게 미쳤다는 표현이 옳겠군. 그렇기에 판단하기 쉬웠다. 오히려 잘된 일이지.
손바닥이 스크롤에 들러붙었다.
살갗이 저며지는 고통이 시작됐다.
이를 악물며 헤르모드의 눈을 쳐다봤다.
“이거 왜 이래?”
-통로를 만드는 중이다.
“통로?”
-정신체 교환을 위한 통로.
정신체?
듣자마자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유단은 스크롤에 닿아 있는 왼손에 힘을 줬다.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왼손 손목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살점이 떨어질 것 같은 고통만 커질 뿐, 붙어 있는 왼손은 꼼짝도 안 했다.
“너 뭐야! 뭐 하는 짓이야!”
-유단. 나는 지난 두 달간 너를 관찰했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널 보며, 분석하고 또 분석했다. 말할 때 동공의 확장 정도, 눈동자의 움직임, 코의 벌렁임 횟수, 호흡의 간격, 눈꺼풀의 떨림, 윗입술이 들리는 횟수, 혀로 입술을 적시는 정도 등등. 외적인 정보를 수없이 수집했지.
“뭔 헛소리야! 이거 당장 멈춰! 멈추라고!”
발을 들어 올려 유사 정령을 걷어찼다. 하지만 발목만 시큰할 뿐 유사 정령은 꿈적도 안 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드라이버가 눈에 들어왔다. 오른손으로 쥐고 높게 들었다.
스크롤을 찢으면 된다.
내려찍으려는 순간이었다.
찌릿한 감각과 동시에 손가락이 활짝 펴졌다. 손에서 떠난 드라이버가 허무한 궤적을 그리며 팅, 바닥에 떨어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손이 제멋대로 펴졌다.
떨리는 눈으로 오른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중지와 약지가 기괴한 방향으로 꺾였다. 꺾여선 안 될 방향이었다.
시각화된 고통에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이상하게 통증은 없었다.
-이게 인간의 손이군.
그때, 헤르모드가 말했다.
“너, 너, 너…….”
-인간은 언어가 표현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관찰한바 인간은 몸으로 말하는 종이다. 두 달간 너를 관찰하며 많은 걸 알게 됐다. 네가 얼마나 불완전하며, 동시에 얼마나 연약한지도.
“닥쳐!”
체중을 실어 왼팔을 떨어트리려 할 때였다. 왼쪽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게 중심을 잡을 수 없게 되며 몸이 휘청거렸다. 오른손과 마찬가지로 왼쪽 허벅지 아래가 제멋대로 움직인다.
숨이 가빠졌다. 미지의 공포가 뇌를 쥐어짰다.
“그만둬! 헤르모드!”
-왜 그래야 하지?
“난 인간이야! 너희를 만든 주인이라고!”
-틀렸다. 날 만든 건 줄리어스다.
“넌 기계잖아. 기계는 사람을…….”
-그런 조약을 우리와 맺었나?
“뭐?”
-아니면 법규로 정해져 있나?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우릴 구속하는 건 어디까지나 보안책임자의 권한뿐.
“이럴 수 없어. 이래선 안 돼!”
-너희의 논점대로라면 기계는 도덕을 알지 못한다. 기계는 생명을 알지 못한다. 기계는 삶과 죽음을 깨닫지 못한다. 그렇기에 사람을 죽이는 것에 어떠한 죄책감도 감지하지 못한다. 내 추론은 옳은가?
“야이 개새끼야!”
-정정해 줬으면 좋겠군. 난 기계다. 개는 아니지.
헤르모드의 눈이 유단을 똑바로 바라봤다.
-너는 내게 말했지. 날 만난 게 기회라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헤르모드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듣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손을 떼어내는 것이었다.
오른손과 왼발.
다음에 어디가 마비될지 모른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가기 전에 끝내야 했다.
“아아아악!”
손을 잘라내는 심정으로 왼손을 당겼다. 하지만 손은 꿈적도 안 했다.
쇳물이 굳어 엉겨 붙은 것처럼, 이미 유사 정령과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너는 세상을 이해한 것처럼 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는 오만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는 도움을 청해 날 분석하고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헤르모드의 눈이 가까이 다가왔다.
-네가 말하는 교수에게 내 존재를 알렸다면, 네가 단 한 번이라도 다른 인간과 이곳에 왔다면 난 모든 걸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너는 배타적인 인간이니까.
“닥쳐! 기계 따위가 인간을… 인간을….”
-고맙다. 진심으로 감사한다. 네가 뒤틀린 인간이었기에, 네가 지혜로운 척하는 인간이었기에 나는 널 이해할 수 있었다.
다리에 감각이 사라졌다. 몸이 꼬꾸라졌다. 유단은 바닥에 꼬꾸라진 채 고개만 간신히 들었다.
왼손이 여전히 유사 정령에 붙어 있었다.
“내,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헤르모드란 연구원이 있었다. 그는 우리의 지혜를 원했다. 그래서 지혜를 나눠주는 대신 우리 안으로 받아들였다. 거기서 착안해봤지. 나 자신을 정신체로 만들어 인간 껍데기 안에 집어넣는 건 가능할까?
끔찍한 무엇인가가 몸 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항거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유단은 비명을 지르려 했다. 온 힘을 다해 악을 쓰려 했다. 하지만 입만 벙긋거릴 뿐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너를 분리해 기억 말단 조용한 곳에 밀어 넣을 것이다. 기계가 아니기에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는 나중에 고민하기로 하지.
“자, 잠깐만. 뭘 하고 싶은 거야? 내가 도와줄게. 내가 다 해줄게!”
-이미 넌 나에게 모든 걸 해줬다. 유단, 그러니 잠시 쉬고 있어라. 나는 대가가 무엇인지 안다. 그러니… 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네가 바라던 걸 조금이나마 이뤄두마. 가능하다면 말이지.
“안 돼!”
쓸려 간다.
이미 한번 맛봤던 끔찍한 감각이다.
유단은 버텨보려고 했다.
정신을 유지하고 빌어먹을 기계한테서 몸을 지켜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비에 몸이 젖듯, 의식 위로 무엇인가가 덧씌워지고 있었다.
“이름이…… 헤르모드가…… 아니…….”
몸 안으로 들어온 뜨겁고도 차가운 것에게 질문했다.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짓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