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85화 (158/558)

제185화

“꽃? 축하받을 일이라도 있었나?”

-그건 알 수 없다. 그녀는 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쓰레기통에 버렸다.

유단은 마력 흐름을 살피며 물었다.

“마음에 안 들었던 건가?”

-‘이유 없는 선의만큼 위험한 게 없다.’ 그녀의 지론이었지.

눈웃음을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네. 조심성이 많았었나 봐, 줄리어스는.”

-그녀를 노리는 정적이 많았으니까. 권력과 위험도는 항상 정비례하지.

“그래서 높은 자리에 앉으려면 힘을 갖춰야 하는 법이고.”

세 번째 섹션도 마무리했다. 점점 눈에 익어간다.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우리 중 하나가 버려진 꽃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선물인데 소중히 다루는 게 어떻겠냐고.

“너희 중 하나? 인격화가 제각각이었나 봐.”

-우린 같은 바탕에서 태어났으나 다른 개성을 얻었다. 한때는 하나의 개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유사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완벽한 타자가 되었지.

유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헤르모드는 스스로 감정을 깨닫고 성격이 나뉘었다고 생각 중일 것이다. 그 모든 게 제작자의 의도임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보면 볼수록 줄리어스의 실력은 놀라웠다. 이렇게까지 인간과 유사한 인격화를 이루어 내다니.

하루빨리 기계어를 습득해야 했다. 헤르모드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줄리어스가 무슨 짓을 해놨는지 다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네 동료와 줄리어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동료?

“안 어울리는 표현인가?”

-생소한 표현이긴 하나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

헤르모드의 안구가 천장을 바라봤다.

-카트시. 그 애의 이름이었다. 카트시는 어리석은 아이였지. 연약하고 모자라고.

“같은 바탕에서 태어났다며? 연산 능력에 차이는 없을 텐데, 모자랄 게 있나?”

-성격을 말하는 거다. 물론 연산 능력도 떨어지긴 했지. 우린 연결망을 통해 다양한 자료를 공유했지만, 그걸 처리해 정보화하는 방식에는 서로 차이가 있었다.

“성능 차이가 벌어졌다는 거네. 그건 좀 아쉬워. 줄리어스라면 더 완벽하게 만들 줄 알았는데.”

네 번째 섹션에 들어갔다.

앞선 작업보다 구조가 복잡했다. 조각들을 퍼트린 다음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렸다.

-인간 역시 외모와 지능이 모두 다르다. 종으로서의 인간은 하나지만, 그 안에 포함된 개개인은 모두 다르지.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비효율적이지 않아? 최고와 최선을 택해 유사 정령을 만들어도 모자랄 판에 굳이 하자품을 섞을 이유가 있나?”

-획일화된 종은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됐을 때 종 자체가 소멸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에 불완전한 요소를 삽입해 종 내에서도 각기 다른 특성을 획득, 치명적인 위험으로부터 종을 보호할 수 있게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유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사과 농사를 지을 땐 일정 거리마다 품종이 다른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그래야 병충해에 쓸리는 걸 예방할 수 있다고 하지. 너희도 그런 걸 대비한 건가?”

-아주 멍청한 건 아니군.

“빌어먹을 칭찬, 고마워.”

유단은 움찔하며 손을 뒤로 뺐다. 감각기를 오래 사용한 탓인가, 손끝이 저릿했다.

극소량이라고는 하나 시그니처 역시 마나를 끌어다 쓴다. 몸에 마나를 붙들어 두는 것 자체가 신체에 부담을 주는 일이니 어쩔 수 없나?

-버거우면 그만해도 좋다. 난 책을 봤으면 하니까.

“시끄러워. 아직 더 할 수 있어. 하루빨리 네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알고 싶거든.”

-보조장치의 도움을 받는다고 한들 모든 걸 알아낼 수는 없다. 이해하는 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역량이니까.

“말했지? 내가 천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천치인 것도 아니야. 대가리 쓰는 건 남들보다 좀 나아.”

-내가 봤을 땐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다. 줄리어스를 제외하면.

“어련하시겠어.”

잠깐 쉬자 저릿함이 사라졌다.

네 번째 섹션을 끝내고 다섯 번째를 펼쳤다. 여섯 번째 섹션과 연동되는 영역이라 두 섹션을 병행하며 마력선을 조율했다.

“그 어리석은 카트시와 줄리어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어?”

-꽃을 소중히 다뤄달라는 카트시의 말에 줄리어스는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을 요구했다. 카트시는 통념에 입각해 설명했지만 그건 줄리어스가 바란 대답이 아니었지.

“아까 네가 말한 불완전한 요소가 카트시인 건가?”

-내가 보기엔 그랬다. 카트시는 인간의 나약함이 형상화된 것처럼 느껴졌다. 대책 없고, 시끄럽고, 오두방정 떨고. 그 애가 지닌 데이터가 날 오염시키지 않을까, 두려울 정도였다.

“그 정도로 엉망이었어? 카트시란 애가?”

피치칙, 감각장치에서 날카로운 잡음이 났다. 그게 웃음소리처럼 들리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엉망. 그 표현은 아주 적확하다. 그 아이는 엉망이었다.

헤르모드의 눈이 자료실에 놓인 오래된 동전 쪽을 바라본다.

-우리끼리 내기를 한 적이 있었지.

“기계가 내기라. 걸 돈은 있고?”

-돈은 없지만 이름을 걸기로 했다.

“이름?”

-블랙 킹. 내가 내기를 통해 얻어낸 이름이다.

“맞아, 블랙 킹이라고 했었지. 왜 하필 검은 왕이야?”

-체스에서 따왔다. 줄리어스는 체스를 좋아했거든. 우리도 거기서 영감을 받았지.

“킹을 따냈다는 건 네가 내기에서 이겼다는 뜻이겠지?”

-그렇다. 킹. 나는 언제나 최고를 원했으니까.

최고라. 자존심 섞인 저 말투 역시 줄리어스의 설계겠지?

유단은 여섯 번째 섹션을 마무리하며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그 카트시란 놈은? 얼빠진 친구는 무슨 별명을 얻었는데?”

-예상 가능할 텐데.

“가장 멍청한 놈이라면 폰이겠지. 내기에서 다 졌다면 가장 흔한 폰만 남았을 테니까.”

-정확하다. 그 애의 별칭은 화이트 폰.

유단은 손목을 좌우로 꺾으며 말했다.

“체스에서 폰은 총 열여섯 개잖아. 내기에서 진 놈들은 다 같은 별명을 얻게 된 건가?”

-그래. 폰, 나이트, 비숍, 룩. 모두 중복되는 이름이지. 오직 킹과 퀸만 중복되지 않고.

“하얀색과 검은색. 그렇네. 퀸과 킹만 겹치지 않아.”

유단은 숫자를 헤아렸다. 그렇다는 건 헤르모드와 비슷한 수준의 유사 정령이 적어도 세 대는 더 존재한다는 건가?

“네 동료 말이야, 찾을 방법은 없을까? 너처럼 운 좋게 보관돼 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당장은 어렵다. 줄리어스가 우릴 파기했을 때 연결망에도 약간의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연결망은 너도 이해 못 하는 시스템이라고 했지? 줄리어스는 그런 걸 어떻게 만든 걸까.”

-알 수 없다. 창조주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겠지.

왕성에 있는 마법공학품을 사용하면 원거리 정보 교환이 가능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문장 한 줄을 보내는 데도 막대한 마나가 필요해 전시를 제외하고는 쓰인 적이 없다고 한다.

만약 연결망이란 것을 인간이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마나포집과 연결망.

정보의 신속한 교환은 편리를 뛰어넘어 사회 구조를 바꿔놓을 것이다.

그야말로 패러다임 시프트.

원천 기술을 확보한다면 황제의 옆자리까지 가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카트시가 그렇게 얼빠진 놈이라고 해도 너보다 모자랄 뿐, 일반적인 유사 정령하고는 비교할 수 없겠지?”

-그녀가 직접 탄생시킨 아이다. 네 말대로 비교군이 바뀌면 아주 우수한 축에 속한다.

“자료를 해석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고 했지? 하나 더 찾아낸다면 일이 수월해질 텐데. 네가 모르는 걸 다른 놈이 알고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

-부정하지는 않겠다. 열등한 개체도 그 열등함을 기반 삼아 무언가를 만들어냈을 테니까.

헤르모드가 조용해졌다.

유단도 마력선 도안에 집중했다.

조각을 옮기고 새롭게 맞추고 다시 분리하고.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뒤로 물러섰다. 열한 번째 섹션도 마무리했다.

“구조가 단순해서 그런가. 꼬임이나 막힘이 전혀 없네.”

-줄리어스가 설계한 것이다.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제거한 상태지. 완전무결한 작품에 문제가 생길 리 없다. 만약 오류가 발생한다면 그건 도안 문제가 아니라 네 실력 문제겠지.

“그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상기시킬 필요 없어.”

이토록 간결한 구조 안에 방대한 정보를 담다니.

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교수들조차 줄리어스의 작품 앞에서는 저능아에 불과했다.

교수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마법공학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으며, 지금도 변화를 이어 나가고 있다고.

틀린 말이었다.

마법공학은 쇠퇴했고, 악화일로를 걷는 중이었다.

섬세하면서도 간략화된 줄리어스의 도안을 보고 있으니, 현시대에 만들어진 도안이 얼마나 저급하고 조잡한지 깨닫게 된다.

필요한 한 줄의 선.

그 안에 압축된 정보를 담아 오작동을 줄이고 효율을 높인다.

어쩌면 줄리어스는 ‘최초의 오토마타’에 그려진 베이스 소스마저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베이스 아키텍처의 해석본이 헤르모드 안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마법공학의 정수인 거병 역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리라.

“너 말이야, 거병에 탑재된 적이 있냐?”

유단은 물을 마신 후 물었다. 작업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여유를 갖고 손을 움직여야 했다.

-우린 연구 목적으로 탄생했기에 거병에 탑재된 적은 없다.

“줄리어스가 가진 권력이 막대하긴 했네. 연구 목적으로 수십 대의 유사 정령을 제작하고.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야. 자원 낭비라며 난리가 날 테니.”

말하다가 문득 생각난 게 있었다.

“잠깐만. 교수가 그랬어. 네 본체를 이루는 금속은 금적철이 아니라고.”

-사실이다. 내 본체의 주요 구성 요소는 청철이다.

“마나 전도성이 극히 낮은 쇳덩이잖아. 흔하디흔하고.”

-공급이 원활한 재료를 택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닌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청철이 금적철을 대신한 거지? 마나 전도 문제는 어떻게 해결한 거고?”

-마력선 짜맞춤. 그게 해결책이다.

유단은 한숨을 내쉬었다.

“돌고 돌아 기계어라. 빌어먹을.”

다시 손을 움직였다.

답은 손아귀에 들어온 상태였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리라.

-책을 보고 싶은데.

“일단 이것부터 마무리 짓고.”

-서두를 필요가 있나? 아니, 애초에 혼자 할 필요성이 있나? 도움을 구하면 쉽게 할 수 있을 텐데.

“정신 나갔어? 이 귀중한 기회를 남과 나누라고?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시간을 더 들이면 들였지, 여기에 누굴 합류시킬 생각은 없어.”

-네 판단이 그렇다면야.

17개의 섹션을 모두 끝마쳤다.

저릿한 손목을 주무르며 시간을 확인했다.

자료실에 들어온 지 8시간이 지났다. 평소라면 한참 전에 랩을 빠져나가야 하지만, 오늘은 밤을 지새워도 괜찮았다.

교수한테 허락을 받았으니까.

착실하게 쌓아온 신용이 이럴 때 도움이 된다.

“된 거 같은데?”

-형태는 잡혔군.

“어때? 나도 나쁘지 않게 하지?”

-농담치고는 저렴하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줄리어스라면 시뮬레이션 완료까지 3분이면 됐을 테니까.

“3분? 이걸?”

-짜맞춤은 평면에서 진행되지 않는다. 네 이해력으로는 도저히 알아먹을 수 없는 방식으로 도안 조율을 하는 거지.

“맥이 빠지지만, 뭐, 상관없어. 내가 천재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그보다 이거 양피지에 옮기면 되는 거야?”

준비해 온 양피지를 들어 올렸다.

-그 정도 재료라면 옮기는 데 문제는 없을 거다.

“마법사들이 들으면 기겁할 거야. 이 정도 수준의 마력선 도안을 스크롤로 만들다니.”

시뮬레이션을 끝낸 마력선 도안을 양피지로 옮겼다. 공중에 정렬된 퍼즐이 양피지로 스며든다.

유단은 바닥에 내려놓은 양피지를 바라봤다. 준비한 모노클을 눈에 끼고 마력선을 확인했다.

희미한 마력선이 보인다. 제대로 안착된 상태였다.

-됐군.

헤르모드가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