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4화
유단은 감각장치에 연결된 커넥터를 하나 뽑아내 가시화 패드에 연결했다.
“어때? 연동할 수 있겠어?”
-감각장치도 그렇고 가시화 패드마저 저급하군.
“줄리어스가 만든 것보다야 못하겠지만, 못 쓸 정도는 아니니까 잔소리 말고 해봐. 설마 이 정도도 해결 못 하는 건 아니겠지?”
오래된 감각장치도 별도의 조정 없이 사용했다. 헤르모드라면 구형 가시화 패드도 쓸 수 있으리라.
-문자를 표기해 보겠다.
유단은 가시화 패드에 눈길을 주었다.
줄리어스.
살짝 뭉개지긴 했지만 알아볼 수는 있었다.
“잘 되네.”
-해상도가 처참한 수준이군. 보정이 필요하다.
글자가 뒤틀리다가 다시 정렬됐다. 훨씬 깔끔해진 글씨체였다. 어린아이가 휘갈긴 글씨에서 정성 들여 쓴 필체로 바뀌었다.
“좀 나아졌네.”
-아직도 부족하다. 마력선 도안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해상도가 중요하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이번엔 안구를 연결해볼게.”
-그것까지 구해 온 건가?
“다 방법이 있지.”
교수에게 연구 목적으로 양도받은 안구를 유사 정령에 연결했다.
“모듈이 작다고는 해도 마나 소모량이 꽤 될 텐데, 그 마나포집이란 시스템으로 감당할 수 있어?”
-연결해놓은 감각장치에도 따로 모아둔 마나가 있다. 장비 운용에 어려움은 없을 정도로.
“너보다 그 시스템이 더 탐나네. 그것도 내가 구현할 수 있을까?”
-마나포집은 우리가 고안해낸 시스템이다. 내가 돕는다면 너 역시 만들어낼 수 있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야.”
안구가 부르르 떨리더니 좌우로 천천히 움직였다. 연구 자료실 안을 훑던 눈동자가 유단에게 향했다.
-내 본체가 이런 곳에 있었군.
“넌 그나마 나은 거야. 다른 골동품들은 땅 밑에 있거나, 분해돼 사라졌거나 둘 중 하날 테니.”
-골동품.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현 상황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래, 난 골동품이지.
“주제 파악이 빠른 건 바람직한 일이야.”
유단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움직이는 사물도 관찰할 수 있겠지?”
-해상력이 떨어지긴 하지만 내 연산으로 보충할 수 있다. 시간을 들여 관찰하고 유사성을 발견하면 보다 확실한 이미지를 얻어낼 수 있지.
“학습. 그래, 너 잘났다.”
유단은 탄드라 교수와의 대담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감정이 있다고 했지?”
-있다고 한들 안 믿을 테고, 없다고 한들 의심할 테니 내 대답은 가치가 없다. 네가 원하는 바를 믿어라. 그게 속 편할 테니.
“틱틱거리긴. 감정이 있다는 건 그걸 느끼는 주체가 있다는 거잖아? 넌 너 자신을 인식할 수 있어?”
-너와 얘기하는 내가 여기 있다. 생각하는 내가 여기 있다. 더 필요한 게 있나?
“감정도 있고, 의지도 있고, 인식도 있다면 영혼은 어때? 너한테도 그게 있는 걸까?”
-……영혼. 내 안에 내제된 영혼을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실패했지. 영혼세계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그 방대한 정보는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말은 그럴싸하네.”
헤르모드의 눈동자가 유사 정령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때? 네 몸을 직접 보니까.”
-별다른 감흥은 없다. 수없이 봐왔으니까.
“그런 쇳덩어리 안에 영혼이 존재한다면, 저기 사물함은 어때? 캐비닛은? 저기에도 영혼이 있지 않겠어?”
-……저것들은 사고하지 않는다. 나와는 다르지.
눈동자가 유단을 향했다.
-말장난은 다 끝났나? 우린 해야 할 일이 많을 텐데.
“내가 실수했네. 네 말대로 갈 길이 바쁜데 말이야.”
유단은 고개를 돌리며 픽 웃었다.
입력된 자료를 토대로 말할 땐 거침없이 말하던 헤르모드가 자의식과 영혼에 관해 말할 땐 대답 속도가 느려졌다.
기계의 한계가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자, 파트너. 네가 원하던 거야.”
유단은 책을 들어 올렸다.
-어떤 내용이지?
“나타 왕조의 역사. 도서관 사서한테 물어보니까 이걸 추천해 주더라고.”
-내가 살던 시대를 후대가 기록한 거군. 흥미로워.
“마음에 들어?”
헤르모드의 안구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방금 그게 긍정의 의미야?”
-그렇다.
“말로 하면 될 것을.”
-인간들도 제스처를 취하지 않나? 나도 그렇게 했을 뿐이다.
“너 말이야, 인간을 닮고 싶은 거야?”
-창조주를 선망하는 건 모든 창조물의 공통점 아닌가? 인간이 신을 섬기듯이 말이야.
“인간과 신이라. 고철덩이, 저번에도 물었던 것 같은데… 넌 뭘 하고 싶은 거야?”
-내 탄생 목적은 줄리어스를 돕는 것이었다. 그다음은 학습하는 것이었고. 줄리어스가 사라졌으니 남은 목적을 수행해야지. 자료 수집과 정보화.
“시답잖네.”
-정신이상자가 듣기엔 그럴지도 모르지. 알량한 복수를 꿈꾸는 인간보다야 훨씬 건설적인 목표 아닌가?
“복수 같은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말귀를 못 알아먹어!”
팅, 손에 잡힌 공구로 유사 정령 본체를 툭 쳤다.
“그래도 너란 놈이 편하긴 해. 그 숨기지 못하고 다 드러내는 멍청함이 마음이 놓이거든.”
-인간은 그런 면에서 불쌍하지. 서로를 깊은 바닥까지 이해할 수 없으니까. 우린 다르다. 우린 깊은 곳까지 공유할 수 있으니.
“기계니까. 부품 하나하나 내보이며 이게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지. 근데 인간은 달라. 인간한테는 엿 같은 감정과 영혼이 있다고. 너희와는 달리.”
-난 감정을 알고 있다.
“그래, 그래. 넌 알고 있어. 알고 있을 뿐이야.”
탄드라 교수의 말대로 ‘감정’이란 인간의 반응을 이해할 뿐, 헤르모드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애초에 느낄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으니까.
만약을 대비해 조사하고 교수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모든 교수가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기계가 자유의지를 얻고 감정을 갖게 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거짓말 역시 불가능하다. 거짓말이란 개념은 알고 있지만 그걸 행할 의지가 없다. 제작자가 집어넣지 않았을 테니까.
마지막 의심의 보푸라기가 날아갔다. 남은 건 사실만 실토하는 기계를 잘 이용해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작해볼까?”
-책은 언제 보여주는 거지?
안구가 책상에 놓아둔 책으로 향했다.
“파트너라며? 내가 눈도 달아주고 표현장치까지 제공해 줬는데, 너도 뭔가 내놓아야 하지 않겠어? 우린 사업 파트너니까.”
-이상하군. 그건 어디까지나 네 이익을 위해서일 텐데.
“내가 잘되는 게 네가 잘되는 길이지.”
-인간의 논리는 괴이하군. 하지만 거래는 합리적이다. 보안책임자가 아닌 이상 내게 강제할 권한은 없으니, 좋다. 거래를 하지.
“거래 좋지.”
유단은 유사 정령을 가볍게 매만졌다.
“기계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보조해주는 장치. 우선 그걸 만들어야 할 텐데.”
-가시화 패드에 도안을 띄우겠다.
패드 중앙에 굵은 선이 나타났다.
유단은 패드를 유심히 살폈다. 선이 분열해 수백 가닥으로 나뉘었다.
“복잡하네.”
-걱정하지 마라. 네 지적 수준에 맞춰서 재구성 중이니까.
밀집해 있던 선들이 서로 나뉘더니 단순한 형태로 바뀌었다.
-총 열일곱 개의 섹션으로 나누었다.
“이걸 합치면 된다 이거지?”
-가능하겠나?
“해봐야 알지. 일단 감각기로 시뮬레이션 해볼게.”
입 안이 살짝 마른다. 구조를 단순화했다고는 하나 그어야 할 선의 개수가 너무 많았다.
시그니처를 불러내 첫 번째 섹션부터 마력선을 그었다. 퍼즐 조각으로 변화된 마력선으로 완성된 형태를 만들어 나갔다.
-제법 깔끔하군.
유단은 작은 조각을 옮기며 물었다.
“줄리어스의 시그니처는 어땠어?”
-그녀는 시그니처라 할 만한 제작 툴이 없었다.
“그러면 마력선 조율을 어떻게 한 거야?”
-내가 말한 기계어 보조장치를 착용하고 그대로 조율했다. 그녀한테 감각기는 쓸모없는 물건이었지.
“뛰어난 지능에 비상한 감각이라. 네 말대로 완벽한 인간이었네. 게다가 냉철함까지.”
-줄리어스가 살아 있었다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유단, 줄리어스에 관한 정보는 여전히 얻지 못 했나?
유단은 찝찝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호기심이 생겨서 좀 더 알아보려고 했어. 기록보관서를 제외한, 내가 갈 수 있는 도서관과 자료실을 전부 뒤적거려 봤는데… 쓸 만한 건 건지지 못했어.”
-쓸데없는 거라도 좋다. 창조주에 관한 걸 알 수 있다면 좋겠군.
“그래도 낳아준 사람이라고 궁금하긴 한가 봐? 인간한테 관심은 없다면서.”
-내게 생명을 준 여자니까.
“생명. 그래, 빌어먹을 세상이라도 살아 있게 해준 것에는 감사해야지.”
유단은 두 번째 섹션으로 넘어가며 말했다.
“큰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냈어. 그리고 역대 판결문 같은 것도 찾아냈는데, 거기에 줄리어스의 이름이 있었어.”
-판결문? 줄리어스가 재판을 받은 건가?
“거기까진 모르겠어. 자세한 기록은 없거든. 그리고 동명이인일지도 모르고. 수백 년 전이야. 게다가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망해버려서 뭐 하나 제대로 남은 게 없고.”
-지진이라. 예측 가능한 재해 중 거대한 지진이 있긴 했지.
유단은 휘파람을 불며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태풍이나 지진 같은 건 신의 뜻 아니었어?”
-이해할 수 없기에 신의 뜻이라 여기는 거다. 자연은 신이 아니다.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일 뿐.
“흥미롭네. 거대한 에너지라면 이용도 할 수 있고?”
-거기까지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이해하기엔 너무나도 거대한 것이니까.
“병신아, 그런 걸 보통 신이라고 하는 거야.”
-머저리들의 변명이란 항상 그런 식이지.
풋, 작게 웃으면서 완성한 두 개의 섹션을 시뮬레이션 해봤다.
감각기로 흘러든 희미한 마나가 완성된 퍼즐을 따라 움직였다.
유단은 한걸음 물러서서 전체적인 그림을 살폈다.
“일단 막힘은 없네. 꼬임도 없고.”
-내가 봐도 문제점은 없군.
“근데 이 구조가 뭘 의미하는지는 전혀 모르겠네. 마력선은 제작자의 해석이 없으면 알아먹을 수가 없으니까.”
-해석이라면 여기 있다.
가시화 패드에 글씨가 떴다.
첫 번째 섹션은 마나의 형질변환, 두 번째 섹션은 물리적인 접촉을 통한 마나 교류를 지원한다고 쓰여 있다.
“이거에 관한 이론은…….”
-물론 제공할 수 있다.
화면이 바뀌었다.
예상한 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수식과 문자, 그리고 선의 조합이 나타났다.
“몇몇 개는 지금도 쓰는 거라 이해하겠는데, 이 재수 없게 꼬여 있는 놈은 뭐야?”
-설명이 필요한가?
“배경지식 없어도 알아들을 수 있어?”
-어렵군.
“그럼 됐어. 차차 이해하면 돼. 이걸 완성하면 좀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겠지.”
마나 흐름에 문제는 없었다.
첫 시작이 좋았다.
“헤르모드. 줄리어스 얘기나 좀 해봐.”
-줄리어스? 어떤 얘기를 원하지?
“그냥. 아무거나. 그 여자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아두면 좋잖아? 나중에 곤란한 선택지가 나타났을 때 참고할 수도 있고. 발상은 자잘한 걸 알아두는 것에서 시작하는 거니까.”
귀를 열어둔 채 세 번째 섹션을 살필 때였다.
헤르모드가 서두를 뗐다.
-어느 날 그녀가 연구실로 꽃을 가져왔다. 이름 모를 꽃집 여자애가 줬다고 하더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