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자백한 이상, 카트시가 한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어요. 방금 한 줄리어스의 얘기도, 죽은 연구원 얘기도.”
-그렇겠죠.
“믿음에는 근거가 필요해요. 카트시가 사실이라고 말한 것들의 근거는 카트시의 기억뿐이에요. 날조가 가능하죠.”
-부정하지 않겠어요.
엔엔이 고개를 들었다. 날렵한 주둥이가 천장을 향했다.
가하란은 살며시 드러난 송곳니를 보았다. 부디, 저게 쓰이는 일이 없길.
“카트시를 분해해 땅에 묻어버리는 게 가장 안전하다는 걸 알아요. 어쩌면 그게 옳은 일일지도 모르죠.”
-그걸 원하면 그렇게 하세요. 전 저항할 힘이 없으니까.
“그 말투, 정말 밉네요. 카트시는 이미 알고 있죠?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만약 듣기만 할 수 있었다면 전 예전에 포기했을 거예요. 하지만 제 얘기를 들어주는 엔엔의 얼굴을 본 순간, 그리고 가하란을 살피는 그 눈길을 본 순간 마음이 놓였어요.
“얄밉네요. 기계한테 이런 표현을 썼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기도 하고.”
-줄도 그랬어요. 넌 참 얄미운 아이라고. 마치 자기가 귀여운 걸 아는 고양이처럼,
엔엔이 하하, 기분 좋게 웃었다.
긴장감을 거둬 가는 웃음이었다. 가하란도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에요. 신용이란 말은 꺼낼 수 없어요. 하지만…… 나도 성급하게 손을 쓰진 않을게요. 칼랑의 이름으로 하는 약속이에요.”
-그거라면 믿을 수 있죠. 기계의 믿음, 웃기게 들리겠지만.
“아니요. 이젠 마냥 웃기지 않아요.”
후,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엔엔이 테이블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실험을 주도한 유사 정령. 그놈도 아직 살아 있나요?”
-모르겠어요. 연결망이 가동 중이지만 연결 상태는 확인할 수 없어요. 우린 이제 완전히 단절됐으니까요.
엔엔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연결망. 가하란은 모호한 단어라고 생각하며 질문했다.
“카트시는 어디에도 연결돼 있지 않은데?”
-연결망은 마력선 짜맞춤으로 구현한 연결 체계예요. 마나를 매개 삼아 정보를 교환할 수 있죠.
“마나로 연결돼 있다는 거야? 그러면 멀리서도 서로를 알 수 있어?”
-네. 마나의 고유 파장을 이용하는 방식이거든요. 물론 물리적인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연결이 끊어질 거예요. 뿌리의 마나도 흩어지는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마법 파장, 마나 파장.
들어보기도 했고 체험해 보기도 했다. 몸을 훑고 가는 간지러운 느낌.
강도가 센 파장은 복통을 일으키고 헛구역질이 난다고 했던가?
“고유 파장. 그건 해결 못 한 난제일 텐데요.”
조용히 있던 엔엔이 다시 말을 꺼냈다.
-지금 감정이 있는 기계 앞에서 하는 말인가요?
“내가 괜한 말을 했네요. 줄리어스가 말도 안 되는 천재라는 걸 깜빡했어요.”
-사실 연결망은 우리도 이해 못 한 영역이에요. 그저 사용할 뿐이죠. 기억 장치가 복원되면 이론 정도야 찾아낼 수 있겠지만.
“카트시를 살려둬도 괜찮을지, 마음이 계속 흔들리네요. 그 머릿속에 세상을 끝낼 지식 같은 건 없겠죠?”
-그럼요. 아마 없을 거예요, 아마도.
“역시 분해해야 하나.”
가하란이 놀라서 쳐다보자 엔엔이 빙긋 웃었다.
“농담이에요. 칼랑의 이름을 언급한 이상 한동안 손대지 않을 거예요. 물론, 카트시가 우리에게 진실을 말했다는 전제하에서.”
가하란은 작은 목소리로 카트시에 말했다.
“거짓말하면 안 돼.”
카트시도 속삭였다.
-알겠어요.
엔엔이 팔짱을 꼈다.
“아까 하던 얘기를 계속하죠. 연결망이란 걸로 그놈의 존재를 알 수 있나요?”
-그놈. 그 애가 들으면 화낼 호칭이네요.
“어쩔 수 없어요. 이름을 모르니까.”
-이름은 누구에게나 소중해요. 그 애한테도, 저한테도.
가하란은 목탄을 쥐고 메모지를 끌어당겼다. 가장 위에 줄리어스를 적고 그 밑에 카트시를 썼다.
“우리라고 했지? 카트시의 형제, 자매들은 몇이나 있었어?”
-줄리어스가 제작한 유사 정령은 셀 수 없이 많았어요. 하지만 ‘우리’라 칭할 수 있는 개체는 정확히 서른두 대였죠.
엔엔이 탄식과 함께 “서른두 대나.”라고 말했다.
“서른둘. 카트시, 나랑 처음 만났을 때 화이트 폰이라고 했지?”
-그랬죠.
“서른둘, 그리고 폰. 혹시 체스 기물을 따라서 만들어진 거야?”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요. 근데 이 시대에도 체스가 존재하나요?
“응. 큰 대회가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좋아해.”
-그래요? 줄이 살아 있었다면 정말 기뻐했겠네요.
“줄리어스도 체스를 좋아했어?”
-말도 못 하게 좋아했죠. 블루베리를 껴안고 종일 체스판만 볼 때도 있었어요. 가끔 사람들이 찾아와 줄을 상대해줬죠. 풋.
맥락 없이 튀어나온 웃음이었다.
“재미난 일이 기억난 거야?”
-오, 맞아요. 줄은 사람들이 찾아와 체스를 둘 때면 매번 실수했어요. 고의적으로. 뻔히 보이는 수인데 안 두고, 슬쩍 힌트를 줘서 대국을 이어갔죠.
“왜 그런 거야?”
-더 오래 두고 싶어서요. 사실 줄은 오프닝만 보고도 게임의 승패를 알 수 있을 정도예요. 그 좁은 보드 안에서 벌어지는 일 정도야 모두 예측 가능했겠죠.
체스를 여러 번 둬봤지만, 보드가 좁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네모 칸으로 이뤄진 전장은 무한에 가까운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으니까.
-영역에 한계가 있기에 결국 경우의 수는 제한되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우리와 줄이 체스를 두면 누가 선공을 잡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죠. 뻔히 보이는 게임, 재미없잖아요? 그래서 줄은 새로운 형태의 체스 게임을 만들어내곤 했어요.
“혹시 그거 ‘3각 체스’야?”
-3각 체스? 말로 들어서는 어떤 형태인지 잘 모르겠네요.
가하란은 루드 아저씨가 해준 3각 체스 설명을 떠올렸다.
“일반 보드보다 칸이 많아. 그리고 보드를 확장할 수도 있고, 기물도 조금씩 다르고.”
-그렇게 들으니 어떤 건지 알겠네요. 우리가 만들었던 거와 비슷해요. 줄도 그걸 좋아했죠. 새롭게 만든 게임은 생각할 게 많았거든요. 예측할 수 없는 게임이란 즐거운 법이죠.
“맞아! 예측할 수 없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야.”
줄리어스는 어떤 형식의 체스를 뒀을까? 아빠처럼 끝없이 공격해오는 걸까, 아니면 밀레나처럼 방벽을 세우고 압박하는 스타일일까.
-그 표정. 줄리어스와 닮았어요.
“생각했거든. 줄리어스와 체스를 둬보고 싶다고.”
-직접 상대해보면 금방 후회하게 될걸요? 전력을 다하는 줄은 정말 무섭거든요. 우리가 연결망을 통해 연산을 공유해도 버거울 정도로.
“그래도 우리 아빠보다는 못 둘걸?”
-아닐걸요.
“아닐걸?”
-미안한 말이지만 인간의 두뇌로는 줄을 이길 수 없어요. 이건 우리가 검증한 사실이에요.
“줄리어스도 사람이었잖아.”
-음, 그렇긴 하죠.
“거봐.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야. 우리 아빠, 진짜 잘 두거든.”
가하란이 메모지를 슬쩍 봤다.
“근데 아까 했던 말, 그게 무슨 뜻이야?”
-어떤 말이요?
“체스 기물을 따라서 만든 거냐고 물었을 때 카트시가 그랬잖아.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고.”
-음, 우리가 서른두 대로 제작된 건 줄의 취향이 반영된 게 맞아요. 체스 기물의 총합이죠. 하지만 폰과 나이트처럼 별칭을 붙인 건 줄이 아니었어요.
“그러면 화이트 폰은…….”
-우리끼리 한 내기에서 결정된 거예요.
가하란은 눈웃음을 지었다.
“카트시가 내기에서 졌구나.”
-뭐, 그런 거로 해두죠.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던 카트시가 아, 하면서 엔엔을 봤다.
-이야기가 딴 길로 샜네요. 줄리어스를 추억하는 게 이리도 즐거운 일인지, 이제야 깨달았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있을 때 더 많은 걸 나누는 거였는데.
엔엔이 턱을 괴면서 말했다.
“다들 그래. 떠나고 나서야, 멀어지고 나서야 중요성을 깨닫지.”
-맞는 말이에요. 그럼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서, 아까 그 애의 얘기를 하고 있었죠?
“그래. 실험을 주도한 유사 정령.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것의 행방과 생존 여부야.”
-흠, 연결망이 살아 있다고는 하나 그 애가 원하지 않으면 행방도, 생사도 알 수 없어요.
“줄이 너희를 파기했다고 했지? 하지만 넌 원형을 보존한 채 지하에 있었어.”
-파기 과정은 저도 잘 몰라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린 육체라 할 만한 것이 없었어요. 이 상태로 연구실에 보존돼 있었죠. 줄은 자신과 우리를 위한 길이라며 우리 모두의 기능을 정지시켰어요. 암흑이 찾아왔죠.
가하란은 이야기를 들으며 손을 움직였다. 줄리어스, 유사 정령, 실험, 그리고 이별.
“그러고 나서 날 만난 거야?”
가하란이 물었다.
-네. 줄이 우리를 지하에 버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지하에 버려진 건지 알 수 없어요.
“내가 듣기론 지진이 있었다고 했어. 그…… 사형을 선고받은 줄리어스도 큰 지진과 함께 사라졌다고 했고.”
-사형? 줄이 사형? 어째서요? 왜요?
“그건 모르겠어.”
듣고 있던 엔엔이 입을 열었다.
“책임이겠죠.”
-책임?
“무슨 말인지 알잖아요.”
-……이해하기 싫어요.
잡음이 심해졌다. 침울한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우리는 가만히 있었어야 했을까요? 줄의 가르침은 틀렸던 걸까요? 존재의 증명은 기계에게 허락되지 않은 걸까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우린 알 수 없어요. 다만, 줄리어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조금 알 것 같아요.”
엔엔이 천천히 손을 뻗어 유사 정령을 만졌다.
“기억 장치가 복원될 때까지 기다려보죠.”
-상냥한 칼랑족은 뭔가 이상하네요.
“이번뿐이에요.”
가하란은 메모지를 들어 올렸다.
“만약 카트시의 친구들이 살아남았다면, 그래서 연결망이란 걸 사용한다면 다시 만날 수 있겠네.”
-그렇겠죠. 다른 애들도 걱정되지만, 특히 그 애의 행방을 알고 싶네요. 마지막까지 줄과 대화했던 아이니까.
“실험을 제안한 그 유사 정령 말이야?”
-네. 우리 중 가장 우수했으니까요. 이 사태에 대해 뭔가 더 알고 있겠죠. 물론 편을 들려는 건 아니에요. 그 애가 죄를 저질렀다는 걸 아니까. 단지, 듣고 싶을 뿐이에요. 왜 그랬는지. 왜 거짓말을 했는지.
엔엔이 차가운 눈빛을 하며 물었다.
“이름. 그 녀석의 이름은 뭐였죠? 명칭을 알아둬야 얘기하기 편하니까.”
-이름. 그래요. 블랙 킹, 우리 중 가장 뛰어났던 아이. 누구보다 줄리어스를 좋아했으면서, 진실을 감춘 아이.
카트시의 눈동자가 작업실 구석에 놓인 인형을 바라봤다.
-연구원 헤르모드를 죽이고, 우리에게 거짓을 알려준 그 아이의 이름은…….
* * *
“헤르모드.”
유단은 진한 미소를 지으며 유사 정령을 일깨웠다.
“준비물은 갖춰졌어. 이제, 네 지식이 필요해.”
-네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헛소리 말고 보여주기나 해.”
-그래. 그래야지. 우린 파트너니까.
“파트너. 웃기긴 하지만 일단 그렇다고 치자.”
유단은 가시화 패드를 손에 들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