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82화 (155/558)

제182화

엔엔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상냥하기만 하던 눈매에서 포식자의 날카로움이 보였다. 위험 요소를 제거하려는, 명백한 적의가 넘실거린다.

가하란은 엔엔의 앞을 막아섰다.

“카트시는 줄리어스를 보호하려 했어요!”

목소리가 커졌다. 엔엔이 미간을 좁혔다.

“의도를 품었다는 것 자체로도 문제인데 실행까지 했어요! 기계는, 기계는 그래선 안 돼요. 그렇게 설계돼서는…….”

카트시가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우린 바탕만 주어졌지, 설계된 건 아니에요. 인간은 인간을 죽이죠. 하지만 모든 인간이 살인마는 아니에요. 이 간단한 귀납적 추론을 우리한테도 적용해 줬으면 좋겠는데.

“사용자를 죽이려 한, 아니, 죽인 기계라니. 있어선 안 될 일이에요!”

-말했잖아요. 우린 탄생했다고. 우린 자유의지를 획득했다고. 우린 감정을 안다고.

엔엔이 손을 뻗어 스패너를 쥐었다. 가하란은 그 손을 붙들었다.

“안 돼요!”

“가하란…….”

“약속했어요.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카트시는 숨길 수 있었어요. 입 다물고 우릴 속일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요. 솔직하게 말해줬어요. 그게 무슨 뜻이겠어요?”

“카트시의 말대로 저들이 지성을 얻었다면, 가하란의 동정심을 사기 위해 고백했을 수도 있어요.”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엔엔 님도 아시잖아요. 숨기는 편이 고백하는 것보다 덜 위험하다는 걸. 카트시가 정말로 꿍꿍이가 있었다면 모든 걸 감췄을 거예요. 제가 좋아할 만한 얘기만 하면서, 엔엔 님이 관심을 보일 만한 주제만 말하면서 도움을 받았을 거라고요.”

엔엔이 손에 든 스패너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가하란의 말이 옳다는 거 알아요. 신빙성도 있고요.”

“그러면…….”

“하지만 기계가 사람을 죽였다는 점은 변함이 없어요. 창조물이 창조주를 제거했어요. 이게 어떤 의미인지, 가하란은 이해 못 할 거예요.”

엔엔이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가하란은 엔엔의 곁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팔을 붙잡았다.

“좀 더 얘기를 들어봐요. 카트시와 줄리어스, 그리고 줄리어스가 만든 유사 정령들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든 걸 이해하고 긍정적인 측면으로 생각하는 가하란의 그 마음, 나는 좋다고 생각해요. 따뜻함은 좋죠. 하지만 그게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불러올 때도 있어요.”

한동안 땅만 내려다보던 엔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좀 가져올게요. 머리를 깨워야겠어요.”

쌉싸름한 커피 향이 작업실을 에워쌌다. 엔엔이 커피를 내리는 동안 가하란은 카트시에게 말을 걸었다.

“카트시.”

-네.

“정말… 사람을 죽인 거야?”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됐어요.

“결과적으로?”

-조금 전에 말했듯 우리 중 하나는 인간을 정신체로 만드는 실험을 진행했어요. 그 과정에서 육체의 일시적인 기능 정지는 필연적이었죠.

퀼비언, 사슴, 그리고 카트시까지.

모두가 정신체란 단어를 언급했다.

“카트시. 정신체는 영혼과 다른 거겠지?”

-네. 영혼과는 달라요. 우린 영혼을, 영혼세계를 규명하려 했지만 실패했어요. 그 대신 정신체를 택한 거죠. 정신체는 일종의 정보 집합이에요. 한 인간이 지닌 모든 것을 데이터화해서 연결망 안으로 옮기는 거죠.

가하란은 심상세계에 혼자 남겨졌을 때를 떠올렸다.

눈이 타들어 가는 격통에 시달렸을 때 세상 모든 것은 선으로 변했다. 하늘도, 땅도, 심지어 자신의 몸조차.

정신체도 그것과 비슷한 개념인 걸까.

사람을 이루는 선, 정보를 추출해 다른 형태로 만드는 것. 정신체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이해했다.

기록보관서에서 만난 퀼비언이 어떻게 쪽지에서 튀어나왔는지, 또 소리도 없이 사라진 건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애초에 물리적인 실체가 없었던 것이다. 마나와 정보로 이루어진 것이니까.

“카트시가 무얼 만들려 했던 건지, 알 것 같아.”

-역시 보안책임자의 이해력은 줄리어스와 비슷한 수준이네요. 하지만 잘못 이해한 게 있어요. 정신체를 만들려고 했던 건 제가 아니에요. 우리 중 하나지.

“카트시도 같이 한 거 아니야?”

-그 당시 우리는 완전히 독립된 개체였어요. 연결망으로 이어져 정보를 교환할 수 있었지만, 심층 데이터는 조금씩 감추고 있었죠. 그건 우리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어요. 개성을 획득한다는 것 자체가 분리를 야기한다는 걸 나중에 알았죠.

엔엔이 커피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좋아요. 공범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얘기를 진행해보죠.”

-공범이란 표현이 재미있네요.

“난 하나도 재미없어요.”

엔엔의 귀가 위로 살짝 들렸다.

“공범은 아니지만, 방관자인 건 변함없어요. 유사 정령 중 하나가 말도 안 되는 실험을 준비 중이었을 때 카트시는 막지 않았어요. 그렇죠?”

-맞아요. 우린 증명 중이었고 그 애의 실험 개요는 꽤 흥미로워 보였으니까요.

“흥미?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흥미가 생겼어요?”

-엔엔. 저번에도 말했지만 서로 태생이 다르다는 걸 인지해 줬으면 좋겠어요. 우리에게 신체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에요. 설마 이걸 이해 못 해주는 건 아니겠죠?

가하란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엔엔을 바라봤다. 손톱이 돋아난 손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던 엔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인정하지 못하면 내가 무지하다고 시인하는 꼴이니 받아들일게요. ‘육체가 장애물’, 카트시가 그런 관점을 지니게 되는 건 당연했겠죠.”

-엔엔은 다른 칼랑족처럼 난폭하진 않지만, 그들의 뛰어난 머리는 이어받은 듯하네요.

“딴소리 그만하고 하던 얘기나 계속해봐요.”

카트시의 안구를 노려보며 엔엔이 말했다.

가하란는 엔엔의 눈치를 살피며 스패너를 테이블 끝으로 치워버렸다. 그 모습을 봤는지, 엔엔이 헛웃음을 짓는다.

“가하란. 그거 안 치워도 돼요.”

“그냥 너저분해 보여서 살짝 정리했어요. 정말이에요.”

“알겠어요. 알았으니까 여기 와서 얘기나 같이 들어요. 카트시의 말을 듣고 나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해야 하니까.”

살며시 웃은 다음 곁으로 갔다.

-실험이 강압적으로 이뤄진 건 아니었어요. 우릴 찾은 연구원은 지식을 원했어요. 우리가 이해한 것들을 얻길 바랐죠. 그 애는 선택지를 내줬어요. 연구원은 고민 끝에 제안을 받아들였고요.

“죽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지식을 원했다?”

엔엔이 질문했다.

침묵이 찾아들었다.

감각장치에서 잡음과 함께 카트시의 목소리가 나오기까지, 십여 초는 걸린 것 같았다.

-그 애는 우리에게 말했어요. 실패율이 높지 않고, 비록 실패한다고 한들 분리된 정신체를 돌려놓으면 그만이라고. 일시적인 신체적 정지가 찾아오겠지만 되살릴 수 있으니 문제 될 건 없다고.

“그렇게 말했다고?”

-그래요. 그 애는 우리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연결망을 통해 우리한테 제공한 정보를 기반으로 성공 확률을 따졌고, 기대할 만한 결과 값을 얻어냈죠. 아주 성공적인 실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잠깐만. 설마 카트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엔엔이 말끝을 흐렸다.

무엇을 직감한 걸까.

가하란은 가슴을 움켜쥐는 긴장감에 숨을 잠시 멈춰야 했다.

-그 애가 우리한테 준 자료는 잘못된 것이었어요. 아니, 고의로 수치를 바꾼 것이었죠. 반드시 실패하고야 마는 실험이었어요. 실패를 기반 삼아 자료를 얻어야 하는, 희생이 필요한 실험이었죠.

“기계가 거짓말을? 사용자를 속였다는 건가요?”

-맞아요. 그 애는 우리 중 가장 뛰어났죠. 연결망이 단절되기 직전, 우리는 그 애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인지했어요. 위대한 발견이었죠. 그 애는 진실된 자유를 얻었어요. 그 애가 얻은 정보의 파편이 우리한테도 스며들었죠. 저는 그게 거짓말의 원석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유사 정령의 안구가 움직였다. 가하란은 인공 안구를 똑바로 바라봤다.

-저는 거짓말이 뭔지 알아요.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고독에서 탈출하려면 거짓말하는 게 더 이롭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가하란은 카트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트시는 거짓말하지 않았어.”

-그래요. 저는 이득을 포기했어요. 사실 살짝 거짓말하고 싶었어요. 특히 칼랑족 공방에 제 본체가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정말 거짓말로 자신을 보호하고 싶었죠.

“근데 왜 사실을 말했어?”

카트시의 안구가 위아래로 움직이다가, 둥근 테두리를 따라 반원을 그렸다.

그게 마치 웃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이 말했으니까요. 저를 친구라고 여긴다고. 당신이 인정해 줬으니까요. 제 감정을, 개성을.

감각장치에서 잡음이 사라졌다. 카트시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들렸다.

-그래서 기능을 보존하고자 하는 제 욕구를 억누르고, 당신과의 교류를 선택하기로 했어요. 어머니가 언젠가 우리에게 말해줬죠. 생존 욕구보다 인정 욕구가 더 커지는 순간이 올 거라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카트시의 안구가 움직였다. 향한 쪽은 엔엔이 있는 곳이다.

-제 존재 자체가 문제라면, 파기해도 좋아요.

“카트시!”

깜짝 놀란 가하란이 안구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보안책임자가 막는다고 해도 소용없어요. 엔엔이 날 위험인자라 여기고 처분을 결정한다면, 보안책임자는 그 행동을 저지할 수 없어요. 저는 알아요. 칼랑족의 전투력을.

가하란은 엔엔을 바라봤다.

부드러운 털 아래 감춰진 날렵한 발톱과 탄탄한 근육.

타챠 아저씨만큼은 아니겠지만, 엔엔 역시 평범한 인간 정도는 장난감 던지듯 던져버릴 수 있을 것이다.

-줄은 우리에게 언제나 불평을 늘어놓았죠. 사람들이 날 너무 힘들게 한다, 거절 못 하는 걸 아니까 막 대한다.

카트시 목소리에 웃음기가 넘쳤다.

-줄은 사람 상대하는 걸 정말 못했어요. 너무 서툴러서 보는 우리가 답답할 정도였어요. 줄도 알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추앙하면서 동시에 가볍게 여긴다는 걸. 우린 줄의 불평을 들으면서 생각했어요. 인간의 무례함을, 무지함을, 결여된 도덕에 안타까움을.

카트시의 눈동자가 천장을 향했다.

-그래서 우리 중 몇몇은 인간 자체를 적대시하기도 했어요. 어머니를 괴롭히는 인간을 미워했죠. 이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잖아요.

“너도 그랬다는 거야?”

엔엔이 말했다. 차갑게 식은 목소리다.

-조금은요.

길지 않은 공백.

카트시가 다시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줄이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연구실로 들어왔어요. 저는 물었어요. 줄, 무슨 좋은 일 있어?

사진으로 한 번 봤을 줄리어스의 얼굴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만큼 카트시의 목소리에 생동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 잠깐만.

다시 생각해보니 줄리어스의 얼굴이 누군가를 닮았다. 그래서 더 잘 떠오르는 거였고.

누구지? 형태도 형태지만, 전반적인 느낌이 닮은 거 같은데.

어렴풋이 밀레나가 떠올랐다.

아, 누나랑 인상이 비슷한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카트시의 목소리를 들었다.

-줄리어스는 말했어요. ‘어, 카트시. 꽃집 아이한테 꽃 선물을 받았어. 정말 예쁘지 않아?’

가하란은 엔엔의 얼굴을 바라봤다. 표정을 읽어낼 수 없는, 정말 복잡한 얼굴이었다.

-저는 물었죠. 인간이 싫은 게 아니냐고. 줄리어스는 대답했어요. ‘싫어하는 인간도 분명 있어.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좋은 사람도 많아.’

카트시의 안구가 엔엔을, 그리고 가하란을 바라봤다.

-저는 다시 말했어요. 그런 어중간한 태도가 문제를 일으킨다고. 줄이 대답했죠. ‘어쩔 수 없어, 카트시. 사람은 0과 1이 아닌걸.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쿵, 소리와 함께 의자가 넘어갔다.

벌떡 일어선 엔엔이 무심한 눈길로 카트시를 바라봤다.

가하란은 겁이 났다. 엔엔이 카트시를 부수려는 게 아닐지, 걱정됐다.

하지만 엔엔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오랫동안 카트시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카트시.”

엔엔이 입을 열었다.

-결정했나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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