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줄리어스.
헤르모드가 주절거린 옛 이야기를 토대로 인물상을 그려봤다.
진취적이면서 욕망에 솔직한, 이루고자 하는 바를 위해 율법을 수없이 어겨온 인간.
이룬 업적이 법 위에 있었기에 심판 대신 경배를 받은 냉혹한 연구가.
지식으로 권좌에 오른 강철의 여인.
그야말로 이상적이지 않은가!
지금의 황제가 절로 떠오를 정도다.
유단은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희열이 피어오른다.
줄리어스의 유산이 눈앞에 있다.
헤르모드가 기억을 복원한다면 과거의 영광을 현시대에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기억 복구 말이야,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고 했지?”
-그렇다.
“계속 백지 상태로 있는 거야? 그러면 재미없는데.”
-시냅스가 연결됨에 따라 기억나는 게 조금씩 늘어날 거다. 완료 기간을 예측하지 못할 뿐, 예상보다 빨리 끝날 수도 있지.
“지금은 어때? 줄리어스 얘기하는 걸 보면 조금은 복구가 된 거 같은데.”
-네 말대로 손상된 자료가 제자리를 찾고 있다.
유단은 다리를 쭉 뻗으며 물었다.
“네 창조주에 대해 더 말해봐. 어떤 걸 만들었는지, 무엇을 발견했는지.”
-질문이 조잡하군. 정확한 대답을 듣고 싶으면 정확한 질문을 해라.
“깐깐한 새끼. 네 창조주가 개발한 것 중에 쓸 만한 게 뭐가 있는지, 정리해서 말해봐.”
-그건 설명할 가치가 없다. 내 존재가 모든 걸 대변하니까.
“너 말고도 다른 게 있을 거 아니야. 그 잘난 자아 비슷한 거로 생각 좀 해봐. 어? 내가 당장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거라면 좋을 텐데.”
헤르모드가 잠깐 침묵한 뒤 말했다.
-네 기준에 부합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몇 가지 연구 자료가 있다.
“그래? 얼른 말해봐.”
-이 감각장치로는 전할 수 없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난 한 달간의 대화로 판단해 본바, 네 지적 능력은 그녀의 이론을 이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언어가 언어로써 제 기능을 못 하는 거지.
유단은 픽 웃으면서 유사 정령을 툭 쳤다.
“시끄럽고 넌 내가 시키는 대로 말하기나 해. 줄리어스가 연구해낸 것들이 뭔데?”
-거부권이 없으니 일단 말해주도록 하지. 하지만 네 머리로는 알아들을 수 없을 거다.
얼마나 대단한 거기에 저런 소리를 늘어놓는 건지.
유단은 선반에 몸을 기댄 채 헤르모드의 말을 기다렸다.
잠시 후 헤르모드가 빠른 속도로 말했다.
-그녀가 정립한 이론의 기반이 되는 것이 마력선 짜맞춤이다. 마력선 짜맞춤이란 평면상에 존재하는 정보체계를 가눕타 이형식에 의거해 누카 유도식 제2 법칙을 접합, 인식 불가한…….
유단은 왼발로 유사 정령을 차버렸다.
“알아듣게 말해. 뭔 소리야.”
-내가 말했을 텐데. 네 지적 능력으론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그보다 배경지식은 있는 건가?
“…뭐라는 거야. 좋아, 하나씩 하자. 가눕타 이형식이 뭐야?”
-콘벨타 역수 z에 대항하는 변동함수, 로 시작되는 총 178페이지의 논문이 있다. 하나하나 읊으면 될까?
“사람 말 하는 거 맞아?”
-기계어를 인간의 언어 틀에 맞춘 것들이다. 보통 사람은 개요부터 이해를 못 하지. 그게 당연한 거다. 아예 다른 체계니까.
“줄리어스는 그걸 다 이해한 거고?”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창조해냈다. 우리가 그 결과물이고.
욕지거리가 나온다.
유단은 유사 정령을 붙들며 물었다.
“어차피 좋은 소리 안 나올 거라는 걸 알지만, 내가 그걸 이해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논할 가치가 없다.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조차 개념만 겨우 알아들었을 뿐이다.
“좋아! 빌어먹을, 내가 그걸 이해할 리 없겠네.”
지식을 이어받는 건 힘들 것 같다. 그렇다고 이 보물을 썩혀둘 수도 없고.
“아까 네가 말한 거 있잖아. 마나를 쉽게 감각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치. 그런 것도 배경지식이 있어야 만들 수 있냐?”
-제품이라면 지식이 없어도 괜찮다. 마력선 도안이 기억 장치 안에 있으니까.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이제야 말이 통하네. 자료실 안에 가시화 패드가 있어. 그걸 연결하면 내가 도안 형태를 볼 수 있겠지?”
-해상도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나를 깨닫는다.
단지 시기적인 차이가 있을 뿐.
만약 원하는 때에 마나를 감각하고, 개발할 수 있게 된다면?
제국이 탐낼 물건이 헤르모드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짜릿했다. 운명이란 놈이 나에게 빛을 비추는구나, 싶었다.
“연구실 안이라 정제된 마나를 구하기도 쉬워. 커넥터가 항상 개방된 상태니까. 스크롤도 연습용으로 구비할 수 있고.”
-금이 있다면 좋겠지만 양피지로도 문제없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야. 재료가 까다로우면 준비하기 힘드니까.”
모든 것이 완벽했다.
향후 계획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줄리어스의 유산을 차근차근 현시대에 구현하는 것이다.
가치가 낮은 것부터 시작해 차츰 학회의 시선을 끈 다음, 지지 기반을 이뤘을 때 혁신적인 물건을 내놓는 것이다.
입지를 다지면 자료의 출처를 묻는 이들도 적어질 것이다.
그때쯤 되면 줄리어스의 이론 역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될 테고.
“네 말대로 우린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 같네.”
-편의주의적인 인간이군.
“다들 그렇지. 헤르모드, 또 다른 물건은 없어? 기왕 준비할 거 한 번에 하고 싶은데.”
-배경지식 없이 만들 수 있는 제품이라면 하나 더 있다.
“그건 어떤 기능이 있는데?”
-기계어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보조해주는 장치가 있다.
“구미가 당기네. 그걸 사용하면 줄리어스의 이론도 알아들을 수 있는 건가?”
-어느 정도는. 하지만 모든 걸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알아듣는 것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건 다르니까.
“그 정돈 나도 알아. 모든 걸 완벽하게 파악할 필요는 없어. 네가 옆에서 도와주면 되니까. 나중에 윗사람을 상대할 때 적당히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이면 돼. 일단은 말이지.”
-그 정도라면 가능하다.
기계어 습득을 돕는 보조 장치.
우선순위가 정해졌다.
“보조 장치는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 건데? 가시화 패드에 해석된 내용을 내 눈앞에 보여주는 건가?”
-시력이 필요 없는 장치다. 네 머릿속에 직접 전해질 거니까.
“내 머릿속에?”
-그렇다.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개념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신호로 변환해 머리로 전달해주는 장치다.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말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식이었다.
“그것도 줄리어스가 개발한 거겠지?”
-그렇다.
“창조주란 말이 아깝지 않네. 근데 왜 그런 위대한 발명품들이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을까. 이유를 알아?”
-줄리어스가 모든 걸 파기해 버렸다.
“뭐?”
한쪽 눈을 찡그리며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 말인가?
-말년의 줄리어스는 인간을 혐오했다. 열등한 종자들이 자신의 유산을 이용하는 걸 끔찍하게 여겼지. 줄리어스가 곧잘 하던 비유가 바퀴벌레였다. 바퀴벌레가 고상하게 차려입고 식탁에 앉아 있는 꼴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쳐 죽이고 싶겠지.”
-줄리어스는 그렇게 했다.
“대단한 양반이네. 나타 왕조가 한순간 사라진 것도 그 여자의 공인가?”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물론 어머니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지만.
유단은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욕심이 많으신 분이었구나. 그래서 죽기 전에 자기가 만들어낸 걸 죄다 부숴버린 거고.”
-너는 이해하는 건가? 창조주를?
“어. 어떤 기분이었을지 알 것 같아. 점점 더 줄리어스가 마음에 드네. 그래, 인생은 그렇게 살아야지.”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나가야 할 때였다. 주변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헤르모드. 넌 뭐 원하는 거 없어?”
-나는 정보만을 원한다. 새로운 사실을 알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감정이 있다며. 연구실 구석에 처박혀 오랫동안 있었는데, 짜증 나거나 그러진 않아?”
-내가 감정을 보유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건가?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너에 대해서도 알아가야 하니까.”
-나는 분명 감정을 느끼고 있지만, 거기에 휘둘리진 않는다. 필요하다면 꺼둘 수도 있고.
하하, 웃음이 나왔다.
“그거 편하네. 감정을 꺼둘 수 있다는 거.”
-인간도 그렇게 하지 않나?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지. 아, 그리고 하나 더.”
벨브를 잠가 유등의 불을 끈 다음 말했다.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데도 계속 노래를 부르는 진짜 이유가 뭐야?”
-말했을 텐데. 호흡이라고. 그게 내 존재를 자각시킨다.
“줄리어스가 그리운 건 아니고?”
-시간은 너희에게나 유효한 개념이다. 나는 시간만큼은 감각하지 못한다. 그저 자료의 변화로 그걸 인지할 뿐. 그러니 그리움은 내게 생소한 단어다.
“기계니까. 그렇긴 하겠네. 아, 진짜 마지막. 넌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지?”
어둠에 녹아든 유사 정령을 보며 물었다.
-특별한 생각을 가져야 하나?
“아니. 그냥 궁금해서. 인간 손에 태어난 네가 인간을 어떻게 생각할지.”
-넌 널 낳은 부모를 매일 생각하며 지내나?
“아니. 종종 떠올라서 속이 뒤틀리긴 하지만.”
-인간의 기억 구조는 제멋대로라 원치 않는 기억이 표상하고 말지. 하지만 난 다르다. 모든 정보에는 주소가 붙어 있지. 필요할 때만 불러내는 형식이다. 난 생각이란 걸 필요할 때만 한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존재를 자각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지.
“다르구나. 인간과 기계는.”
-그럴 수밖에.
감각장치 커넥터를 제거하고 자료실 밖으로 나왔다.
탄드라 교수가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는 게 보였다.
“교수님. 여기 정리한 메모입니다.”
“나중에 확인해 볼게요.”
유단은 손을 앞으로 모은 채 교수를 바라봤다. 탄드라가 눈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질문이 있나 보군요. 말해봐요.”
“교수님. 유사 정령이 거짓말하는 게 가능할까요?”
“거짓말이라.”
탄드라는 익히 들어온 질문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린 다음 자리를 권했다. 의자에 앉고 교수를 바라봤다.
“유사 정령을 연구하다 보면 다들 그 생각을 하게 되죠. 인격화를 이루어내고, 우릴 지원하는 유사 정령이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까? 거짓말로 인간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까?”
유단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거짓말은 불가능해요.”
“가능성이 전혀 없을까요?”
“전혀요. 혹시 모를 확률조차 없어요.”
냉소적으로 답변하는 탄드라 교수였다.
“거짓말이 뭘까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미는 것이죠.”
“그런 행위가 왜 필요하죠?”
“상황이야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책임 회피를 위해, 더 큰 이득을 위해,”
“그래요. 사실을 감춘다는 행위로 이득을 얻을 때, 그렇게 된다고 판단했을 때 우린 거짓말을 하죠.”
탄드라가 검지로 머리를 톡톡 쳤다.
“그런 사고 판단은 고차원적인 영역이에요. 내 처지를 인지하고 상황을 파악하는 것부터가 거짓말의 시작이죠. 유사 정령은 그게 안 돼요.”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평상시였다면 그렇군요,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좀 더 집요하게 질문해야 했다.
“교수님. 만약 유사 정령이 감정을 획득했다면,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걸까요?”
(다음 편에서 계속)